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예술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에 진학하며 나는 비로소 ‘꿈을 닮은 현실’이 아니라 꿈 그 자체를 좇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작가로서의 삶이 내 앞에 펼쳐질 터였고, 이제 나는 읽고 쓰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도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만에 나는 새로운 현실에 부딪혀 좌절하기 시작했다. 내가 써내는 소설은 하나 같이 형편없었고, (당시 스스로는 꽤 괜찮다고 느끼고 있었다는 게 더 비극적이었다) 학교의 선생과 선후배 들로부터는 그에 걸맞은 혹평을 받았다. ‘순진하고 찌질하며 뻔하다.’ 요약하면 그랬다.
몇몇은 나 개인의 성향을 문제 삼기도 했다. 술 담배 안 하고 주말에 교회 가는 너 같은 애가 무슨 소설을 쓰냐? 좀 더 우아한 빈정거림도 있었다. 네 글은 《좋은생각》 같은 잡지에 실리면 딱일 것 같아. 《좋은생각》은 물론 좋은 잡지지만 그 시절 나에게 그 말은 모욕적으로 들렸다. 세상에는 ‘진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너는 절대 아니야. 나를 모범생이라고, 착하다고, 선비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혀 아래에는 그런 말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노력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벗어나려고, 탈피하려고, ‘진짜’ 예술가가 되려고 발버둥 쳤다. 그때부터 소설에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밤을 새우고 진짜 소설을 읽고 삐딱한 마음을 품었다. 술도 못 마시면서 술자리에 억지로 참석했다. 끝까지 버텼다. 그러면 어디선가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던 상처성애자들이 나타났다. 네 상처는 뭐야? 너한테 무슨 결핍이 있어? 너 같은 애가 소설 쓸 자격이 있나?
절망적이었다.
세상과 쉽게 타협하고 기꺼이 거대한 조직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는그런 것처럼 보였던 무리들 사이를 빠져나와 나로서는 인생 전체를 걸고 어떤 새로운 길로의 모험을 시작했는데, 기대와 달리 사람들은 내 선택과 일탈에 칭찬과 격려를 해 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기대를 하는 것 자체가 나와 내 소설이 순진하고 찌질하며 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색안경을 끼고 날 바라봤고, 작가로서의 나를 의심했으며, 거의 나를 파괴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주 나중에서야 나는 하진이 했던 말에 뒷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Follow your heart, but take your brain with you. - 알프레드 아들러
― 문지혁, 『초급 한국어』, 민음사2020, 104~1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