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지 마라. 자네는 아직 젊다. 자네를 역사를 변명하기 위해서라도 소설을 써라.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것이 아니라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내게 과해진 문제가 낙착을 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려면 인과의 법칙이 일월성신의 운해처럼 분명해야 하는 것이다. 선인善因엔 선과善果가 있고 악인惡因엔 악과惡果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섭리의 보람을 다하기 위해서 섭리는 우연이란 계기를 통해 필요로 한 사람을 소명한다. 나는 탁인수에 관한 섭리를 위해 분명히 섭리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소명의 명분을 다하지 못했고 나의 게으름과 나의 비겁함으로 인해서 섭리의 톱니바퀴를 어긋나게 비틀어놓은 결과가 되었다.
고발해야 할 일을 고발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의 겁타怯惰만으로서 끝나는 노릇이 아니고 인과의 섭리를 어긋나게 하는 범죄행위이며 증언해야 할 것을 회피하는 것은 섭리의 법정에서의 위증 행위가 된다고 볼 때 나는 천제天帝의 심판 앞에서는 장병중과 공범이 되는 것이다. 인과의 섭리가 일월성신의 운행처럼 정연하지 못한 탓이 나 같은 인간의 게으름과 비겁함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우 나는 부득이 마르크 블로크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된다.
"블로그 교수, 당신이 나의 처지가 되었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
"섭리의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자기를 희생하더라도 결단적인 행동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요. 당신이 리옹에서 레지스탕스를 한 것처럼..."
"......"
"탁인수나 당신 같은 희생자를 한 세대에 수백만 명씩 생산하고 있는 상황 속에 앉아 역사의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블로크 교수!"
"......"
"인과의 섭리가 행해지지 않고 악인惡因을 쌓은 인간들이 아직도 히틀러처럼, 무솔리니처럼 설치고 있다면, 그런 상황을 그대로 허용할 수밖에 없다면 역사를 위한 변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역사가 인생에게 유익하려면 악의 원인을 철저히 캐내어 그것을 근절하는 방법을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겨우 블로크 교수는 입을 연다.
"역사에 있어서의 유일한 원인의 탐구란 일종의 미신이며, 책임자를 가려내려고 하는 가치판단의 교활한 형식에 불과하다. 공죄가 어느 편에 있느냐고 재판관은 묻는다. 학자는 왜라고 묻고 그 답안이 단순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만족해버린다. 원인의 일원론은 역사의 설명에 있어서 장애물일 따름이다. 역사는 원인의 파도를 파악해야 한다."
나는 이 블로크 교수의 말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기로 한다.
"역사는 원인을 파도로서 파악해야 하는데 그 파도에 휘말려 익사할 경우도 있다고."
동시에 이런 말도 들린다.
"섭리의 소명에 용감하게 응해야지만 섭리는 너를 소명한 것으로 작용을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규모로 보다 치밀하게 그물을 치고 작용한다. 그러나 섭리란 것을 나는 싫어한다. 섭리가 등장하면 역사는 퇴장해야 하니까."
나는 초조하게 반박해본다.
"역사를 위한 변명이 가능하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수밖엔 없을 텐데요."
이때 마르크 블로크 교수는 내게 부드러운 웃음을 보내며 말한다.
"서둘지 마라. 자네는 아직 젊다. 자네는 역사를 변명하기 위해서라도 소설을 써라.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것이 아니라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