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합창대를 설명하기 위해 여기서 내가 언급한 예술적 근원 현상은 예술 출현의 기초에 관한 오늘날 학자적 식견에게는 불쾌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아주 분명한 것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제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형상들을 보고 그것들의 가장 내밀한 본질을 감지함으로써만 시인은 시인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근대인의 천박한 재능으로 인해 우리는 미학적 근원 현상을 상당히 복잡하고 상당히 추상적으로 생각했다. 진정한 시인에게 은유란 수사학적 어법이 아니라 개념의 대체물로서 실제로 아른거리는 영상이다. 진정한 시인에게 극중 인물이란 여기저기서 몇 가지 특징을 모아 놓은 총합이 아니라 시인의 눈앞에 나타나는 살아 숨 쉬는 개인인바 동일인을 놓고 화가가 그린 영상과의 차이라면 시인의 영상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뿐이다. 호메로스가 여타 시인보다 탁월하게 눈앞에 보듯이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그만큼 탁월하게 눈앞에서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시에 관해 상당히 추상적으로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형편없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미학적 현상은 단순하다. 살아 있는 움직임을 끊임없이 볼 수 있고 주변에 맴도는 환영들을 계속 경험할 수 있다면 그가 곧 시인이다. 자신을 변신시켜 다른 육체와 정신을 얻어 이야기하려는 충동을 느낀다면 그가 곧 극작가다.
군중 전체에게 예술적 능력을 전수하여 주변을 맴도는 환영들을 보고 그들과 하나가 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 디오뉘소스적 흥분이다. 저 자신이 변하는 것을 보며 마치 실제로 다른 사람의 육신으로, 다른 인물로 들어간 듯 행동하는 것, 비극 합창대의 이런 도약이 연극의 근원 현상이다. 이런 도약이 연극 발전의 초기에 있었다. 이때 자신이 보는 영상 속으로 녹아들어 가지 않으며 흡사 화가처럼 자신 밖 영상들을 관찰자의 눈으로 보는 서사시 소리꾼들과는 다른 일이 발생한다. 타인의 본성으로 들어가며 개인은 사라진다. 그리고 이는 마치 전염병처럼 번져 간다. 군중 전체가 이렇게 마술처럼 자신들이 변했음을 느낀다. 때문에 디튀람보스는 여타의 합창대들과 크게 구별된다. 아폴론 찬가에서 처녀들은 손에 월계수 가지를 들고 아폴론의 신전으로 흥겹게 행진한다. 행진하며 길노래를 부른다. 처녀들은 저 자신을 유지하며 제 시민 이름을 간직한다. 반면 디튀람보스 합창대는 변신하는 합창대다. 그들에게 시인이었음은 과거일 뿐이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철저히 망각된다. 그들은 시간을 초월하고 모든 사회적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디오뉘소스의 시종들이다. 다른 모든 희랍의 합창시가 다만 아폴론적 시인이 겪는 커다란 흥취라면, 디튀람보스에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가운데 스스로가 변신하는 걸 보는 배우 집단이 망아忘我의 상태로 우리 앞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