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늘의 도리天道는 사람을 사사로이 사랑하는 일이 없어서 늘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백이와 숙제 같은 이는 과연 착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 인덕을 쌓고 깨끗하게 행동했는데도 결국 굶어 죽었으니 말이다. 또 공자는 70명의 제자 중에 유독 안연을 가리켜, 배우기를 좋아하고 성품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그런데 막상 안연은 쌀독이 자주 빌 만큼 가난해서, 지게미나 쌀겨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일찍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내려준다는 복이 도대체 이런 것인가.
그런가 하면 도척이란 자는 날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을 회로 쳐서 먹는 등 포악한 짓을 저지르면서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천하를 휘젓고 다녔다. 그렇지만 타고난 수명을 누리며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았다. 이런 결과는 대체 무슨 덕을 따라서 그리 된 것인가. 이런 일은 그중 명백하게 드러난 경우라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행실이 나쁘고 거리낌 없이 못된 짓을 저지르고서도 죽을 때까지 편안하고 즐겁게 살 뿐 아니라, 자손 대대로 부유하게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쩌다 작은 생물이라도 다칠까 봐 땅조차 가려 밟으며, 말을 삼가서 때를 살핀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고, 길을 갈 때도 지름길로 다니지 않으며, 공정한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 사람들이 도리어 재앙을 당하는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천도란 옳은가 그른가.
공자는 일찍이 “추구하는 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일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말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공자는 “만약 부유해질 수 있다면, 비록 채찍을 잡는 마부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 그렇지만 부유해지는 게 내 몫이 아니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겠다”고 한 것이다. 또 공자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온 세상이 어지러워진 뒤에야 비로소 깨끗한 선비가 드러난다는 것을 가리킨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깨끗한 선비는 저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부귀를 이토록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공자는 “군자는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 이름이 칭송되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한漢나라의 가의도 “탐욕스러운 자는 재물에 목숨을 걸고, 의로운 사람은 명예에 목숨을 걸고, 과시를 좋아하는 자는 권세에 목숨을 걸고, 보통 사람들은 그저 목숨을 부지하려 한다”고 했다.
모른지기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를 비춰주고, 같은 종류의 사물은 서로를 찾기 마련이다. 그래서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르며, 성인이 일어나면 만물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백이와 숙제는 비록 어진 사람이었지만 공자가 알아주었기에 이름이 더욱 밝게 드러났고, 안연이 배움을 성실히 했지만 공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서 행실이 더욱 빛났다.
그러나 산림 속에 숨어 사는 훌륭한 선비 가운데는 그 이름이 묻혀 칭송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슬픈 일이다! 촌구석에 묻혀 사는 사람이 행실을 곧게 닦아 이름을 떨치려 하더라도, 뛰어난 선비가 그를 알아주지 아니하면 어찌 후세에 이름을 전할 수 있겠는가.
- 사마천, 『사기』「백이열전」, 전호근 옮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