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컨대 100명의 이십대 중 20명만이 정규직 노동자가 된다고 하자. 여기서 이 20명은 결코 변하지 않는 숫자라 하자. 그럴 경우, 죽도록 고생하면 정규직 된다고 말해주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고생 여부와 상관없이 100명 중 80명은 정규직 노동자가 되지 못하는 이 전체 ‘파이’의 문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그딴 식의 말로 이십대를 위로한다고 하자. 그럼 어떤 결과가 나타나겠는가? 정규직이 되지 못한 21번째 사람부터는 그의 현실이 ‘고생 안 한 결과’로 인식될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26쪽)
그 전에 먼저 말해둘 것은, 사실 어떤 현상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논할 때 “그래서 대안이 뭔데?”라고 묻는 것이 문제제기 자체를 봉쇄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라는 자기계발 담론에 따르자면 가급적 기존의 룰에 충실한 것이 개인에게 훨씬 이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를 바꾸는 건 힘들고 불확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건 개인에겐 큰 손해다. 자연히 자기계발이 성행하는 사회에서는 확실한 대안이 없으면 굳이 문제제기하지 않는 태도가 일상화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말하는 ‘해결책’은 앞에서 논의한 문제점들을 공감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방해 요소가 사라지면 지금껏 나타난 문제점들을 통해 거꾸로 건강한 사회를 위한 성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연대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식의 어설픈 대안을 내세워 “그건 추상적인 소리야!”라고 평가절하당하기보다는, 왜 우리가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확실히 공감하는 게 오히려 자기계발 권하는 이 사회를 변화시킬 근본적인 해결책이지 않겠는가. 그걸 위해서는 자기계발 자체의 오류를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자기계발의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계발 그 자체에 얼핏 틀린 말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 자기계발의 신화를 해체하는 것이 ‘자기계발 논리의 폐해’를 줄이는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194~195쪽)
─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