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르크 왕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왕은 아름다운 이솔다의 죄를 물어 화형대에 매달고자 하는데 문둥이들이 왕에게 주청하기를, 화형주 형벌은 너무 가벼운즉 그보다 무거운 형벌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솔다를 저희에게 넘겨주십시오. 어쩌면 이솔다는 저희 무리에 속하는 인간인지도 모릅니다. 저희 아픔이 저희 욕망을 태우노니, 그 여자를 저희 문둥이들에게 넘겨주십시오. 문드러진 상처에 달라붙은 저희의 남루를 보십시오. 그 여자는 다람쥐 가죽에다 보석이 박힌 옷을 입고 폐하의 궁전에서 호사를 누리다 이제 폐하의 법정에서 문둥이를 구경하고 있으니, 저희 무리로 들어와 함께 기거하게 하시면 지은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깨닫고 오히려 화형주 밑의 화목(火木)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이놈, 성 베네딕트 수도회 수련사가 못된 잡서를 뒤적거렸구나!⌟
사부님의 일갈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젊은 수련사에게 소설은 금서였다. 그런데도 우리 멜크 수도원의 젊은 수련사들 사이로는 그 책이 은밀하게 나돌았기 때문에 나도 어느 날 밤 촛불 아래서 독파했던 것이었다. 사부님은 무안해 하는 내가 불쌍했던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내 말귀를 알아먹었느니, 네 허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버림받은 문둥이는 모든 것을 저희들의 폐허로 끌어들이고 싶어한다. 그들은 버림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사악해진다. 사람들이 그들을 일러, 인간의 파멸을 바라는 유령의 무리라고 하면 할수록 그들은 점점 더 인간의 모듬살이로부터 소외된다. 그래서 성 프란체스코께서는 일찍이 이것을 아시고 먼저 그들에게로 가시어 그들과 더불어 살기로 하신 것이다. 버림받은 자가 그 육신을 온전하게 회복하여야 하느님의 백성이 변용變容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버림받은 자를 말씀하시지만 제가 듣기에는 두 가지의 버림받은 자들이 같아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단적인 개혁 운동가들은 문둥이 무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무리라고 하는 것은, 일련의 동심원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무리가 가장 조밀하게 분포하는 곳이 있고, 이에 연접하는 외변이 있는 것이다. 문둥이는 소외의 상징과 같은 것…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이 점을 미리 아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문둥이를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도와주는데 그쳤다면 그것이야 여느 박애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분은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셨다. 성인께서 새들에게 설교하셨다는 이야기, 혹 들은 적이 있느냐?⌟
⌜네, 참으로 아름다운 그 이야기는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가녀린 피조물과 함께하신 성인을 받들어 섬기고 있습니다.⌟
⌜허나 네가 들은 이야기는 잘못 전해진 것이야.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니라면 근자에 들어 교단이 윤색해서 퍼뜨린 것이거나….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도시의 시미들과 행정관들을 상대로 설교를 하시다가 그들이 알아먹지 못하는 걸 아시고는 묘지로 가시어 시체를 쪼아먹는 까마귀, 까치, 매 같은 육식조를 상대로 설교를 시작하시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런 새들은 선한 새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암. 문둥이가 버림받았듯이 그렇게 버림받은 새들이다.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요한의 묵시록⌟의 이런 구절을 생각하고 계셨음이야. <…나는 또 태양 안에 한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늘 높이 날고 있는 모든 새에게 큰 소리로, 《다같이 하느님의 잔치에 오너라. 왕들과 장성들과 장사들과 말들과 그 위에 탄 사람들과 모든 자유인과 노예와 낮은 자와 높은 자의 살코기를 먹어라》하고 외쳤습니다.>⌟
⌜그렇다면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의 저항을 바라셨던 것입니까?⌟
⌜아니다. 혹 그런 것을 바란 일파가 있다면 그것은 돌치노 수도사와 그 추종 세력일 것이다. 프란체스코 성인께서는, 무리 지어 반역하려는 버림받은 자들을 모두 불러 하느님 백성으로 만들려 하셨다. 양 떼의 무리가 모두 모여야 한다면 먼저 버림받은 자가 누구인지, 이들부터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허나 프란체스코 성인도 이것만은 능히 이루지 못하셨으니 이 아니 원통한 일이냐. 교회 안에서 함께 살, 버림받은 자들을 모으기 위해서, 모아서 함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인께서도 먼저 당신이 속하신 교단 회칙에 따라 인준을 얻으셔야 했다. 인준을 얻으면 또 하나의 교파가 생길 터이고, 이렇게 해서 생긴 교파는 버림받은 자들을 외변에서 안으로 모아들일 테지. 이제 소형제파와 요아킴주의자들이 버림받은 자들을 규합하려던 까닭을 알겠느냐?⌟
⌜그러나, 사부님, 지금은 프란체스코 성인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단순한 평신도와 버림받은 자가 이단으로 몰리는 과정을 말씀하시는 중이 아닙니까?⌟
⌜오냐. 우리는 지금 양 떼에서 소외된 자들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황과 황제가 권력을 두고 드잡이를 해 온 수세기 동안 소외된 자들은 문둥이 무리처럼 집단의 변두리에서 고단하게 그 삶을 이어왔다. 그 중에서도 진짜 문둥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경계로 삼는 징표 노릇을 해왔느니라. 따라서 성서의 <문둥이>라는 표현은 마땅히 <버림받은 자, 가난한 자, 번용하고 단순한 자, 소외된 자, 농촌에서 쫓겨난 자, 도시에서 능욕당한 자>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야.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더냐? 문둥병의 수수께끼는 오래 우리를 괴롭혔다. 무슨 까닭이냐? 우리가 이 표징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록 무리에서 소외당하였어도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수양견과 목자의 행위를 규탄하고, 먼 미래에 이들에 대한 단죄의 약속이 담긴 설교를 들을 준비, 이런 설교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도 이를 의식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버림받은 자들은 자기를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권력자들에게 권력의 배분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소외를 의식하는 소외된 자들은, 교리에 상관없이 이단자로 낙인찍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소외를 의식하지 못하는 부류는 교리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법인데 이것이 바로 이단이라는 미망인 것이야. 세상에 이단 아닌 것 없고 정통 아닌 것 없다. 어느 한 세력이 주장하는 신앙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그 세력이 약속하는 희망인 것이야. 모든 이단은 현실, 즉 소외의 기치와 같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이단자들을 긁어 보면 바닥에 있는 문둥병 자국이 보일 것이다. 대 이단對異端 전쟁은 오로지, 문둥이는 문둥이로 소외시킬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문둥이에게야 요구할 게 무엇 있겠느냐? 그들이 속로회贖虜會의 교리와 성찬의 정의를 구별할 줄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 잘 듣거라. 이런 것을 구별하는 놀음은 우리 같은 식자들의 전유물인 게다. 단순한 평신도들에게는 나름의 문제가 있다. 문제는 이 해석의 방법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그들이 이단의 벙거지를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