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 대상들을 그러한 것으로 판정하기 위해서는 취미가 필요하나, 미적 기예[예술] 그 자신을 위해서는, 다시 말해 그러한 대상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천재가 필요하다.
천재를 예술에 대한 재능으로 간주하고 - 이것은 천재라는 말의 특유한 의미가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 이러한 관점에서 그것을, 함께 모여 그러한 재능을 이루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능력들로 분해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판정하는 데는 취미만이 필요한 자연미와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 그와 같은 대상을 판정하는 데 있어서는 이러한 가능성도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되는바 - 천재를 필요로 하는 예술미 사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자연미는 하나의 아름다운 사물이며, 예술미는 사물에 대한 하나의 아름다운 표상이다.
하나의 자연미를 그러한 것으로 판정하기 위해서 나는 그 대상이 어떠한 사물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개념을 미리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나는 질료적 합목적성(목적)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그러한 판정에서는 목적에 대한 앎 없이 순전한 형식이 그것만으로서 적의한 것이다. 그러나 대상이 예술의 산물로서 주어져 있고, 그러한 것으로서 아름답다고 언명되어야만 한다면, 예술은 언제나 그 원인(과 그것의 인과성) 안에 하나의 목적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물이 어떤 것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개념이 그 기초에 먼저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한 사물 안에서 잡다한 것이 그 사물의 내적 규정과, 즉 목적과 합치함이 그 사물의 완전성이므로, 예술미의 판정에서는 동시에 그 사물의 완전성이 고려되어야만 하지만, 자연미를 (자연미로서) 판정함에서는 그러한 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특히 자연의 생명 있는 대상들, 예컨대 사람이나 말을 판정함에서는, 그러한 것들의 미에 관해 판단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합목적성도 보통 함께 고려되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 역시 그 판단은 더 이상 순수-미감적인, 다시 말해 순전한 취미 판단은 아니다. 자연은 더 이상 예술처럼 보이는 것으로서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비록 초인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예술인 한에서 판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목적론적 판단이 미감적 판단의 토대 및 조건이 되는바, 미감적 판단은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경우에, 예컨대 “저 이는 아름다운 여자이다”라고 말할 때, 사람들이 실제로 생각하는 것은 ‘자연이 그녀의 형태에서 여성적인 체형상의 목적들을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대상이 그런 식으로 논리적으로-조건 지어진 미감적 판단에 의해 생각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순전한 형식을 넘어서 하나의 개념을 내다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예술은 자연에서 추하거나 적의하지 않은 사물들을 아름답게 묘사한다는 데에 바로 그 특징이 있다. 광포함들, 질병들, 전쟁의 폐허들,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은 재화災禍이지만, 매우 아름답게 묘사될 수 있고, 회화繪畫로도 표상될 수 있다. 오로지 한 종류의 추함만은 자연대로 표상되어서는 일체의 미감적 흡족이, 그러니까 예술미가 파괴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은 곧 구토를 일으키는 추함이다. 왜냐하면, 이 기묘한, 순전히 상상에 의거하는 감각에서 대상은, 이를테면 우리가 그 대상의 향수를 강력하게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대상의 향수를 강요하는 것처럼 표상되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에서 그 대상의 기교적인 표상과 이 대상 자신의 자연본성은 더 이상 구별되지 않으며, 그때 저 기교적인 표상이 아름답게 여겨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조각예술도 그 산물에 있어서 기예가 자연과 거의 혼동되기 때문에, 추한 대상들의 직접적인 표상을 그 조형물에서 배제하고, 그 대신에 예컨대 (아름다운 수호신에서) 죽음을, (군신軍神에서) 상무적 기상을 각별하게 적의한 어떤 우의寓意나 상징속성들을 통해, 그러니까 순전히 미감적인 판단력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해석을 매개로 해서 간접적으로만 표상하는 것을 허용해왔다.
어떤 대상에 대한 아름다운 표상은 본래 단지 하나의 개념을 현시하는 형식일 따름으로, 이 형식을 통해 그 개념은 보편적으로 전달되는 것인바, 이에 대해서는 이만큼만 언급해둔다. - 그러나 이 형식을 예술의 산물에 주기 위해서는 순전히 취미만이 필요한데, 예술가는 이 취미를 예술이나 자연의 여러 가지 사례들에 따라 훈련하고 교정한 후에, 자기의 작품을 이 취미에 맞추고, 또 이 취미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많은, 흔히는 수고로운 시도들을 되풀이한 후에 그를 만족시키는 이런 형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형식은 말하자면 영감이나 마음의 힘들의 자유로운 약동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사상思想에 맞추되 마음의 힘들의 유희에서 자유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천천히 그러나 고심하면서까지 개선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취미는 한낱 판정능력일 뿐, 생산적 능력이 아니다. 그 때문에 취미에 맞는 것이 바로 예술의 작품은 아니다. 그것은 배울 수 있고 정확하게 준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규칙들에 따르는 산물, 즉 유용한 기계적인 기예에 속하거나 또는 심지어 학문에 속하는 산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러한 산물에게 주는 적의한 형식은 단지 전달의 운반체이며, 말하자면 개진의 수법인바, 사람들은 다른 점들에서는 일정한 목적에 매여 있지만 이 개진의 점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롭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식기나 도덕 논문, 심지어는 설교조차도, 꾸민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되겠지만, 예술의 이러한 형식을 그 자체로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예술의 작품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 음악, 화랑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은 예술 작품에 들어간다. 그런데 우리는 의당 예술 작품이어야 하는 어떤 작품에서 왕왕 취미 없는 천재를, 또 다른 어떤 작품에서는 천재 없는 취미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