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최상의 좋음이라는 말은 어쩌면 진부한 것 같지만, 행복이 무엇인지는 좀 더 명확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먼저 인간의 기능을 확실히 파악하면, 이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피리 연주자와 조각가, 기술자,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떤 기능과 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 있어서, ‘좋음’과 ‘잘함’은 그 기능에 깃들어 있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인간의 기능이라는 게 있다면, 그 기능 안에 좋음과 잘함이 깃들어 있지 않겠는가? 목수와 제화공에게는 어떤 기능과 활동이 있는데, 인간에게는 아무런 기능과 활동이 없겠는가? 인간은 본래 아무 기능도 없이 태어났을까? 아니면 눈과 손과 발, 그리고 각각 신체 부분들에 어떤 기능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도 이 모든 것들 이외에 어떤 기능이 있다고 가정할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대체 그 기능은 무엇일까? 생존은 식물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기능인데, 지금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기능이므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제쳐두기로 하자.
그 다음으로는 감각적인 삶인데, 이것 또한 말이나 소, 그 밖의 모든 동물에게 공통된 삶이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것은 이성적 활동의 삶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이성에 복종하는 삶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을 소유하고 사유하는 삶이다.
그런데 인간의 기능이 이성을 따르거나 이성을 내포한 정신의 활동이라고 한다면, 평범한 키타라 연주자와 뛰어난 키타라 연주자가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어떤 일을 그냥 하는 사람과 훌륭하게 하는 사람도 결국 동일한 종류의 기능을 소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한 키타라 연주자의 기능은 단지 키타라를 연주하는 것인 반면 훌륭한 키타라 연주자의 기능은 ‘잘’ 연주하는 것이므로, 탁월성에 다른 우월함이 그 기능에 덧붙여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인간의 기능을 일종의 삶으로 간주하고, 이 삶이란 이성을 동반한 정신의 활동과 행위로 간주한다. 따라서 훌륭한 사람의 기능은 이러한 정신의 활동과 행위를 ‘잘’ 그리고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능은 자신이 지닌 고유한 탁월성에 따라 ‘잘’ 완성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좋음은 탁월성에 따른 정신의 활동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탁월성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라면, 그중에서도 최상의, 가장 완전한 탁월성에 따른 정신의 활동이 바로 인간의 좋음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완전한 삶’을 하나 더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 좋음은 (전 생애에 걸친) ‘완전한 삶’ 안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불러올 수 없듯이, 단 하루만으로 축복받은 행복한 사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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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의 논의는 행복을 탁월성, 혹은 일종의 탁월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탁월성에 따른 활동은 탁월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을 탁월성의 소유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탁월성의 사용에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즉 탁월성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탁월성의 활동에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잠만 자는 사람이나 달리 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처럼, 비록 탁월성의 상태에 있더라도 아무런 좋은 것도 이루어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탁월성의 활동은 그럴 수가 없어서 탁월성에 따라 활동하는 사람은 반드시 행하며, 또 잘 행하기 마련이다. 올림피아 경기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사람은 단지 가장 잘 생기고 가장 힘센 사람들이 아니라 우선 경기에 ‘참가한’ 사람들인 것처럼, 올바르게 행하는 사람들이 삶에서 ‘최고로 훌륭한 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김태경 옮김, 최인자 편집,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