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급급한데, 어떻게 대안적 실천이 가능할까?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급급하다는 말은 맞다. 대체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인생의 목적이 ‘행복 추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 속에서는 곧잘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정말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나는 과연 행복한가? 내가 행복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하다. 인터넷만 접속할 일이 아니라 자기 내면과 접속해야 한다. 생존 문제만 매달리다 보면 자기 자신을 억압하고 절연한 채 살아가기 쉽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접속이 일어나면 우리는 현실적 삶 속에 뒤틀려져 있는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당연시되던 자기를 부정하게 된다. 뒤틀린 자신에 대한 이런 ‘자기 부정’의 과정은 꼭 필요하다. 그래야 진정한 자기를 되찾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 긍정’이라 부른다.
그러나 자기 혼자서만 이런 일을 해서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가시질 않기 때문에 옆에 있는 친구, 동료, 동지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느낌을 공유해야 한다. 자기 부정과 새로운 자기 긍정이 집단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대안적 실천에 대해 토론할 수 있고 실제로도 만들어갈 수 있다.
비록 힘이 들지라도 대안적 실천을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그 과정에서 작지만 깊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우리 내면의 참된 욕구에 맞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속담을 되새겨보자. 우리 내면이 바라는 삶에 걸맞은 실천, 즉 참된 욕구에 맞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속담을 되새겨보자. 우리 내면이 바라는 삶에 걸맞은 실천, 즉 참된 대안을 향한 개인적 · 집단적 노력이 없이 남들이 하는 대로 오직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달리면 물질적 수준삶의 양은 향상될지 모르나, 삶의 질은 더 나빠지고 행복은커녕 절망과 좌절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살아 있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좀비 같은 삶을 억지로 구질구질 살 것인가, 아니면 설사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정말 산다 싶게 살아볼 것인가? 바로 이것이 근본 화두다.
갑갑할 때마다 캄캄한 밤 저 차가운 우주 속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별들을 올려다보라. 이미 수백, 수천 년 전에 출발했던 빛을. 그리고 삶에 의욕이 없고 희망이 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바다로 가서 힘차게 솟구쳐 오르는 물고기를 보거나 저 논밭의 풀들을 보라. 저 풀들은 돌봐주기는커녕 인간이 농약과 제초제로 그 몸뚱이를 통째로 말려 죽이려 할지라도 결코 굴복하는 법이 없다. 새봄이 되면 또 보란 듯이 새록새록 땅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른다. 그 같은 생명의 근원은 모두 풀뿌리다. 굵은 뿌리, 가는 뿌리, 잘생긴 뿌리, 못생긴 뿌리 할 것 없이 모든 뿌리가 얽히고 설켜 저 끈질긴 풀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사람들도 이렇게 풀뿌리처럼 한데 어우러지면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고,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개인의 행복과 더불어 사회의 행복을 얼마든지 드높일 수 있다. 나는 밤하늘의 별과 바다 위로 솟구쳐 오르는 물고기, 저 들판의 풀뿌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스스로 포기하거나 굴복하지 않는 한, 반드시 찬란한 생명의 새 세상을 열어낸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306~308쪽)
─ 강수돌, 『살림의 경제학』, 인물과사상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