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논의를 자기 진실성의 이상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인간 삶의 조건은 무엇인가? 도대체 이상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삶의 일반적인 특징들은 무엇인가?
나는 인간 삶의 일반적 특징은 기본적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임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인간의 풍부한 표현 언어들을 획득함으로써 우리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따라서 인간 고유의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원숙한 행위자들이 된다. ‘언어’라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낱말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자신들을 정의하는 다른 표현 양태들, 예를 들면 예술, 몸짓, 사랑 등과 같은 ‘언어들’을 포괄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타인들과의 의사소통을 통해서 비로소 이런 언어들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아무도 자기 정의self-definition에 필수적인 언어들을 자기 혼자서 습득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관계하는 타인들, 즉 ‘의미 있는 타인들’과의 의사소통을 통하여 언어들을 습득하게 된다. 인간의 마음은 이런 의미에서 결코 ‘독백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 대화의 과정에 의하여 생성된다.
물론 일단 언어를 습득하고 나면 고독한 사색을 통하여 우리는 상당한 정도까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나 태도나 입장의 개진을 기대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무엇이어야만 하는가를 묻는 정체성의 정의와 같은 중요한 문제들은 혼자의 사색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대화를 통하여, 또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타인들이 우리 마음속에 각인시키고자 하는 다양한 정체성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여가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만들어간다. 심지어 이들 몇몇 의미 있는 타인들(예를 들면, 부모들)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진 경우라 할지라도, 그들과의 대화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마음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의미 있는 타인들의 공헌이 우리의 어린 시절에 일어난 것일지라도, 평생을 통하여 지속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지점까지는 내 의견을 인정하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떤 형태의 독백적 이상을 고집하고 싶어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인생의 유년기에 우리를 사랑하고 보살펴준 이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할 수는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독백적인 이상을 고집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우리는 부모님의 영향을 제대로 잘 이해하고, 그것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더 이상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우리 자신을 독립적으로 형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물론 타인들과의 관계는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의 확립은 오직 자신에 의해 스스로 결정되어야만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사람들이 대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상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독백적 이상을 고집하는 입장이 인간 생활에서 대화 기능의 위상을 심각하게 격하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여전히 대화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최대의 한도 내에서, 발생의 단계에 한정시키기를 바란다. 그 결과, 이들은 삶에서 좋은 것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것들을 함께 즐김으로써 얼마만큼 변화될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어떤 좋은 것들은 오직 이러한 공동의 즐김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대문에,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는 자아의 정체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무척 많이 노력해야 할 것이고, 또한 그 과정에는 수많은 고통스러운 결별이 요구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의 존재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에 관한 물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체성이란 바로 우리로 하여금 무엇에 입맛을 느끼고 무엇을 소원하며 무엇을 생각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근거다. 내가 가장 아끼는 것들이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사람은 바로 나의 정체성의 형성에 내재적 구성 요소가 된다.
주위 타인들과의 이런 내재적 관계는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걸림돌이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중세의 수도자들 혹은 우리 현대 문화에서 비근한 예를 들자면 고독한 예술가들의 삶의 충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삶조차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일종의 ‘대화적인 태도dialogicality'로 볼 수 있다. 수도자의 경우에 대화 상대자는 신이다. 고독한 예술가의 경우에 그의 대화는 예술 작품 자체를 통하여, 아마도 앞으로 그 작품에 의하여 형성될 미래의 감상자들을 겨냥하여 열려 있다. 요컨대 예술 작품의 형식 그 자체가 그 작품의 특성상 누군가를 겨냥하여 대화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 이런 관계 속에서 우리가 아무리 혼자서 무엇을 수용하고 느끼고 있다고 할 지라도, 일상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이 수반되지 않는 한, 우리의 정체성 형성과 유지는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사회》, 송영배 옮김, 이학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