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라는 말에는 감각적이거나 미학적인 것 이상의 큰 의미가 담겨 있다. 나보코프와 라이트힐 모두 공감각은 사물을 한가지의 지각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의 경험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열쇠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이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우리는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정의를 차용할 수 있다. 그는 “아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며, 이해한다는 것은 앎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우리의 친구 존은 물리학을 알았지만 이해하지 못했고, 레슬리 스티븐 역시 문학을 알았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감각적으로 경험한 것을 능동적으로 통합해야 한다.
타악기 연주자인 이블린 글레니Evelyn Glennie는 확신에 찬 어조로 같은 주장을 편다. 글레니는 공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녀는 고유수용감각이고 촉각적인 용어로 소리를 묘사한다. “나는 높고 딸랑거리는 소리를 상대할 때도 있고, 단단하고 날카롭고 짧은 소리를 상대할 때도 있으며 낮고 대담한 소리, 살찐 소리, 쿠션에 앉아 있는 듯한 감미로운 소리를 상대할 때도 있다.” 심지어 그녀는 콘서트홀의 음향이 “공기가 얼마나 두껍게 느껴지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한다. 글레니에게 있어서 공감각은 그녀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뒤에도 글레니는 다른 감각을 이용해서 음악을 듣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완전한 청각장애인이라 할지라도 소리를 듣고 느낄 수 있다”라고 말한다. 글레니의 경우에는 소리의 고유수용감각적 효과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다. 그녀는 낮은 음의 경우 주로 다리나 발을 이용해서 느끼고 높은 음은 얼굴의 특정 부위나 목, 가슴으로 느낀다. 록 콘서트 현장에 가보거나 서브우퍼를 장착한 스테레오 시스템으로 음악을 들어보면 이 느낌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글레니는 느끼는 소리와 듣는 소리에 차이가 전혀 없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입술의 움직임을 읽는 것과 말을 듣는 것과도 차이가 없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듣는다’라고 표현하지만 제 경우엔 보는 게 곧 듣는 거죠. 만일 누군가가 연필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걸 보면서 저는 ‘아, 소리가 나겠구나’ 하고 추측합니다.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거죠. 그러면서 저는 ‘듣는’ 겁니다. 이게 제 소리세계를 이루고 있는 기본원리라고 할 수 있어요. 전적으로 상상과 감촉과 느낌에 의한 것이죠. 보는 것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요. 제가 가진 모든 감각을 다 사용하는 겁니다.” 이 타악기 연주자는 머릿속으로 지각의 세계를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글레니처럼 감각과 사고를 융합하는 것은 창조력이 뛰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연상적 공감각만큼이나 흔한 일이다.
헬렌 켈러 역시 촉감과 냄새를 통해 보고 듣는다고 말하며 다음의 시를 썼다.
내 손은 감촉으로 모습과 소리를 불러내지.
감각들은 끝없이 자리를 서로 바꿔가며
동작과 모습을, 향기와 소리를 연결해주는구나.
헬렌 켈러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맞서야 했다. 그녀는 상상의 감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일 시각장애인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상상해 낼 수단을 전혀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애인의 마음은 상실된 육체적 감각에 해당하는 것을 제공해줍니다. 그것을 통해 외면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의 유사성,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일치를 지각할 수 있는 거지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감각융합능력을 키우건 안 키우건 간에 생각이라는 것은 감각과 지식 사이에 만들어지는 결합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감각기관들이 따로따로 지각작용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것들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통합하고 조정해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사과의 붉은색을 단맛과 연결시키는 능력 역시 감각이 통합적으로 기능할 때 가능하다. ‘사과’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 대부분은 공감각적 연상작용에 따라 마음의 눈으로 사과 한 알을 동시에 보게 된다. 그 다음 마음의 손으로 그것을 집어 그 매끈한 껍질과 촉촉한 질감을 느끼고, 마음이 입으로 달콤한 맛을 보며, 마음의 코로 독특한 향을 맡고 마음의 귀로 “와삭” 한 입 베어 무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사람들은 온 두뇌를 써서 사고한다. 사과 맛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혀 못지않게 눈, 코, 손의 감각도 중요하다. 맛 테스트를 할 때 참가자들 앞에 사과와 토마토 조각을 먹으라고 내놓으며 보지도, 냄새 맡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둘을 쉽게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모든 감각은 마음과 협력한다. 그것은 마음과 육체가 협력해서 동작의 균형을 취하게 하는 것과 똑같다. 토마토와 사과의 실험이나 뇌졸중, 내이감염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감각기관과 그 정보들이 서로 차단되면 지능에 혼란이 초래된다. 반대로 피자의 이미지와 초콜릿의 냄새를 억지로 결합시키면 마음의 감각이 교란된다. 마음과 몸은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다. 감각sense과 감성sensibility은 분리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세계를 복합적이면서 동시적으로, 그리고 교차감각적으로 지각하고 이해한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과’라는 단어를 쓸 수도 있고 소리 내어 발음할 수도 있으며 그림으로 그려볼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식물학자라면 사과의 학명을 술술 말할 수 있거나 진화계통상의 친척(들장미 같은) 목록을 쭉 꿸 수 있을 것이며, 농부라면 어떤 해충에 취약하고, 어떤 양분이 필요하고, 그것이 좋아하는 환경은 무엇이고, 파운드당 얼마에 팔리는지 등 사과와 관련된 수만 가지의 것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모두 한 단어 혹은 우리 혀가 알고 있는 맛에서 연상된 결과다. 이것은 단순히 감각의 결합 이상의 것으로, 공감각적 앎이라 할 수 있다. 즉 감각, 느낌, 기억, 그리고 합리적 사고가 결합된 것이다. 모든 창조적인 작업은 이것에 기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