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편 인간의 인식에서 신으로의 이행
384-(98) 오류로 이끌어가는 편견. 모든 사람들이 방법만을 연구라고 목적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면 개탄스럽다. 사람마다 자기 신분에 따르는 책임을 어떻게 다할까를 생각하지만 신분과 조국의 선택은 운명에 맡긴다.
그 많은 터키인, 이단자, 불신자들이 각자 이것이 최선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조상들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면 가엾어진다. 또 이런 이유로 사람마다 열쇠공, 군인 등등의 신분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미개인들에게 프로방스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다.
385-(208) 어찌하여 내 지식은 한정되어 있는가. 내 키는? 그리고 내 수명은 천년이 아니라 백년으로? 자연이 나에게 그런 수명을 주고 다른 수數보다 이 수를 택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무한 속에서는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더 탐낼 만한 것이 없으니 굳이 다른 것을 제쳐놓고 이것을 택할 이유란 없으니까 말이다.
386-(37) 모든 것을 조금씩.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전체를 앎으로써 보편적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조금씩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 가지 일의 전체를 아는 것보다 모든 것을 조금씩 아는 것이 훨씬 더 좋기 때문이다. 이 보편성이야말로 가장 멋지다. 둘을 겸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어차피 선택할 바에는 전자를 택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또 그렇게 한다, 그들은 종종 훌륭한 판단자이기에.]
386-(86) [나는 게걸대는 사람이나 먹으면서 헐떡거리는 사람을 보면 왠지 싫어진다. 기분氣分은 얕잡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에서 무슨 이득을 얻는가. 그 힘이 자연적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따르는 것인가.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이에 저항하는…….]
388-(163의 2) [사랑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것보다 인간의 공허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전세계가 그것 때문에 변하였으니 말이다(클레오파트라의 코).]
389-(693) H. 5. 인간의 맹목과 비참을 보면서, 침묵하는 전 우주를 바라보고 또 아무 빛도 없이 홀로 내던져져 마치 우주 한구석에서 미아가 되기라도 한 듯 누가 그 자리에 자기를 두었는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죽어서는 무엇이 될지도 모를뿐더러 어떤 인식도 불가능한 인간을 바라보면서, 나는 잠든 사이에 황막하고 끔찍한 섬으로 실려가 눈을 떠보니 어디에 자기가 있는지도 모르고 또 거기서 빠져나올 방도도 없는 사람처럼 공포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다지도 비참한 상태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절망에 빠지지 않는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나는 내 주위에 유사한 본성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본다. 나는 그들에게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느냐고 물어본다. 그들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 비참한 미아들은 주위를 둘러본 다음 무엇인가 즐거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것에 매달리고 집착하였다. 나는 이런 것에 애착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확연한가를 생각하며, 혹시 신이 자신의 표시를 남기지는 않았는지 찾았다.
나는 상반된, 따라서 단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거짓된 여러 종교들을 본다. 종교마다 각기 고유의 권위로써 믿음을 요구하고 불신자들을 위협한다. 그래서 나는 그 점 때문에 그것들을 믿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게 말할 수 있고 누구나 예언자라 칭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보면 거기에는 예언이 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390-(72) H. 9. 인간의 불균형. [자연적 지식이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바로 여기다. 만약 이 지식들이 진실되지 않다면 인간에게는 어떤 진실도 있을 수 없다. 만약 그것들이 진실되다면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를 낮추어야 할 커다란 겸손의 이유를 그 안에서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것을 믿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자연을 한층 깊이 탐구하기에 앞서 한번 진지하게 그리고 마음껏 자연을 관찰하고 또 자기 자신도 바라보기 바란다. 그리고 거기에 어떤 규형이 있는지를 알고…….]
그러므로 인간은 전 자연을 그 높고 충일한 위용 가운데 관망하고 자기를 에워싼 낮은 사물들에서 눈을 먼 곳으로 돌리기 바란다. 우주를 밝히는 영원한 등불처럼 걸려 있는 저 찬란한 빛을 보라. 지구는 이 천체가 그리는 커다란 궤도에 비하면 한 점과 같은 것으로 나타남을 보라. 그리고 또 이 커다란 궤도 자체도 천공을 떠도는 뭇 천체들이 포용하는 궤도에 비하면 극히 미세한 한 끝자락에 불과한 것임을 보고 놀라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시야가 거기서 멈추면 상상력이 이것을 넘어서게 하라. 자연이 제공하기보다 오히려 상상력이 받아들이기에 더 지칠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는 자연의 광대한 품 안에서 한갓 지각할 수도 없는 한 점일 뿐이다. 어떤 상념도 이 광대한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 저편까지 그 아무리 우리의 관념을 부풀려본들 소용없다. 사물들의 실체에 비하면 우리가 낳는 것은 단순한 원자에 불과하다. 그것은 도처에 중심이 있고 원주圓周는 어디에도 없는 무한한 구체球体이다. 요컨대 우리의 상상력이 이 상념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것은 신의 전능하심을 감지하게 하는 가장 큰 표시이다.
인간은 이제 자신으로 돌아와 존재하는 것에 비해 자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보라. 자연의 외떨어진 변경 한구석에서 길잃은 자기를 보고 이 비좁은 감방, 다시 말해 이 우주 속에서 지구와 왕국들과 도시들과 자신을 각기 올바른 가치대로 평가하기를 배우라. 무한 속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놀라운 또 하나의 경이驚異를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가 아는 한 가장 미세한 것을 찾아보게 하라. 한 곰팡이 벌레의 작은 몸 속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작은 부분들, 관절을 가진 다리, 다리 속의 혈관, 혈관 속의 혈액, 혈액 속의 체액, 체액 속의 방울, 방울 속의 체기体氣 등을 그로 하여금 보게 하라. 이 최후의 것을 또다시 분할함으로써 인간이 이것들을 받아들이는 데 인간의 사고력을 소진시키며 마침내 그가 도달할 수 있게 된 최후의 대상이 지금 우리의 논의의 대상이라고 하자.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최소의 것이라고 그는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새로운 심연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에게 눈에 보이는 우주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광대무변의 것을 이 축소된 원자의 울타리 안에 그려 보이고 싶다. 그는 그 안에서 무수한 우주, 보이는 세계와 동일한 비율로 각기 하늘과 유성과 지구를 가지고 있는 무수한 우주를 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 지상에서 뭇 짐승들을 보고 마침내 곰팡이 벌레를 보며 그 속에서 앞서 발견했던 모든 것을 재발견하기 바란다. 그리고 또 다는 것들 가운데서 끝도 휴식도 없이 동일한 것을 발견함으로써 그는 끝내 이 경이 속에서, 광대廣大함으로 인해 놀라웠던 전자의 경이에 못지않게 미소微小함으로 인해 놀라운 이 경이 속에서 정신을 잃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 속에서, 실은 이것도 전체의 품안에서는 눈에 띄지도 않겠지만, 감지할 수도 없었던 우리의 육체가 이제는 도달할 수 없는 무無에 비하면 하나의 거인, 하나의 세계, 아니 하나의 전체임을 보고 그 누가 경탄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자기를 관찰하는 사람은 자기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자연이 그에게 부여한 부피로 인해 무한과 허무 두 심연 사이에 걸려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이 경이 앞에서 전율할 것이다. 그의 호기심은 경탄으로 변함으로써, 그는 오만하게 이것을 탐구하기보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관망하려는 마음으로 기울어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국 인간이란 자연 속에서 무엇인가. 무한에 비하면 허무, 허무에 비하면 전체, 허무와 전체 사이에 걸려 있는 중간자이다. 양극兩極을 이해하는 데서 무한히 동떨어진 인간에게는 사물의 종극도 그 근원도 다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비밀 속에 숨겨져 있다. 인간은 그가 빠져나온 허무도, 그 안에 삼키어지는 무한도 다 같이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사물의 종극도 근원도 알지 못하는 영원한 절망 속에서 단지 사물들의 중간의 [어떤] 외양을 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만물은 허무에서 나와 무한을 향해 나아간다. 그 누가 이 놀라운 움직임을 따라가겠는가. 이 경이의 창조자는 이것들을 안다. 다른 누구도 알 수 없다.
이 두 무한을 바라보지 않은 탓으로 인간은 마치 자연과 어떤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라도 한 듯 외람되게 자연의 탐구에 나섰다. 그들이 그 대상만큼이나 무한한 오만으로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고 이것에서부터 만물을 아는 데까지 이르려 한 것은 기묘한 일이다. 이러한 계획은 자연과 같이 무제한의 능력이나 오만이 없으면 정녕 꿈꿀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교육을 받으면, 자연이 그 자신의 상像과 창조자의 상을 모든 사물에 아로새겼으므로 모든 것이 자연의 이중의 무한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학문이 탐구의 범위에 있어 무한하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가령, 기하학에는 제시해야 할 무한한 명제가 무한히 있다는 것을 그 누가 의심하겠는가. 이 명제들은 그것들의 원리의 수數와 복잡성에 있어서도 무한하다. 왜냐하면 최후의 것으로 제시하는 명제도 실은 그 자체로써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명제에 의지하고 있고, 또 이 명제는 다시 다른 명제를 기초로 삼고 있어서 결코 궁극의 것이 될 수 없음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물질계에서 그 성질상 무한히 분할될 수 있는 것이라도 우리의 감각이 그 이상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할 때 이것을 불가분의 점이라 부르는 것처럼, 우리는 이성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을 궁극의 것으로 정한다.
지식의 이 두 무한 중에서 대(大)의 무한은 한결 쉽게 감지된다.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드문 것은 이 때문이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데모크리토스는 말하였다.
그러나 소小에 있어서의 무한은 훨씬 덜 눈에 보인다. 철학자들은 차라리 그것에 도달하겠노라고 장담하였지만 바로 여기서 모두 실패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물의 원리>, <철학의 원리>와 같은 흔해빠진 제목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제목들이 생겨났다. 겉으로는 덜하지만 저 눈부신 De omni scibili라는 제목에 못지않게 화려한 책들이다.
사람들은 사물의 둘레를 포용하는 것보다 중심에 도달하는 것이 더 쉽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넓이는 분명히 우리를 초월한다. 그러나 작은 사물들을 초월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용이하게 이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전체에 도달하는 것 못지않은 능력이 필요하다. 어느 경우에도 무한한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물의 궁극의 원리를 깨달은 사람은 무한을 아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나는 또 하나에 의존하고 또 그것으로 인도한다. 이 양 극단은 서로 멀리 떨어진 나머지 맞닿고 결합되며 신 가운데, 오직 신 가운데 다시 만난다.
그러니 우리의 한계를 알자. 우리는 그 무엇이되 전체는 아니다. 우리가 존재로써 소유하고 있는 것은 무無에서 태어나는 기본 원리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우리 존재의 왜소함은 우리에게 무한을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지능은 우리 육체가 자연의 공간 속에서 차지하는 것과 동일한 자리르 지적 사물의 세계에서 차지한다.
우리는 모든 점에서 제안되어 있으므로 양극 사이에 중간을 유지하는 이 상태는 우리의 모든 능력 가운데 나타난다. 우리의 감각은 어떤 극단의 것도 느끼지 못한다. 지나친 소음은 귀멀게 하고 지나친 빛은 눈멀게 하며 지나치게 멀거나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잘 보지 못하게 한다.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거나 지나치게 짧으면 뜻이 흐려지고 지나친 진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나는 영零에서 4를 빼면 영이 남는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을 안다). 기본 원리들은 우리에게 지나치도록 자명하다. 지나친 쾌락은 괴로움이 되고 음악에서 지나친 화음은 불쾌감을 준다. 그리고 지나친 은혜는 화나게 한다. 우리는 빚진 것 이상으로 갚을 수 있는 것을 갖기 원한다. Beneficia eo usque laeta sunt dum videntur exsolvi passe ; ubi multum antevenere, pro gratia odium redditur. 우리는 극도의 뜨거움도 극도의 차가움도 감지하지 못한다. 극단적인 성질의 것들은 우리의 적이고 지각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고 고통을 받는다. 너무 젊거나 너무 늙어도 이성이 방해받고 교육이 지나치거나 부족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극단적인 사물들은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우리도 그것들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우리에게서 빠져나가거나 우리가 그것들에게서 빠져나간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상태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도 없고 완전히 모를 수도 없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정처 없이 떠다니며 한끝에서 또 한끝으로 떠밀려 광막한 중간을 표류한다. 어느 끝엔가 우리를 비끄러매 고정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 그 끝은 흔들리며 우리를 떠나간다. 그래서 뒤쫓아 따라가면 잡히지 않고 우리에게서 빠져나가 영원히 도주한다. 어떤 것도 우리를 위해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본래의, 그러나 우리의 성향과 가장 반대되는 상태이다. 우리는 어떤 견고한 기반, 최후의 변함없는 근거를 발견하고 그 위에 무한에까지 뻗어오를 탑을 세우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기초는 무너지고 대지는 심연에 이르도록 입을 벌린다.
그러니 확신과 견고함을 찾지 말자. 우리의 이성은 변화무쌍한 외관에 끊임없이 기만당하고, 아무것도 유한을 두 무한 사이에 고정시키지 못한다, 유한을 둘러삼키고 또 피하는 두 무한 사이에.
이것을 잘 깨닫기만 하면 사람들은 각자 자연이 정해 준 상태 안에서 조용히 머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몫으로 주어진 이 중간이 언제나 양극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면,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더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볼 것이다. 그러나 종극終極에서는 여전히 한없이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은 십년이 더 연장되더라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것이 아닌가.
이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은 동등하다. 무슨 이유로 인간이 자신의 상상력을 어떤 특정한 유한 위에 세우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우리를 유한과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인간이 먼저 자신을 탐구하면 그는 그 이상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어떻게 부분이 전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인가.-하지만 적어도 그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만이라도 알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부분들은 매우 긴밀하게 상호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부분들 혹은 전체를 모르고 한 부분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자기를 두기 위한 장소, 지속하기 위한 시간, 살기 위한 운동, 자신을 구성하기 위한 원소들, [자기를] 양육하기 위한 열과 음식, 숨 쉬기 위한 공기 등이 필요하다. 그는 빛을 보고 물체를 지각한다. 결국 모든 것은 그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알려면 어떻게 해서 그가 생존하기 위해 공기를 필요로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공기를 알려면 어떻게 공기가 인간의 생명과 이런 관계를 가지는지 등등.
불은 공기 없이는 존속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알아야 한다.
이렇듯 모든 것은 결과이자 원인이고, 도움 받으면서 돕고, 간접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또 가장 멀고 가장 상이한 것들도 연결하는 자연적이고도 감지할 수 없는 연관으로 서로를 지탱하고 있으므로, 나는 전체를 모르면 부분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분을 개별적으로 알지 못하면 전체를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물들의 그 자체로서의 혹은 신 안에서의 영원성은 우리의 짧은 인생을 다시 놀라게 할 것이다. 자연의 확고하고 변함없는 부동성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계속적인 변화와 비교하면 우리에게 동일한 느낌을 줄 것이다.]
사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에 결정타를 가하는 것은, 사물들은 단일한 것인데 우리는 종류가 다른 상반된 두 성질, 즉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울림을 내는 부분이 정신적인 것 외의 다른 것일 수 없기에 말이다. 그리고 우리를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면, 물질이 물질 자체를 인식한다고 말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므로 이것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물질이 어떻게 자신을 인식하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우리가 단순히 물질이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고,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었다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단일한 사물은 완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사물의 관념을 혼동하여 물질적인 것을 정신적으로, 또 정신적인 것을 물질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들은 무모하게도 물질은 밑을 지향한다, 물질은 물질의 중심을 그리워한다, 물질은 성질, 공감,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성질들은 오직 정신에만 속한 것들이다. 그리고 정신에 대해서는 마치 어떤 장소에 있기라도 한 듯 생각하여,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움직이는 운동성을 부여한다. 이것은 오직 물질에만 있는 속성이다.
우리는 순수한 사물들의 관념을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가 지닌 성질로써 그것들을 채색하고 또 우리가 보는 모든 단일한 사물들에 우리의 복합적인 존재를 새겨 넣는다.
우리가 모든 사물을 정신과 물질로 합성시키는 것을 볼 때, 이 혼합은 우리에게 매우 이해하기 쉬우리라고 그 누가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자연 중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인간은 육체가 무엇인지, 더더구나 정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하나의 육체가 어떻게 하나의 정신과 결합될 수 있는지는 그 무엇보다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난해한 문제의 극치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그의 고유한 존재이다. Modus quo corporibus adhaerent spiritus comprehendi ab hominibus non potest, et hoc tamen homo est.
끝으로 우리의 결함에 대한 증명을 완전히 매듭짓기 위해 마지막으로 다음 두 가지 고찰로…….
391-(347) H. 3.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뿐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
392-(206)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393-(517) 위로받아라! 당신이 위로를 기대해야 할 것은 당신에게서가 아니다. 반대로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위로를 기대해야 한다.
394-(431) 다른 누구도 인간이 가장 훌륭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우월성의 실체를 잘 이해하였는데, 그들은 인간이 자신에 대해 천성적으로 품고 있는 저속한 감정들을 비굴함이나 배은망덕으로 생각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저속함이 얼마나 실제적인가를 잘 깨달았는데, 이들은 인간에게 똑같이 천성적인 위대의 감정을 가소로운 오만으로 간주하였다.
한편에서는 말하기를, 당신들의 눈을 들어 신을 보라, 당신들이 닮은, 그리고 그를 찬양하도록 당신들을 창조한 신을 바라보라, 당신들은 신과 같이 될 수 있고, 그를 따르기를 원한다면 지혜가 당신들을 그와 동등하게 만들 것이라고 한다. <머리를 들어라, 자유로운 인간들이여!>라고 에피크테노스는 말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편에서는 말하기를, 천한 벌레와 같은 당신들은 눈을 낮추어 땅을 보라, 그리고 당신들의 동반자인 짐승을 보라고 한다.
그러니 인간은 무엇이 되겠는가. 신과 동등해지겠는가, 짐승과 동등해지겠는가. 이 얼마나 끔찍한 거리인가. 그러니 우리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 모든 것을 통해, 인간은 길 잃고 방황하며, 본래의 자리에서 추락하여, 불안스럽게 이 자리를 찾건만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누가 그 자리로 인도할 것인가. 가장 위대한 인간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395-(660) 정욕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제2의 본성을 이루었다. 이렇듯 우리 안에는 두 본성이 있다. 하나는 좋고 하나는 나쁘다. 신은 어디 있는가. 당신들이 있지 않은 곳에 있다. 그리고 신의 나라는 당신들 안에 있다. 랍비들.
396-(245) 믿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즉, 이성, 습관, (신의) 감화, 유일하게 이성을 가진 기독교는 신의 감화 없이 믿는 사람들을 진정한 신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성과 습관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람은 증거 앞에 그의 정신을 열어야 하고, 습관에 의해 믿음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신의 감화에 자기를 내맡겨야 한다. 이것만이 진정하고 유효한 결과를 낳는다. Ne evacuetur crux Chris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