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역시 안전한 놀이터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나아가 그는 놀이터는 아이들이 위험과 만나기 위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위험은 아이들을 이롭게 한다. 물론 도전과 모험만 있는 놀이터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상식선에서 보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안전과 도전이 공존하는 놀이터가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에 커다란 맹점이 있다. 오랫동안 안전만을 강조하고 그렇게 놀이터를 만들어 온 관행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주장은 다시 안전만 강조된 놀이터를 만드는 데 일조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한국 사회 안에서 산 그간의 내 경험이다. 어른들 사고의 보수화는 아이들 ‘놀이터의 보수화’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놀이 기구가 <어린이 놀이시설 시설기준 및 기술수준>에 따라 안전검사에 합격을 받은 것과 그것이 아이들이 놀기에 안전하다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서 합격은 시설과 관리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이용하는 아이들에게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반드시 놀이 기구를 다른 용도로 가지고 논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듯 안전만을 강조하면 놀이터의 재미는 땅으로 떨어진다. 놀이터는 재미있어야 하고 흥미진진해야 한다. 가고 싶어야 한다. 일단 놀이터에 왔으면 집에 가기 싫어야 한다. 조금 위험해 보이고 다소 도전적으로 보이는 놀이터에서 놀 때 아이들은 스스로 안전에 더 집중한다. 그래서 오히려 덜 다친다. 나는 이 대목을 놀이터 논의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아젠다로 끌어내기 위해 애쓸 작정이다. 위험을 스스로 겪지 않고, 그리고 그것을 넘어 보지 않고는 아이들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Risk, Peril, Hazard라는 단어가 위험이라는 말로 똑같이 번역되어 혼란을 주고 있다. 놀이터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같은 것으로 보지 않으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흔히 위험이라고 말하는 Danger는 아이들의 신체적·정신적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일컫는다. 이 위험을 좀 더 세분화해서 보자. Peril은 우연한 사고를 말한다. 교통사고, 낙상, 벼락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심각하고 즉각적인 위험을 뜻한다.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라면 Peril이다.
Risk는 부상에 대한 불확실성을 포함한 개념으로 부상당할 가능성은 있으나 그것을 피하고 극복하는 주체의 자주 의지와 도전 성격이 들어 있다. Risk는 라틴어 ‘risicare’에서 온 말인데 ‘용기를 내서 도전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Risk라는 말은 단순히 위험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되는 좋은 말이다. 아이들은 당장 맞닥뜨린 Risk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궁리하고 닥쳐올 Risk를 예감할 수 있는 몸각을 놀이터에서 배운다. 내가 앞서 말한 위험은 Risk를 뜻한다.
Hazard는 사고 발생 가능성을 높이는 위험의 근원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날 비가 많이 내려 미끄럼틀이 미끄러웠다거나 안개가 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거나 놀이터 바닥에 병이 깨져 꽂혀 있었다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Hazard는 ‘위험요인’이라는 뜻이다. Peril만큼 긴박하지는 않지만 당면한 사람이 맞닥뜨린 뜻밖의 사건을 일컫는다.
결론적으로 Risk는 도전과 맥락을 같이하는 긍정적 능동태를 의미하는 반면, Peril과 Hazard는 부정적 수동태의 의미가 강하다. 이것이 Risk와 Peril, Hazard의 다른 점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알 수 있는 위험은 Risk, 아이들이 모두지 헤아리기 어려운 위험은 Hazard로 보면 좋다. 만약, 놀이터에서 위험요소(Hazard)가 발견되면 그것은 즉시 제거해야 한다.
놀이터에는 이러저러한 눈에 띄는 Risk가 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Risk를 스스로 인지하고 Risk 너머로 나아가면서 자신을 성장시킨다. 놀이터는 이런 Risk를 만나는 곳이어야 한다. 사고는 날 수 있지만, 그것은 회복 가능한 부상일 것이다. 이러한 도전과 작고 잦은 부상은 아이들을 자라게 한다. 자신감을 높여 주는 것은 물론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놀이터에서 Risk란 아이가 통제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가 놀이터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Hazard이다
아이들이 전혀 인지하지 못한 곳에서 발생하는 사고인 Hazard에 대한 인식과 신속한 대처는 놀이터를 관리하는 사람이나 놀이터에 아이와 함께 온 부모들의 꾸준한 점검에 영향을 받는다. 놀이터 체크리스트를 활용한다면 사고를 현저히 줄일 수 있다. 언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Hazard는 아이와 함께하는 어른이 늘 살피고, 아이가 알 만한 Risk는 도전과 모험을 위해 허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놀이터는 아이가 Risk를 만나고 어른을 Hazard를 살펴 주는 곳이어야 한다.
놀이터는 위험에 대한 도전을 하면서 동시에 위험을 익숙하게 다룰 수 있는 곳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아이들은 놀이 기구에서 떨어질 수도 있고 뛰어내릴 수도 있다. 아이들은 놀이 기구에서 어떻게 해야 떨어지지 않는지, 그리고 뛰어내려도 어떻게 해야 다치지 않을 수 있는지 스스로 배운다. 아이들은 뭐든지 기어오르고 뛰어내리고 매달리고 미끄러진다. 모두 다 위험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세상을 배울 수 없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위험을 스스로 겪어 낼 수 있는 아이들 능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해 왔다. 아이는 할 수 있다. 지금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은 아직 할 수 없는지 아는 아이가 강한 아이다. 과잉보호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유럽의 놀이 기구 안전 요건 및 시험 방법 일반 인증 EN1176도 완벽하게 안전한 놀이 기구나 놀이터를 설계하고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놀이터는 위험을 제공해 아이들이 위험에 대처할 기회를 준다”는 문구가 유럽 놀이터 안전 기준의 대명제이다. 놀이터의 Risk는 아이들이 안전에 대해 더 깊이 알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아이들은 Risk를 대하는 전방위 감각이 길러지는 곳이다. 아이들이 넘어야 할 Risk가 놀이터에서 모두 제거된다면 놀이터는 무미건조해질 것이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마저도 Risk를 만날 수 없다면, 놀이터 밖 세상에서 만나는 것이 위험한지 그렇지 않은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안전하기만 한 놀이터가 오히려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역설이 가능한 것이다. 위험은 놀이를 가치 있고 진지하게 만드는 필요충분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