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나약함이다. 우리의 마음을 인류애로 이끄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비참함이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것은 갖지 않을 것이다. 모든 애착은 불충분함의 표시다. 만일 우리 각자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결합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나약함 자체가 우리의 덧없는 행복을 낳는다. 진정으로 행복한 존재는 홀로인 존재다. 오직 신만이 그런 절대적인 행복을 누린다. 그러니 우리 중 누가 그런 행복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겠는가? 만약 어떤 불완전한 존재가 스스로 자족할 수 있다면, 그는 무엇을 누리게 될까? 그는 고독하고 비참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동류 인간들에게 애착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즐거움에 대한 감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통에 대한 감정을 통해서다. 고통에 대한 감정을 통해 우리는 훨씬 더 분명하게 우리의 본성이 동일하다는 점과 그들도 틀림없이 우리에게 애착을 가질 것이라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공통적인 필요들은 우리를 이해관계로 결합시키지만, 우리에게 공통적인 비참함은 우리를 감정으로 결합시킨다. 행복한 사람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보다는 질투를 유발한다. 사람들은 그가 혼자만 행복하고 자기 것이 아닌 권리를 부당하게 차지하고 있다고 비난하려 든다. 게다가 이기심은, 그 사람이 우리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거라고 느끼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큰 고통을 준다. 하지만 불행한 사람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단지 소망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을 불행한 처지에서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상상력은 우리를 행복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불행한 사람의 입장에 놓는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을 더 가깝게 느낀다. 동정심은 달콤하다. 왜냐하면 괴로워하는 사람의 입장에 서면서도, 그 사람만큼 괴롭지는 않다는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질투심은 씁쓸하다. 행복한 사람의 모습은 질투하는 사람을 그 사람의 입장에 서게 하기는커녕 그런 처지에 있지 못해 유감스러운 마음만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을 우리가 면제받은 것처럼 보이게 하고, 후자는 다른 사람이 향유하고 있는 행복을 우리가 빼앗긴 것처럼 보이게 한다.
따라서 젊은이의 마음에 갓 피어난 감수성의 최초 움직임을 자극하여 키우고 싶다면, 그리고 그의 성격을 착하고 올바른 쪽으로 향하게 하고 싶다면, 인간의 행복에 대한 거짓된 이미지를 가지고 그에게 자만심과 허영심, 질투심이 싹트게 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먼저 궁중의 화려함, 궁전의 호화로움, 온갖 구경거리들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를 클럽이나 화려한 모임에 데려가도 안 된다. 스스로 평가할 수 있기 전까지는 그에게 상류사회의 외관을 보여주어서도 안 된다. 인간을 알기 전에 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그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시키는 것이며, 그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