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마음씨 좋은 사람 슈타인라우프가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그 말은 훈련되지 않은 나의 귀에는 생소했고, 부분적으로만 이해되고 수긍되었으며, 좀더 가볍고 융통성 있고 부드러운 가르침으로 바뀌었다. 이 가르침은 수백 년 전부터 알프스산 너머 저편의 사람들에게는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다. 하지만 또 그 가르침에 따르면, 다른 하늘 아래에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낸 도덕 체계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헛된 일은 없다. 그렇다. 슈타인라우프의 지혜와 충실함은 그에게는 충분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 복잡한 암흑 세계와 대면한 나의 생각들은 혼란스럽다. 정말 체계를 세워서 그것을 실천해야 할까? 아니면 체계가 없는 것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더 나을까?
…
알베르토는 내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나보다 두 살 어려 스물두 살밖에 안 되었지만 우리 이탈리아인들 중 알베르토만큼 뛰어난 적응력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베르토는 당당하게 수용소에 들어왔고 상처 입지 않고 타락하지도 않은 채 수용소에 살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 빨리 이 삶은 바로 전쟁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스스로 응석 부리는 것 따위는 허락하지 않았다. 불평을 하거나 자신과 타인들을 연민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첫날부터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그를 지탱하는 건 지혜와 본능이다. 그는 정확하게 사고했다. 종종 아예 생각을 안 하기도 하는데, 그것도 마찬가지로 옮은 일이다. 그는 모든 것을 즉시 이해한다. 그가 아는 건 약간의 프랑스어뿐인데 독일인이 말해도 폴란드인이 말해도 다 알아듣는다. 그는 이탈리아어와 몸짓으로 대답하고 의사를 전달해서 곧 호감을 얻어낸다. 그는 삶을 위해 이렇게 투쟁하지만 늘 만인의 친구가 된다. 그는 누구를 매수해야 하는지, 누구를 피해야 하는지, 누구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켜야 하는지, 누구에게 반항해야 하는지를 ‘안다’.
하지만 그 자신은 부패한 인간이 되지 않았다(바로 이런 그의 장점이 그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소중하고 친근하게 만든다). 나는 늘 그에게서 강하면서도 온유한, 보기 드문 인간의 모습을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다. 그는 어둠의 무기들을 무디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
그는 이탈리아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싶어한다. 나도 그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면 정말 기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당장이라도. 이것을 하나 저것을 하나 매한가지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 이 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로마 출신의 리메타니가 상의에 반합을 숨긴 채 다리를 질질 끌며 지나간다. 피콜로가 주의 깊게 듣더니, 우리 두 사람의 대화에서 몇 마디 단어를 알아듣고는 웃으면서 그대로 흉내를 낸다. “주-파, 캄-포, 아-쿠아.”(죽, 수용소, 물)
스파이인 프랭클이 지나간다. 우리는 걸음을 재촉한다. 아무도 모르지만 그는 악 그 자체를 위해 악을 행하는 자다.
…오디세우스의 노래. 어떻게, 무엇 때문에 그 생각이 내 머리에 떠올랐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이미 한 시간에서 시간이 얼마쯤 흘렀다. 장이 똑똑하다면 이해할 것이다. 이해할 것이다. 오늘 나는 그가 충분히 그럴 것이라 느낀다.
…단테는 어떤 사람인가. 『신곡』은 무엇인가. 『신곡』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설명하려 애쓰다 보면 어느새 신선하고 낯선 감정이 생겨난다. ‘지옥’이 어떻게 나뉘어 있는지, 거기서 어떤 벌을 받는지. 베르길리우스는 이성이고 베아트리체는 신학이다.
장이 매우 주의 깊게 듣는다. 나는 천천히, 정확하게 시작한다.
오래된 불꽃의 가장 높은 뿔은 중얼거리면서
펄럭거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마치
바람을 지치게 하는 불꽃인 듯했다.
그리해 끄트머리를 이리저리 내저으며
마치 말을 하는 입인 듯 꼭 그와 같이
소리를 내 말하였다.
“아이네아스가…”
- 단테, 『신곡』지옥편, 제26곡 85~91행
나는 여기서 멈추고 번역을 해보려고 했다. 절망적이다. 가여운 단테. 형편없는 프랑스어! 하지만 경험에서 가망이 보이는 듯하다. 장은 희한할 정도인 언어의 유사성에 감탄한다. 그리고 ‘오래된’으로 옮길 수 있는 적절한 단어를 일러준다.
그런데 ‘그때’ 다음이 뭐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에 구멍이 뚫렸다. “아에네아스가 그를 가리켜 가에타라 이르기 전에….” 그 다음 또다시 구멍. 별 쓸모 없는 단편적인 문장 몇 개가 떠오른다. “늙은 아버지에 대한 효성도 또 아내 페넬로페를 틀림없이 기쁘게 해주었을 마땅하고도 어엿한 사랑도…” 이게 맞나? 그 다음이 정확히 뭘까?
그리하여 깊고 광활한 바다를 향해 나를 던졌다.
이거다. 이것이 분명하다. 피콜로에게 설명할 수 있다. 왜 ‘misi me’(나를 던졌다)가 ‘je me mis’(나를 놓다)가 아닌지를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이 훨씬 더 강하고 대담하며, 이미 깨져버린 관계를 나타내며, 자기 자신을 경계 너머로 던져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충동을 잘 알고 있다. 깊고 광활한 바다. 피콜로는 바다를 여행한 적이 있고, 그래서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수평선이 저절로, 자유롭게, 일직선으로 단순하게 뻗어나가는 때를 의미한다. 그때는 이미 바다 냄새밖에 나지 않는다. 달콤한 것들이지만, 잔인할 만큼 멀리 있다.
우리는 케이블 설치 코만도가 일하는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작업장)에 도착했다. 틀림없이 엔지니어 레비가 있을 것이다. 그가 있다. 구덩이 밖으로 머리만 보인다. 그가 내게 손짓을 한다. 그는 용감한 사람이다. 나는 그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먹는 이야기도 절대 하지 않는다.
‘광활한 바다’, ‘광활한 바다.’ 나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라는 구절과 압운까지 맞는다. ‘적은길벗들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구절이 먼저인지 나중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행,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로의 그 무모한 여행도, 나는 산문으로 들려줄 수밖에 없다. 신성모독이다. 겨우 한 구절밖에 살려내지 못했는데, 그래도 그 구절은 머물러 음미할 가치가 있다.
그 누구도 넘어 나아가지 못하도록
‘나아가다’(si metta). 나는 이 말이 조금 전의 그 표현 ‘misi me’와 같다는 것을 알기 위해 이 수용소에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장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한 발견인지 확신이 없다. 해야 할 다른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해가 벌써 중천에 떴다. 정오가 가깝다. 나는 서두른다. 미친 듯이 서두른다.
이거야, 잘 들어 봐, 피콜로. 귀와 머리를 열어야 해. 날 위해 이해해줘야 해.
그대들이 타고난 본성을 가늠하시오.
짐승으로 살고자 태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덕德과 지知를 따르기 위함이라오.
마치 나 역시 생전 처음으로 이 구절을 들은 것 같았다. 날카로운 트럼펫 소리, 신이 목소리가 들이는 듯했다. 잠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 있는지 잊을 수 있었다.
피콜로가 다시 들려달라고 간청한다. 피콜로는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그는 지금 이렇게 하는 게 나를 위한 일임을 알고 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잘것없는 번역과 진부하고 성급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가 메시지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고된 노동을 하는 인간, 특히 수용소의 우리들과, 죽통을 걸 장대를 어깨에 지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두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의 길벗들은 무던히도 가고 싶은 욕망에 불타
‘가고 싶은 욕망에 불타’가 뜻하는 것들을 설명해보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여기서 다시 공백이 생긴다. 이번에는 어떻게 메울 수가 없다. ‘달님 아래의 빛이었다.’ 뭐 이런 것이었나? 그런데 그 앞 구절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말하듯 ‘keine Ahnung’(모른다)이다. 용서해줘, 피콜로. 최소한 네 줄은 잊어버렸어.
"Ca ne fait rien, vas-y tout de meme."(괜찮아요, 하여튼 계속해요)
산이, 거리 때문에 희끄무레하게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높아 보였다.
그래, 그래. ‘molto alta’(굉장히 높아)가 아니라 ‘alta tanto’(그렇게 높아)야. 결과를 나타내는 문장이야. 멀리 보이는 산들… 산들… 오, 피콜로, 피콜로, 뭐라고 말 좀 해봐, 말해봐. 내가 밀라노에서 토리노로 기차를 타고 돌아갈 때 희끄무레하게 보였던 그 산들 생각에 빠져들게 내버려두지 말아줘!
됐다, 계속해야지. 이런 것들은 생각은 하지만 말하지는 않는 것들이다. 피콜로가 기다리며 나를 바라본다.
‘그렇게 높아 보였다’ 다음과 맨 마지막 행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있다면 오늘 먹을 죽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운韻을 통해 행을 재구성해보려고 애를 쓴다. 눈을 감고 손가락을 깨문다. 그러나 소용이 없다. 나머지 행들은 잠잠하다. 다른 구절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춘다. ‘비에 젖은 땅에서 바람이 일고…’ 아니다, 이건 다른 부분이다. 늦었다, 늦었어. 부엌에 도착했다. 결론을 내려야 한다.
세 번이나 그것이 물로 완전히 뒤덮여버리더니
네 번째에는 선미가 위로 치켜올라가
뱃머리가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분이 원하는 대로.
나는 피콜로를 붙잡는다. 이 구절을 꼭, 그것도 빨리 들어야만 한다. 내일 그가, 아니면 내가 죽을 수도 있고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너무 늦기 전에 ‘그분이 원하는 대로’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그에게 말해야 한다. 중세에 대해, 그토록 인간적이고 필연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뜻밖인 그 시대착오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제야 순간적인 직관 속에서 목격한, 이 거대한 무엇인가를, 어쩌면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오늘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죽을 타려는 사람들, 다른 코만도에서 죽을 가지러 온 누더기를 걸친 지저분한 사람들 속에 있다. 새로 도착한 사람들이 우리 뒤로 모여든다. “Kraut und Ruben?”(양배추와 순무) “Kraut und Ruben.” 오늘의 죽에는 양배추와 순무가 들었다고 공표된다. “Choux et navets.” “Kaposzta es repak.”
마침내 바다가 우리 위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