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가 말했다. “군자가 보통사람들과 다른 까닭은 그가 마음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자는 인으로써 마음을 지키고, 예로써 마음을 지킨다. 어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예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공경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항상 그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항상 그를 공경한다.”(⌜이루하⌟·28)
孟子曰: “君子所以異於人者, 以其存心也. 君子以仁存心, 以喩存心, 仁者愛人, 有禮者敬人, 愛人者人恒愛之 敬人者人恒敬之.
사람만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선한 본성을 보존함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고유하게 갖고 있는 선한 능력과 지혜, 즉 양능良能과 양지良知를 보존하는 것도 존심의 범위에 들 수 있다. ⌜진심 상⌟·15에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양능 때문이고, 생각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은 양지 때문이다. 두세 살 된 어린아이도 제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경우가 없고, 어른이 되면 제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경우가 없다.
부모를 친애함은 인이고, 어른을 공경함은 의다.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세상 어디에든 통용되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양능이란 인간에게 고유한 본연의 능력이며, 양지란 인간에게 고유한 본연의 지혜다. 사랑, 공경, 친애로 표현되듯이 그것은 선한 능력이고 선한 지혜다. 그래서 양능을 인간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선한 능력이라 해석할 수 있고, 양지를 인간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선한 지혜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양지와 양능은 본성 또는 심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고자 상⌟·8에서 “사람들이 그 타고난 마음良心을 놓치는 까닭은 도끼로 나무를 베는 것과 같다. 매일 벌목을 하니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을 때의 양심은 인의의 마음을 가리키는 동시에 선한 본성을 일컫는다.
양능·양지·양심을 지키는 것, 즉 존심은 결국 선한 본성을 기르는 양심의 방법이다.
맹자가 말했다. “그 마음을 다하는 것은 본성을 알기 때문이다. 본성을 알면 하늘을 이해하게 된다. 그 마음을 지키고, 본성을 기르는 것은 이로써 하늘을 섬기기 때문이다. 요절하든 장수하든 따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몸을 닦아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운명을 맞는 방법이다.”(⌜진심 상⌟·1)
孟子曰: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자신의 도덕적 본성을 힘껏 실천한다는 의미다. 하늘의 명에 따라 운명적으로 인간에게 들어 있는 선한 본성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하늘을 이해하는 길이요 하늘을 섬기는 일이다. 생명의 장단이나 빈부귀천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수신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선한 마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운명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존심하지 못하고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답지 못한 삶이다.
⌜고자 상⌟·11에서 맹자는 사람이 “그 마음을 놓치고는 찾을 줄을 모르니 슬프도다! 사람들이 닭이나 개를 놓치고는 열심히 찾으면서도 마음을 놓치고는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놓친 마음을 찾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선한 본성을 놓칠 때 방심放心이라 부른 것이다.
맹자는 방심하여 본래의 마음을 잃은 경우를 다음과 같은 긴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맹자가 말했다. “생선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곰 손바닥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인데,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없다면 생선을 버리고 웅장을 취할 것이다. 목숨 또한 내가 바라는 바이고, 의로움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인데, 두 가지를 다 겸할 수 없다면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할 것이다. 목숨 또한 내가 바라는 바지만 목숨보다 더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구차하게 목숨을 지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 또한 내가 싫어하는 바이지만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환란을 당하고도 피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바라는 바 가운데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면, 무릇 목숨을 구하기 위해 무슨 방법인들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 싫어하는 일 가운데 죽음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면, 무릇 환난을 피하기 위해 무슨 행동인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일이 있기 때문에 목숨을 지키는 방법을 쓰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그런 일이 있기 때문에 환난을 피할 수 있음에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고, 죽음보다 더 싫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오직 어진 사람만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모두 그것을 갖고 있는데, 현자는 그것을 잃지 않을 능력이 있을 따름이다.
밥 한 그릇과 국 한 사발을 얻으면 목숨을 구하고 얻지 못하면 죽는다고 하자. 그에게 소리를 질러대며 밥과 국을 준다면 길 가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것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를 발로 차며 그것을 준다면 거지라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 종(鐘 : 1종은 10가마)이 주어진다면 어떤 예의도 차리지 않고 밥과 국을 받을 것이다. 만 종이 내 삶에 무엇을 더 보태준다는 말인가? 아름다운 집, 처첩의 봉양, 알고 지내는 궁핍한 사람들에게 내 덕을 보게 하기 위함인가?
옛날엔 제 몸이 죽을지언정 받지 않았는데 지금 아름다운 집을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고, 옛날엔 제 몸이 죽을지언정 받지 않았는데 지금 처첩의 봉양을 위해 그런 행동을 하고, 옛날엔 제 몸이 죽을지언정 받지 않았는데 지금 알고 지내는 궁핍한 사람들에게 내 덕을 보게 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니 이 또한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그 본심을 잃은 것이라 하겠다.”(⌜고자 상⌟·10)
孟子曰 : "魚, 我所慾也; 熊掌, 亦我所慾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 亦我所慾也; 義, 亦我所慾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生亦我所慾; 所慾有甚魚生者, 故不爲苟得也. 死亦我所惡; 所惡有甚魚死者, 故患有所不辟也. 如使人之所欲莫甚於生, 則凡可以得生者, 何不用也? 使人之所惡莫甚於生者, 則凡可以辟患者, 何不爲也? 由是則生而有不用也,由是則可以辟患而有不為也. 是故所欲有甚於生者,所惡有甚於死者,非獨賢者有是心也,人皆有之,賢者能勿喪耳. 一簞食,一豆羹,得之則生,弗得則死。嘑爾而與之,行道之人弗受, 蹴爾而與之,乞人不屑也。萬鍾則不辨禮義而受之。萬鍾於我何加焉, 為宮室之美、妻妾之奉、所識窮乏者得我與. 鄉為身死而不受,今為宮室之美為之, 鄉為身死而不受,今為妻妾之奉為之, 鄉為身死而不受,今為所識窮乏者得我而為之,是亦不可以已乎?此之謂失其本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