책읽는사회 송년 시 낭송의 밤
“잘 가라, 2018”
2018년 12월 26일 수요일 저녁 7시
책읽는사회문화재단 강의실
저무는 해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밤
촛불을 켜고
거친 세월의 한 토막과 작별하는
송년 시 낭송회
차 례
제1부
여는 공연 | 쁘띠꼬숑 앙상블
한명희
이용훈
황규관
조금주
김윤정
임옥희
윤의식
제2부
여는 공연 | 이영경
이영경
한성옥
김경희
김은주
최경화
황주리
석진
모닥불 | 백석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닢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희망 | 이용훈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문득 어두워져 가는 세상
다들 희망이라고는 잃어버리고 살아가는데
문득
그 사람이 희망을 이야기할 때
왠지
두렵습니다.
꽃은 보이지 않아도
넉넉히 피어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산은 내 눈 앞에 없어도
그리도 단단하게 제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있을 것 같지도 않았던 바람은 쏜살같이 다가와
제 모습 한동안 드러내고 가는 것을 보고,
와, 다들 저렇게 제자리에 있구나 하고
감탄하면서도
늘상 희망 같은 것은 잊고 사는 것에
이력에 난 내게
희망이 있다고, 그것으로도 살만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가을걷이 끝나고 나서도 손이 비어있는
나에게
그렇게도 그리운 바람을 보여주는
싱싱한 깃발입니다.
반달 | 김수영
음악을 들으면 차밭의 앞뒤 시간이
가시처럼 생각된다
나비 날개처럼 된 차잎은 아침이면
날개를 펴고 저녁이면 체조라도 하듯이
일제히 쉰다 쉬는 데에도 규율이 있고
탄력이 있다 구월 중순 차나무는 거의
내 키만큼 자라나고 노란 꽃도 이제는
보잘 것 없이 되었는데도 밭주인은
아직도 나타나 잘라 가지 않는다
두 뙈기의 차밭 옆에는 역시 두 뙈기의
채소밭이 있다 김장 무나 배추를 심었을
인습적인 분가루를 칠한 밭 위에
나는 걸핏하면 개똥을 갖다 파묻는다
밭주인이 보면 질색을 할 노릇이지만
이 밭주인은 차밭 주인의 소작인이다
그러나 우리 집 여편네는 이것을 모두
자기 밭이라고 한다 멀쩡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런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거짓말을 해도 별로
성과는 없었다 성과가 없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편네의
거짓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음악을 들으면 차밭의 앞뒤 시간이
가시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그 가시가
점점 더 똑똑해진다 동산에 걸린
새 달에 비친 나뭇가지처럼
세계를 배경으로 한 나의 사상처럼
죄어든 인생의 윤곽과 비밀처럼……
곡은 무용곡 ― 모든 음악은 무용곡이다
오오 폐허의 질서여 수치의 개가(凱歌)여
차나무 냄새여 어둠이여 소녀여
휴식의 휴식이여
분명해진 그 가시의 의미여
모든 곡은 눈물이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나의 얼굴의 사마귀를 떼주었다
입밑의 사마귀와 눈밑의 사마귀……
그런 사마귀가 나의 아들놈의 눈 아래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도 꼭 빼 주어야
하겠다고 결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내 눈 아래에 다시 생긴 사마귀는
구태여 빼지 않을 작정이었다
“눈물은 나의 장사이니까” ― 오오 눈물의
눈물이여 음악의 음악이여
달아난 음악이여 반달이여
내 눈 아래에 다시 생긴 사마귀는
구태여 빼지 않을 작정이다
첫눈 | 황규관
누가 등 뒤에서 나를 부른다
돌아보면
마른잎 한 장 없는 나무가 서 있고
붉은 노을도 없이 어두워지는 길이 있고
갈 곳 없는 집 나온 아이가 서성이고 있다
누구일까
나는 이제 누더기인데
찬바람에 자꾸 어깨가 시리고
살얼음 어는 소리에 마음이 서걱거리고
어두워지는 길을 향해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는데
누가 등 뒤에서 나를 부른다
돌아보면
빈들에 빼곡이 내리는 첫눈
잎 진 자리에
소리없이 몸 던지는 눈송이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 허수경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이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물건과 비슷하겠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에서 그대들은 나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않을 것이며
섬에서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속에는 눈물이 없다
다만 짤막한 안부 인사만, 이렇게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강요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다른 생명을 먹는다.
사망한 양배추를 곁들인 돼지고기 사체(死體).
모든 메뉴는 일종의 부고(訃告).
가장 고결한 사람들조차
죽임을 당한 뭔가를 섭취하고, 소화해야 한다,
그들의 인정 많은 심장이
박동하는 걸 멈추지 않도록.
가장 서정적인 시인들조차 그러하다.
가장 엄격한 금욕주의자들도
끊임없이 씹고, 삼킨다,
한때는 성장을 지속했던 어떤 대상을.
나는 이 대목에서 위대한 신들과 화해할 수가 없다.
혹시 그들이 순진무구하다면 모를까.
그들이 귀가 얇아서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권력을 자연에게 넘겨준 거라면 모를까.
그리하여 광란에 휩싸인 자연은 우리에게 굶주림을 선사하고,
굷주림이 시작되는 곳에서
결백은 종말을 고한다.
그 즉시 배고픔을 향해 모든 감각들이 달려든다.
미각, 후각, 그리고 촉각, 그리고 시각.
어떤 요리를 먹는지,
어떤 접시에 담겨 나오는지 도저히 무관심할 수 없기에.
심지어 청각도 동참한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 속으로,
식탁에서 유쾌한 대화가 오가는 건 흔한 일이니까.
獨樂堂 | 조정권
獨樂堂 對月樓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봉지공주와 봉투왕자 | 이영경
봉투왕자는 오늘도 머얼리 봉지나라를 바라보았어요.
사뿐히 날아올라 공중제비를 돌던 봉지공주.
봉지공주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봉지공주도 봉투왕자가 그리웠어요.
함께 보던 책을 어루만지며 속삭였어요.
“비닐봉지는 너무해……
종이가 옳아, 종이가 옳아.”
가을바람이 부는 어느 날,
봉지공주 앞으로 질끈 묶인 봉지 하나가
뎅그르르 굴러 왔어요.
봉지 속에 봉지, 봉지 속에 봉지,
또 봉지, 또 봉지…… 그 속에
봉투나라의 비밀특파원이 숨어 있었죠.
그는 봉지공주에게 편지를 건네고 재빨리 사라졌어요.
“사랑하는 봉지공주님
달이 크고 둥근 밤에 은하수 강가에서 만나요.
― 당신의 영원한 봉투왕자”
봉투왕자가 보낸 비밀 편지였어요.
봉지공주는 기쁘고 설레었어요.
정다운 추억을 떠올리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시간은 흘러 흘러 크고 둥근 달이 떠올랐어요.
봉지공주는 가볍게 날아올라 은하수 강가로 향했어요.
봉투왕자는 강물에 배를 띄우고
힘차게 노 저어 갔어요.
“뭣이! 봉지공주가 집을 나가?
이제 곧 페트병왕자가 도착할 텐데!
머저리 봉투 따위를 만나러 가다니!”
봉지나라 분리수거대마왕은 노발대발 화가 났어요.
“여봐라 ― , 딱풀부대를 당장 불러라. 봉투나라를 공격하라!”
“딱. 풀. 딱. 풀. 딱. 풀.”
딱풀부대가 발맞추어 앞으로 나아갔어요.
뽁! 뽁! 뽁! 뚜껑을 벗고는 닥치는 대로 풀칠을 해댔어요.
봉투나라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우왕좌왕했어요.
딱풀에 살짝만 닿아도 입이 ‘딱’ 붙어 기절해 버렸지요.
봉투왕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달콤한 꿈에 부풀어 노 저어 가고 있었어요.
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어요.
“네~ 봉투나라 봉투왕자입니다.”
“큰일났습니다! 딱풀부대가 쳐들어왔…… 윽!”
“여보세요? 여보세요!”
봉투왕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아, 은하수가 바로 저긴데! 봉지공주…….’
봉투왕자는 뱃머리를 돌렸어요.
봉투나라는 온통 풀 바다였어요.
봉투왕자는 용감하게 싸웠어요.
뎅겅! 뎅겅! 봉투왕자의 맹활약으로
딱풀부대의 기세가 꺾였어요.
봉투왕자는 딱풀들을 궁지로 몰았어요.
딱풀부대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어요.
드디어 봉투왕자가 결정타를 날리려는 순간,
딱풀들이 봉투왕자의 앞뒤에서 맹렬히 공격을 해왔어요.
봉투왕자는 그만, 끈적끈적 풀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고 말았어요.
딱풀들은 봉투왕자를 강물에 던져 버렸어요.
“풍덩!”
……
봉지공주 랩소디
― 박재란 노래 「님」의 가사에서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길 없네
왜 이리 그리운지 보고 싶은지
못 맺을 운명 속에 몸부림치는
병들은 내 가슴에 비가 내리네
서로 만나 헤어질 이별이건만
맺지 못할 운명인 걸 어이 하려나
쓰라린 내 가슴은 눈물에 젖어
애달피 울어 봐도 맺지 못할 걸
차라리 잊어야지 잊어야 하나
빵꾸송
빵 빵 빵꾸나면 어때요
구 구 구겨져도 어때요
빠스락 뿅 뿅 짜그락 슝 슝
노래합시다 헤이 헤이
구김새도 있어줘야
멋진 이의 완성
이젠 나도 쓸모 대신
미모 봉지공주
빵 빵 빵꾸나면 어때요
구 구 구겨져도 어때요
빠스락 뿅 뿅 짜그락 슝 슝
노래합시다 헤이 헤이
못 못 못 불러도 어때요
까 까 깜냥대로 해보는 거죠
빠스락 뿅 뿅 짜그락 슝 슝
노래합시다 헤이 헤이
노래합시다 헤이 헤이
노래합시다 헤이
흔들린다 | 함민복
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
익선이 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다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낡은 양복 | 박천호
십 년이 훌쩍 넘은 양복이
무표정한 얼굴로 걸려있다
유행 지난 깃이며
어색한 때깔이 낯설다
처음 이 옷을 입었을 때의
벅찬 감동이 어디엔가 남았을 텐데
우아한 자태로 빛나던 그날
화려한 박수소리 배어있을 텐데
매만지는 손끝으로 밀려오는
단추 구멍 허전한 실밥의 감촉
아직 좀 더 입어야 하나
아니면 미련 없이 버려야 하나
접혀지지 않는 바지춤 붙들고
길게 이어진 거울 속으로 향한다.
혼자 | 이병률
나는 여럿이 아니라 하나
나무 이파리처럼 한 몸에 돋은 수백 수천이 아니라 하나
파도처럼 하루에도 몇백 년을 출렁이는
울컥임이 아니라 단 하나
하나여서 뭐가 많이 잡힐 것도 같은 한밤중에
그 많은 하나여서
여전히 한 몸 가누지 못하는 하나
한 그릇보다 많은 밥그릇을 비우고 싶어 하고
한 사람보다 많은 사람에 관련하고 싶은
하나가 하나를 짊어진 하나
얼얼하게 버려진, 깊은 밤엔
누구나 완전히 하나
가볍고 여리어
할 말로 몸을 이루는 하나
오래 혼자일 것이므로
비로소 영원히 스며드는 하나
스스로를 닫아걸고 스스로를 마시는
그리하여 만년설 덮인 산맥으로 융기하여
이내 녹아내리는 하나
플라이 미 투 더 문 | 황주리
동생의 뼈들을 고운 가루로 가는 시간은 찰나였다. 무거운 육신이 그렇게 가벼운 가루들로 흩날리는 게 믿어지는가.
동생은 내 나이 여섯 살 때 태어났다. 동생이 태어난 날 보았던 그 훤하고 잘생긴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한 동생을 어린 나는 늘 질투했다. 동생은 어릴 적부터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아이였다. 게다가 어른스럽기까지 해서 어머니는 우리 둘이 어딘가 갈 때마다 누나가 아닌 동생한테 돈을 쥐어주곤 하셨다. 나는 여섯 살이나 어린 동생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영화를 좋아했고, 중학생인 나는 초등학생인 동생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갔다. 당시 낙원동에 살아 파고다극장에 가서 〈돌아온 외팔이〉 시리즈를 보았다. 허리우드 극장이 생긴 뒤로는 그곳에서 이소룡 영화들을 보았다. 동생은 이소룡의 광팬이 되었다. 이소룡이 죽은 날 동생은 울었다. 동생과 함께 본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가족들이 함께 가서 본 〈사운드 오브 뮤직〉과 〈닥터 지바고〉다. 어쩌면 1950~6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 대부분의 기억 속에 가장 인상 깊이 남아있는 영화가 바로 이 둘이 아닐까?
시카고의 명문 대학에서 광고 필름을 전공한 동생은 외국회사에 취직해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몇 년 뒤 재벌가의 누군가와 손을 잡고 꿈에도 그리던 영화제작을 시작한 이후, 동생의 인생은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속으로는 꼬이기 시작했다. 영화는 동생을 행복하게 했지만, 영화 사업을 시작한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힘들었다는 건 알았지만, 과연 나는 내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 했던 걸까? 어느 날 문득 동생이 남기고 간 아이패드를 열어보고는 기가 딱 막혔다. 그 애가 만지던 기계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 애의 손길이 스쳐간 한글과 알파벳과 모든 숫자와 기호들, 힘들었던 지난 몇 달간의 기록이 그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의 메모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내가 우려하던 모든 일이 일어났다.” 그게 그렇게 큰일이었던 걸까?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 이후 나는 동생의 핸드폰을 계속 살려놓았다. 그 속에는 그 애가 좋아하던 많은 음악들과 일기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핸드폰 속에 남아있던 이런 구절은 동생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나이 들수록 모르는 일만 늘어간다. 어릴 땐 왜 난 이렇게 아는 게 많을까 생각했는데.” 어릴 적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사는 게 겁이 났다. 그래서 조심조심 넘어지지만 말자 하며 살아왔다. 동생은 맨땅에 헤딩하며 용감하게 살다가 한 방에 가버렸다. 우린 서로 다른 그 점에 의지하며 살았다. 자주 싸웠지만 어떤 감성의 예민한 결 부분에서는 아주 잘 통했다. 어쩌면 나와 가장 가깝게 소통하는 유일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동생에게 남긴 유언은 세상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누나를 잘 보살피라는 것이었다. 그런 동생이 나보다 먼저 갔다. 동생이 떠난 이후 한동안 나는 밤마다 동생의 핸드폰으로 내게 전화를 했다. 누나라고 찍혀있는 번호를 누르면 ‘밥 말리’의 〈돈 워리 비 해피〉 노래가 나오면서 내 핸드폰에 ‘황정욱’이라는 동생의 이름이 찍혔다. 살아생전 새벽 2시경이면 울리던 전화 벨소리, “누나 자?” 하는 그 목소리가 그리워서다. 얼마 전부터 나 혼자 즐기는 이 슬픈 놀이를 그만두었다.
새벽에 갑자기 눈을 뜨면 그 애는 침대맡에 생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걸터앉아 똑같은 말투로 말한다. “엄마한테 잘해. 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제발 너무 먼 나라들로 여행 좀 그만 가고.” 여행광인 나와 달리 동생은 돌아다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먼 데 좀 작작 가라고 잔소리를 하곤 했지만, 정작 그 애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플라이 미 투 더 문〉이었다. 나는 동생이 세상에서 제일 먼 달나라로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달을 아무 생각 없이 올려다볼 수 없다. 그 노래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in other words, I love you.”
대숲 아래서 | 나태주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소나기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소리.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이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모두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을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