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착상은 끈덕진 작업이라는 토양에서만 싹이 틉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마추어의 착상이 학문적으로 전문가의 착상에 못지 않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 학계의 가장 탁월한 문제제기와 인식 중 많은 것은 바로 아마추어들 덕분에 획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추어와 전문가의 차이점은 단지 ─ 헬름홀츠가 로베르트 마이어1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 아마추어는 연구방법의 확고한 확실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착상의 의의를 사후검증하고 평가하거나 그 착상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점뿐입니다.
물론 착상이 작업을 대신하지는 못 합니다. 또 작업도 착상을 대신하거나 착상을 억지로 불러 낼 수는 없는데, 이것은 열정이 착상을 불러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둘, 즉 열정과 작업이 ─ 특히 그 둘이 합쳐져서 ─ 착상을 유인해 냅니다.
그러나 착상은 자기 좋을 때 나타나지 우리가 원하는 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착상들은 책상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하며 찾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 예링2이 서술하는 바와 같이 ─ 소파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라든지 또는 헬름홀츠가 자연과학적 엄밀성을 가지고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하는 바와 같이, 완만한 오르막길을 산책하고 있을 때라든지 아니면 그와 비슷한 경우에 나타납니다. 어쨌든 착상은 그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을 때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실로 옳은 말입니다. 물론 책상에 앉아 골똘히 생각하면서 대답을 정열적으로 찾지 않았다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35~36쪽)
한번 숙고해 보십시오. 인간의 가치는 그가 지도자 자질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쨌든 어떤 사람을 뛰어난 학자와 대학교수로 만들어주는 자질은 실천적 삶의 지향 목표 설정 문제 또는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 그를 지도자로 만들어주는 그런 자질이 아닙니다. 교수 중 누군가가 지도자 자질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우연입니다. 강단에 서게 되는 사람마다 자신이 지도자 자질을 발휘하도록 요구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매우 우려되는 일입니다.
더 우려할 만한 것은 강의실에서 자칭 지도자 행세를 하는 것이 모든 교수에게 방임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지도자로 가장 적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흔히 지도자 자격을 가장 적게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단에서의 상황은 그들이 지도자인지 아닌지를 검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제공해 주지 않는 그런 상황입니다.
자신이 젊은이의 조언자로 소명을 받았다고 느끼며 또 그들의 신뢰를 받는 교수는 그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개인적 교제에서 이 소명에 헌신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계관 및 당파적 견해들의 투쟁에 개입해야 한다는 소명감을 느낀다면 그는 바깥 인생의 시장에서는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신문지상이나 집회에서, 협회들에서 또는 그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말입니다. 그러나 참석자들, 그것도 어쩌면 자신과는 달리 생각할 수도 있는 참석자들이 침묵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곳에서, 즉, 강의실에서 교수가 신념 고백자로서 용기를 보여주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안일한 태도입니다.(75~76쪽)
1 Julius Robert von Mayer(1814~1874). 독일의 의학자이자 물리학자.
2 Rudolf von Jhering(1818~1892). 독일 법학자. 그의 《로마법의 정신》 (1852~1865)과 《권리를 위한 투쟁》(1872), 《법의 목적》(1877~1883) 등은 현대 법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고전들이다. 막스 베버 역시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전성우 옮김, 나남,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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