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유치한 지식은 그 뒤 내 학적을 일본의 어느 지방 도시 의학 전문학교에 두게 만들었다. 내 꿈은 아름다웠다. 졸업하고 돌아가면 내 아버지처럼 그릇된 치료를 받는 병자들의 고통을 구제해주리라, 전시에는 군의를 지원하리라, 그런 한편 유신에 대한 국민들의 신앙을 촉진시키리라, 이런 것이었다. 미생물학 교수법이 지금은 어떻게 발전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무렵엔 환등기를 이용해 미생물의 형상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어떤 때는 한 시간 강의가 끝나고 시간이 아직 남았을 경우 선생은 풍경이나 시사에 관한 필름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곤 했다. 때는 바야흐로 러일전쟁 당시였으니 전쟁에 관한 필름이 많았음은 물론이다. 이 교실에서 나는 언제나 내 학우들의 박수와 환호에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번은, 화면상에서 오래전 헤어진 중국인 군상을 모처럼 상면하게 되었다. 한 사람이 가운데 묶여 있고 무수한 사람들이 주변에 서 있었다.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몽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해설에 의하면, 묶여 있는 사람은 아라사(러시아)를 위해 군사기밀을 정탐한 자로, 일본군이 본보기 삼아 목을 칠 참이라고 했다. 구름같이 에워싸고 있는 자들은 이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구경꾼이었다.
그 학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도쿄로 왔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의학은 하등 중요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겁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건강하고 우람한들 조리돌림의 재료나 구경꾼이 될 뿐이었다. 병으로 죽어가는 인간이 많다 해도 그런 것쯤은 불행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저들의 정신을 뜯어고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제대로 뜯어고치는 데는, 당시 생각으로, 당연히 문예를 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문예운동을 제창할 염念이 생겨났다. 도쿄 유학생 대다수는 법정·물리화학·경찰·공업 같은 것을 공부하고 있었다. 문학이나 예술을 공부하는 자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그런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그럭저럭 몇몇 동지를 찾아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몇 사람을 끌어모아 상의를 한 뒤 첫걸음을 잡지 출간으로 잡았다. 제목은 ‘새 생명’이란 의미를 취하기로 했다. 당시 우리에겐 복고풍이 대세였으니 그리하여 그 이름을 『신생新生』이라 붙였던 것이다.
『신생』의 출판 기일이 다가왔지만 원고를 담당한 몇 사람이 자취를 감추었고 이어서 물주가 달아나 버렸다. 결국 땡전 한 푼 없는 세 사람만 달랑 남게 되었다. 시작부터가 이미 시류를 등진 것이었으니 실패한들 물론 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 뒤 이 셋조차 각자의 운명에 쫓겨 더 이상 한 데 모여 미래의 아름다운 꿈을 이야기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것이 유산된 『신생』의 결말이다.
이제껏 경험치 못한 무료를 느끼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처음엔 왜 그런지 몰랐다. 그런데 그 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릇 누군가의 주장이 지지를 얻게 되면 전진을 촉구하게 되고 반대에 부딪히면 분발심을 촉구하게 된다. 그런데 낯선 이들 속에서 혼자 소리를 질렀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다시 말해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면, 아득한 황야에 놓인 것처럼 어떻게 손을 써 볼 수가 없다. 이는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리하여 내가 느낀 바를 적막이라 이름했다.
(...)
“가령 말일세, 쇠로 만든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창문이라곤 없고 절대 부술 수도 없어. 그 안엔 수많은 사람이 깊은 잠에 빠져 있어. 머지않아 숨이 막혀 죽겠지. 허나 혼수상태에서 죽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 같은 건 느끼지 못할 거야. 그런데 지금 자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의식이 붙어 있는 몇몇이라도 깨운다고 하세. 그러면 이 불행한 몇몇에게 가망 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는 게 되는데, 자넨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나?”
“그래도 기왕 몇몇이라도 깨어났다면 철방을 부술 희망이 절대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
그렇다. 비록 내 나름의 확신은 있었지만, 희망을 말하는데야 차마 그걸 말살할 수는 없었다. 희망은 미래 소관이고 절대 없다는 내 증명으로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나도 글이란 걸 한번 써보겠노라 대답했다. 이 글이 최초의 소설 「광인일기」다. 그 후로 내디딘 발을 물리기가 어려워져 소설 비슷한 걸 써서 그럭저럭 친구들의 부탁에 응했다. 그러던 것이 쌓여 십여편이 되었다.
나 자신에게 있어서야, 나는 이제 절박해서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어야 하는 그런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지난날 그 적막 어린 슬픔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일 터, 그래서 어떤 때는 어쩔 수 없이 몇 마디 고함을 내지르게 된다. 적막 속을 질주하는 용사들에게 거침없이 내달릴 수 있도록 얼마간 위안이라도 주고 싶은 것이다. 나의 함성이 용맹스런 것인지 슬픈 것인지 가증스런 것인지 가소로운 것인지 돌아볼 겨를은 없다. 그래도 외침인 이상 당연히 지휘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이따금 내가 멋대로 곡필을 휘둘러 「약」의 주인공 위얼의 무덤에 난데없는 화환 하나를 바치거나 「내일明天」에서 산 씨네 넷째댁이 죽은 아들을 만나는 꿈을 짓밟지 않았던 것은 당시의 지휘관이 소극적인 것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내 입장에서도 내 젊은 시절처럼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청년들에게 내 안의 고통스런 적막이라 여긴 것을 더 이상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루쉰, 『외침』, 공상철 옮김, 그린비,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