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모든 이론은 인간, 즉 인간의 실존에 관한 이론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 동물에게서도 사랑이라든가 혹은 사랑이라고 여길 만한 점을 발견할 수는 있다. 그러나 동물의 애정은 주로 본능적 장치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본능적인 부분은 인간에게도 약간 남아 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여전히 자연의 일부다. 그렇지만 일단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상, 그곳으로 되돌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인류 전체든 한 개인이든 간에,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본능이 지배하는 확실한 세계에서 불확실하고 열린 상황으로 내던져진다. 확실한 것은 오직 미래에 맞이하게 될 죽음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성을 부여받는다. 인간은 ‘스스로 인식하는 살아 있는 존재’다. 자기 자신과 동료를 알고,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자신을 독립적인 실재로서 인식하고, 자신의 짧은 인생을 의식한다. 또한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났고, 자기의 의지와는 반대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보다 자기가 먼저, 또는 자기보다 그 사람이 먼저 죽을 것도 알고 있다. 또 자신이 고독한 존재이며, 자연이나 사회의 힘 앞에서 무력한 존재임을 알고 있다. 이런 모든 인식들이 고립되고 분열된 인간의 존재를 견딜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든다. 이 감옥으로부터 빠져나와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미쳐버릴 것이다.
고립되었다는 의식은 불안을 야기한다. 그것은 실로 모든 불안의 근원이다. 고립되어 있다는 것은 무력하고, 세계, 즉 사물과 인간에 능동적으로 관여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고립은 극심한 불안의 근원이며, 수치심과 죄의식을 일으킨다.
결국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 걸쳐 인간은 하나의 동일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이 고립을 극복하고 타인과 결합할 수 있는가? 그러나 문제는 동일해도 해결 방법은 제각각이다. 동물숭배, 인간의 희생, 군사적인 정복, 사치, 금욕적인 포기, 강제 노동, 예술적인 창조, 신의 사랑 또는 인간의 사랑 등, 그 방법은 실로 다양하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다. 하지만 방법이 많다고 그 해답도 무수한 것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 다소 불충분하고 사소한 차이점들을 무시한다면, 지금까지 다양한 문화 속에 살아왔던 사람들이 줄 수 있었던 해답이 극히 제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나 철학의 역사는 바로 이 대답의 역사이며, 역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인간이 고립을 극복하는 해결책으로 가장 많이 선택한 방법은, 집단이 관습이나 관례, 신앙에 동조하는 것이었다. 현대의 서양 사회에서도 집단에 동조하는 것은 고립감을 극복하는 보편적인 수단이다. 집단에 동조하는 행위는 한 개인의 자아를 극도로 사라지게 하고, 그를 집단의 일원으로 만든다. 만약 내가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라면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느낌이나 생각이 전혀 없으며, 관습이나 의복이나 사고도 집단의 그것에 동조한다면 나는 고독감이라는 무서운 체험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하지만 집단 동조에 의한 결합은 강렬하지도 격렬하지도 않다. 그것은 조용하고 일상적으로 움직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립감을 해소하는 데 불충분할 때가 많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강박적인 섹슈얼리즘, 자살 등의 경우는 집단 동조가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해결책임을 말해주는 증상들이다.
고립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서, 집단 동조와 더불어 현대 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또 하나의 요소, 즉 일상적인 노동과 오락도 고려되어야 한다. 인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노동자나 사무원 또는 관료 조직의 경영자가 된다. 그가 하는 일은 직장 조직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으며 자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조직은 맨 꼭대기에서부터 밑바닥까지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들은 조직 안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과업을 규정된 속도로 규정된 방법에 따라 수행할 따름이다. 심지어 감정까지도 규정되어 있다. 쾌활함, 인내심, 신뢰, 야망, 그리고 아무 마찰 없이 누구와도 사귈 수 있는 능력까지.
오락도 이렇게까지 철저하지는 않지만 거의 규정화되어 있다. 읽을 책은 독서 클럽이, 영화는 영화 제작자나 극장주가, 광고 표어는 스폰서들이 제시해준다. 휴식의 방법도 거의 획일화되어 있다. 일요일에는 드라이브, 텔레비전 시청, 카드놀이, 친교 모임 등 거의 일정한 형태로 정해져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월요일에서 다음 월요일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이미 기성품이 되었다. 이렇게 일상의 그물 속에 붙잡혀 있는 인간이 자신이 인간이며 독특한 개인임을, 그리고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의 갈구, 공허와 고립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직 단 한 번뿐인 삶의 기회를 부여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어떻게 잊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합을 이루는 세 번째 방법은 예술가나 직공의 ‘창조적인 활동’에 있다. 어떠한 종류의 창조적 일이든 간에, 창조적인 인간은 외부 세계를 대표하는 물질과 자신을 결합시킨다. 인간은 그 창조의 과정에서 세계와의 일체감을 맛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계획하고 생산하며, 내 노동의 결과를 내가 볼 수 있는 그러한 생산적인 작업에만 적용된다. 그런데 현대의 노동자는 어떤가. 끝없는 컨베이어벨트 앞에 놓여 있으므로 작업하는 대상과의 일체감을 맛볼 수가 없다. 그저 기계나 관료적 조직의 부속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미 본래의 그가 아니다. 따라서 동조 이상의 일체감은 얻지 못한다.
생산적인 작업을 통해 성취된 결합은 상호인간적인 것은 아니다. 집단에 동조함으로써 성취된 결합은 오직 허위적 결합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은 실존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해답에 불과하다. 완전한 해답은 상호인간적인 결합, 타인과의 융합, 즉 사랑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 인간적인 결합의 욕구는 인간의 가장 강력한 욕구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정열이자, 인류를, 또는 가족 사회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