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히만의 결정적인 성격적 결함은 그가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비엔나 지역에서의 에피소드는 그의 이런 성격적 결함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그와 그의 부하들과 유태인들은 ‘모두 힘을 합쳐 일했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유태인 지도층 인사들이 그에게 달려와 ‘흉금을 털어놓았고’, ‘그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했으며 도움을 요청했다. 유태인들은 이민 가기를 원했고, 아이히만 자신은 그들을 돕기 위해 거기에 있었다. 마침 그 시기에 나치 당국은 유태인이 없는 제3제국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요구가 맞아떨어졌고, 자신은 “양쪽 모두에게 공평할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말하기의 무능함inability to speak은 생각하기의 무능함inability to think,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의 무능함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와 타인의 존재로부터, 현실 자체로부터 그를 방어해주는 가장 믿음직한 보호막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범죄자는 자기의 범죄 집단이라는 좁은 범위 안에서만 효과적으로 자신을 범죄 없는 세계의 현실로부터 방어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히만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 그는 단지 과거를 회상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살았던 세계와 한때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인구 8000만 명이나 되는 독일 사회가 정확히 이와 동일한 방법을 통해서, 이제는 아이히만의 사고방식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그런 동일한 자기기만과 거짓말, 어리석음을 통해서 현실과 사실성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했다. 이런 거짓말들은 해마다 변했고 빈번하게 서로 모순되기도 했으며 당의 위계질서 내의 여러 분과들에서조차 일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기만의 관행은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었고 생존을 위한 도덕적 전제조건이었기 때문에 나치 정권이 붕괴된 지 18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씩은 그러한 허위가 독일 민족의 특성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전쟁 기간 중에 독일 국민 전체에게 가장 효과적인 거짓말은 히틀러와 괴벨스가 만들어 낸 ‘독일 민족의 운명적 전투’der Schicksalskampt des deutschen Volkes라는 구호였다. 이 구호는 세 가지 사항들에 대해서 쉽게 자기기만에 빠지게 했다. 첫째, 전쟁은 전쟁이 아니다. 둘째, 그것을 촉발시킨 것은 독일이 아니라 운명이다. 셋째, 그것은 적들을 전멸시키지 않으면 자신이 전멸되고 마는 생사가 달린 문제다.
본질에 있어서나 의도에 있어서 명백히 범죄적인 명령을 받았을 때 병사들이 그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관한 아이히만의 모호한 생각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경찰 심문에서였다. 이때 그는 갑자기 자신이 전 생애에 걸쳐 칸트의 도덕 교훈, 그중에서도 특히 칸트의 의무에 대한 정의를 따르며 살아왔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터무니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맹목적인 복종을 거부하는 인간의 판단 능력과 긴밀하게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심문관은 이 점에 주목하지 않았지만, 라베 판사는 호기심에서였는지 아니면 아이히만이 감희 칸트의 이름을 자신의 범죄와 연관해서 들먹인 것에 분개해서였는지 피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아이히만은 정언명령에 대한 거의 정확한 정의를 내놓았다. “칸트에 관한 제 언급은 나의 의지의 원칙이 언제나 일반적인 법률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질문에 그는 자기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유태인 청소라는 최종 해결책을 수행할 임무를 부여받은 순간부터 자신은 칸트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그만두었으며,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자신은 ‘자기 행위의 주인’이 아닐뿐더러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했노라고 말했다. 그가 법정에서 다 설명하지 못한 것은 그 자신의 표현처럼 ‘국가에 의해 범죄가 합법화된 시대’에는 칸트의 정식이 더 이상 적용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그저 그 정식을 기각하고 다음과 같이 왜곡해서 읽었다는 점이다. 즉 네 행위의 원칙이 이 땅의 입법자의 행위의 원칙과 동일한 것처럼 행위하라. 다시 말해 “만일 총통이 너의 행위를 안다면 승인할 그런 방식으로 행위하라.”
그 후로 다음과 같은 아이히만의 최종진술이 있었다. 정의에 대한 자신의 희망은 사라졌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진실을 말했음에도 법정은 자신을 믿지 않았다. 자신은 유태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것은 법정은 믿지 않았다. 자신의 죄는 복종의 죄뿐이며 복종은 미덕으로 칭송되었고 그 미덕은 나치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자신은 집권 세력의 일원이 아니라 희생자였고 지도자들만이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다.” 아이히만은 그렇게 말했다. ‘희생양’이라는 단어를 그가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대신해 고통 받아야 한다는 그의 깊은 확신이 있었다. 이틀 후인 1961년 12월 15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