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인간이 공유한 이성에 따라 일을 완수할 수 있는 곳에서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올바른 길을 가고 있고 우리의 소질에 맞게 진행되는 활동에 힘입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는 해를 입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에 경건한 마음으로 만족하는 것, 현재의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 어떤 것도 검정을 거치지 않은 채 마음속에 몰래 스며들지 못하도록 현재의 인상을 세심하게 분석하는 것, 이것은 네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남의 지배적 이성을 보려고 두리번대지 말고, 본성이 너를 인도하고 있는 목표를 직시하라. 너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통해 우주의 본성이 인도하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통해 네 본성이 인도하는 목표를 직시하라는 말이다. 각자는 제 소질에서 비롯되는 것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것들은 이성적 존재들을 위하여 만들어졌다. 그것은 모든 영역에서 열등한 것들이 우월한 것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과도 같다. 한편 이성적 존재들은 서로를 위하여 만들어졌다.
인간의 소질에서 으뜸가는 것은 공공심이고, 두 번째는 육체적 자극에 양보하지 않는 것이다. 이성적 움직임과 지성적 움직임의 특징은 자신을 한정하고 감각적 움직임과 충동적 움직임에 결코 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둘 다 동물적인 까닭이다. 그러나 지성적 움직임은 우월하기를 원하고, 감각적 움직임과 충동적 움직임에 제압당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성적 움직임은 그 본성상 이들 움직임을 이용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의 소질에서 세 번째 특징은 성급한 판단을 피하고 기만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적 부분이 이런 원칙들을 견지하며 곧장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그러면 그것은 제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마치 지금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난 듯이 여생을 덤으로 살되 자연에 맞게 살도록 하라.
너 자신에게 일어난 것과 운명이 너를 위하여 자아놓은 것만을 사랑하라. 그보다 더 적절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똑같은 일을 당할 때 성내고 당황하고 욕하던 자들을 눈앞에 떠올리도록 하라. 지금 그들은 어디 있는가? 아무 데도 없다. 어쩌겠다는 것인가? 너도 그들처럼 하겠다는 것인가? 왜 너는 남의 일탈은 그런 일탈을 초래하거나 그런 일탈에 빠진 사람에게 맡겨두고, 너 자신은 어떻게 하면 그런 일탈을 이용할 수 있겠는지에 온 정신을 집중하려 하지 않는가? 너는 그것을 잘 이용할 수 있고, 그것은 너에게 소재가 되겠기에 하는 말이다. 다만 명심하고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너 자신에게 아름다운 자가 되기를 원하라. 그리고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과, 행동의 목표도 중요하다는 것, 이 두 가지도 명심하라.
네 안을 들여다보라. 네 안에는 선의 샘이 있고, 그 샘은 네가 늘 파내어야 늘 솟아오를 수 있다.
육신도 단단해야 하고 움직일 때나 정지해 있을 때 일그러져서는 안 된다. 마음이 현명하고 점잖은 표정을 유지함으로써 얼굴 표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을 우리는 육시 전체를 위해서도 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가식 없이 행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