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진실로 격정적이며 유용한 업적은 항상 전문적 업적입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인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조롱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열정,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왜냐하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열정이 아무리 많고 순수하며 깊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열정만으로는 어떤 학문적 성과도 억지로 얻어 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열정은 학문에서 결정적 요인인 <영감>의 전제조건입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은, 학문이 <혼>을 바치는 작업이 아니라 단지 냉정한 지성만을 가지고 실험실이나 통계실에서 제조되는 계산문제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공장에서 상품이 만들어지듯이 말입니다.
이에 대해 무엇보다도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공장이나 실험실에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공장에서나 실험실에서나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 그것도 적절한 무언가가 - 사람의 머리에 떠올라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착상着想은 억지로는 안 됩니다. 착상은 그 어떤 냉정한 계산과도 무관합니다. 물론 계산도 역시 필수 불가결한 전제조건이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사회학자는 노년에 가서도 어쩌면 수개월간이나 아주 하찮은 수만 개의 계산문제를 머리 속에서 풀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에는 자신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어떤 결과를 얻고자 할 때, 그 작업을 기계적 보조수단들에 맡겨 버리려고 하면 벌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오는 결과도 대개는 지극히 미미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산의 방향에 대해서 어떤 특정한 생각이 그에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 지극히 미미한 결과마저도 나오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착상은 끈덕진 작업이라는 토양에서만 싹이 틉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마추어의 착상이 학문적으로 전문가의 착상에 못지 않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큰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학계의 가장 탁월한 문제제기와 인식 중 많은 것은 바로 아마추어들 덕분에 획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추어와 전문가의 차이점은 단지 - 헬름홀츠가 로베르트 마이어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 아마추어는 연구방법의 확고한 확실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착상의 의의를 사후검증하고 평가하거나 그 착상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점뿐입니다.
물론 착상이 작업을 대신하지는 못 합니다. 또 작업도 착상을 대신하거나 착상을 억지로 불러 낼 수는 없는데, 이것은 열정이 착상을 불러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둘, 즉 열정과 작업이 - 특히 그 둘이 합쳐져서 - 착상을 유인해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