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은 이렇게 버럭 화만 냈지, 그가 태임이에게 바라는 게 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진 못했다. 그는 태임이가 이 나라 여자들과는 다르게 살길 바랐다.
이 나라 여자들이 빈부, 귀천에 상관없이 공통으로 쓰고 있는 숙명적인 굴레에서 태임이만은 풀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여자들이 살아온 것과 다른 삶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그런 삶을 예비해야 되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미구에 여자들의 삶도 달라지게 되리란 막연한 예감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나라 안팎에 감도는 심상치 않은 풍운이 다만 왕의 성이 바뀌는 역성혁명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예감과도 상통하는 그만의 현실감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감각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하도 유별난 것이어서 섣불리 발설할 계제가 아니었다. 태임이가 그렇게 살길 바란다는 것은 민중전을 꿈꾸는 것보다 더 황당스러운 것이어서 환장을 안하고는 발설할 일이 못됐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가 글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바느질도 잘 할테니까 다투지 마세요. 네?”
태임이가 솜 둬 뒤집어서 창구멍을 곱게 마무리한 토시를 얌전하게 포개서 한편으로 밀어놓으면서 의젓하게 말했다. 열한 살짜리로 그닥 숙성하달 순 없어도 언동이 늠름했고, 나긋한 어깨와 곱게 딴 윤기나는 머리꼬랑이와 희고 상큼한 목고개에선 여자다움이 향기처럼 은은히 풍겼고 에미 닮아 단아한 얼굴에선 에미 닮지 않은 풍부한 표정이 생동하고 있었다. 전영감은 손녀에게 애정표현을 하고 싶어 가슴이 옥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외지에서 본 양인 남녀 생각이 났다. 그도 손녀를 그 양인들처럼 꼬옥 끌어안고 볼을 부비고 싶었다. 자신의 가슴으로 손녀의 가슴의 건강한 고동 소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오랑캐들 풍속 중에서도 가장 망측한 걸 흉내내고 싶은 자신의 속셈이 민망해서 그는 두어 번 허튼 기침소리를 내고 나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