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춘천교대 김상욱 교수가 2011년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연구세미나 "좋은 어린이 책과 도서관 서비스"에서 제시한 주제 발표문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문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Ⅰ. 문제 의식
#1
꼭 10년 전 발표자는 미국의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방문교수로 1년을 보낸 적이 있다. 아동문학을 공부하는 이로서 아동문학 출판에도 관심이 없지 않았기에 Penguin Putnam이란 출판사에 들른 적이 있다. 출판사 구경이나 오라는 편집자의 말에 별 생각 없이 그러마고 했던 것이다.
출판사는 뉴욕의 맨하탄에 있었고, 마천루처럼 솟은 빌딩의 47층에 있는 사무실에서 그 편집자를 만나기로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47층에서 열리자 복도가 아닌, 사무실이 곧바로 펼쳐져 있었다. 너무 넓어 끝이 보이지 않았고, 벽에는 작은 방들이, 가운데 공간에는 칸막이로 나뉜 책상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대여섯 명, 많으면 열명 남짓 편집자들이 복닥거리는 우리네 출판사를 생각하고 발을 들이민 발표자로서는 충격이었다. 그런데 안내데스크에서는 만나기로 한 편집자가 48층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다시 한 층을 더 올라갔고, 48층은 47층과 다를 바 없는 구조로 똑 같이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출판사 편집자가 친절하게 설명하며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한국에서 평론가입네 거들먹거리던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칼데콧상을 수상한 그림책의 아름다움을 설명하고, 뉴베리상을 받은 작품의 창조적인 영감을 칭찬해마지 않았던 나는 어쩌면 이 출판사의 말단 영업사원이 아니었던가 하는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심지어 이들은 나를 알지도 못했고, 나는 이들로부터 땡전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열심히 책을 소개하고 알리는 일에 발벗고 나섰던 셈이다. 그 이후 나는 내 글의 어디에서도 외국의 번역도서를 소개하거나 이름을 거론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2
펭귄 출판사, 아니 펭귄 출판그룹은 내가 들렀던 Putnam을 비롯한 비슷한 규모의 출판사, 37개를 거느리고 있다.
Simon & Schuster 출판사는 Paramount 영화사와 케이블티비 MTV, VH1, Blockbuster 음반 비디오 대여업, 라디오와 지역 텔레비전 방송국을 거느린 파라마운트 미디어 그룹에 소속되어 있다.
미디어재벌이라고 지칭되는 루퍼트 머독의 ‘News Corporation’은 Los Angeles Dodgers 구단과 신문, 잡지, Fox사를 비롯한 방송사, 영화사 21세기 Fox사, 그리고 아동문학도서로 가장 유명한 출판사로 빼놓을 수 없는 HarperCollins를 자회사로 두고 있다.
오늘날 출판은 제조업을 넘어 1980년대의 군산복합체와 맞먹는 미디어복합체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3
지난 주 한 인터넷 서점의 어린이도서 베스트셀러 100위에 포함된 작품 가운데, 창작그림책과 창작동화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한윤섭(서찰을 전하는 아이), 황선미(마당을 나온 암탉, 일기 감추는 날), 서석영(욕 전쟁), 이영서(책과 노니는 집), 이상배(책 읽는 도깨비), 문영미(우리 집에 온 길고양이 카니), 김영주(빨간 수염 연대기), 권정생(강아지 똥), 최은옥(방귀 스티커), 이영경(아씨방 일곱 동무), 심윤경(화해하기 보고서), 한봉지(게임중독자 최일구), 채인선(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김일광(귀신고래) 등 15종이었다. 이 가운데 최근 5년 이내 출간된 책들은 9종이다. 그리고 이 9종 가운데 참으로 문학 작품다운 작품은 몇 작품이나 될까. 신간, 그 가운데에서도 창작 그림책과 창작동화, 그 가운데에서도 좋은 아동문학 작품의 진입 장벽은 생각보다 훨씬 강고한 셈이다.
Ⅱ. 출판, 산업인가 문화인가?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한 대형서점의 듣기 좋은 슬로건만은 아니다. 사람이 책을 만드는 것은 분명하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 역시 자명하다. 그런데 더 한층 중요한 질문이 이 단순한 명제 속에는 잠복되어 있다. 사람은 왜 책을 만들고, 어떤 책을 만들며, 책은 사람을 어떻게, 어떤 사람을 만드는 것인가? 물론 이 질문들은 어쩌면 동일한 진술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을 만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애초 책은 한 사회의, 한 시대의 집약된 문화적 산물이었다. 책은 책을 쓴 작가가 마침내 도달한 삶과 인간을 향한 깊이 있는 성찰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더욱이 표현에 그치지 않고 책의 꼴을 갖춤으로써 소통의 매체로 작동한다. 따라서 출판은 피할 수 없이 문화적인 외양을 갖추고 있다. 출판사들이 앞 다투어 책을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깊이와 다양성을 한층 증폭시키고, 이를 통해 인간과 사회, 삶을 향한 온당한 성찰을 공유하고 확장하기 위함이다. 이에 대해 누구도 반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출판 역시 산업의 일환이란 사실이다. 제조업으로 분류되며, 그 하위 부문으로 출판은 자리매김되고 있다. 출판을 담당하는 출판사는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한다’거나 ‘존재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인과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출판사는 상업적인 본질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물론 문화와 산업이란 두 가지 이질적인 측면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함께 언제나 결합된 채 존재해 왔다. 자본주의의 양식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독립영화, 독립밴드 등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양식들조차 쉼 없이 자본의 영향력 안에서 작동하고 있기까지 하다. 자본은 잡식성인 나머지 그 어떤 것조차 이윤이 창출되기만 한다면 예의나 염치를 차리지 않고 먹어치운다. 이러한 구성체에서 살면서 출판이 문화인가 산업인가를 구분하고자 하는 것은 단편적임을 면치 못한다. 따라서 문화와 산업이란 두 양상의 결합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결합의 양상과 결합의 결과 드러나는 경향적인 발전이 문제가 된다.
이 경향적 발전은 우리나라와는 다소 다르지만 미국을 시금석으로 살펴볼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인구 5천만을 넘고 있지만, 미국은 2009년 기준 3억을 조금 넘어서고 있다. 구멍가게와 초대형마트의 차이쯤은 될 것이다. 따라서 출판 산업의 양상 또한 양적으로,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만간 큰 차이 없이 균등해 질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발달 단계는 흔히들 ‘Fast Capitalism’으로 지칭된다. 자본의 변화가 급속하게 진전되고 있다는 것과 함께 ‘공간의 압축’, ‘시간의 돌진’으로 표현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아래 생산에서 소비로 이어지고 다시 생산으로 전환되는 자본의 순환 속도는 지극히 빨라졌다. 따라서 더 압축된 시간 안에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를 기대한다.
아동문학 출판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최근의 출판사는 책을 판매하기보다 브랜드를 판매하는 경향이 더욱 노골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시리즈물이 지속적으로 발간되며, 작가 Ray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Curious George'는 거듭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거추장스러운 문화의 외피를 벗어던지고 공공연한 상품임을 자임하는 한, 출판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치닫는 산업적 경향을 극대화해 가기 마련이다.
앞서 언급한 ‘News Cooperation’이나 ‘Para mount Midea Group’과 같은 미디어 복합체 속에 출판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출판의 방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책이 나오고, 그 책을 컨텐츠로 삼아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그에 부수되는 캐릭터 산업이 뒤쫓아 오면서 책은 단순히 낱낱의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상표를 갖춘 상품으로 진열대에 자리잡게 되는 셈이다.
다음과 같은 Hade의 우려는 단순히 우려를 넘어 현실이기도 하다.
“(출판사의) 목표는 Madeline을 가능한 한 많이 파는 것이 아니라, Madeline을 가능한 한 어린이들의 삶의 양상으로 확장해 내는 것이다. 어린 시절이 상품화된 Madeline이란 물건을 소비하는 것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상상적인 문학 작품의 개별적인 창조성과 문학과 접하는 어린이의 경험이 갖는 개별성은 자본의 탐욕으로 해체되고 만다. 상상력으로 가득 찬 개별적인 작품 대신 어린이문학은 복제된 취향에 함몰되고 만다.”(Hade, 2003)
Harry Potter산업이라고 지칭되는 소비의 양상은 이를 다시 한 번 입증해 주고 있다. 책이 영화로, DVD로, 장난감으로 확장됨으로써 어린이들은 작품을 통해 경험을 확장하고 사유를 심화하기보다 상품을 소구하는 소비자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책이 지닌 사용 가치는 소실되고, 물신화된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소비자로 고착되는 것이다.
Ⅲ. 최근 아동문학의 출판 경향
출판연감에 따르면 2009년, 2010년에 출간된 신간의 종수는 모두 42,191종, 40291종에 달한다. 이 가운데 아동도서로 분류되는 신간은 18.69%, 18.25%를 차지하며, 각각 7884종, 7,352종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대체로 문학작품에 해당하는 작품들은 넓게 보아 1075종, 1881종을 헤아린다. 2010년의 경우, ‘한국어린이책연구소’의 통계는 다소 엄밀한 척도로 보아 700종 남짓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양적으로 추산하는 것을 넘어 실질적인 아동문학의 출판 경향을 선명하게 밝혀보이기는 어렵다. 대체적인 경향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최근 가장 두드러진 아동문학 출판의 양상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양상은 그림책의 약진이다. 특히 이야기 그림책의 약진이다. 그림책은 크게 지식 그림책 혹은 정보 그림책과 이야기 그림책으로 구분된다. 시 그림책과 같은 독특한 장르가 없지 않으나, 시 역시 그림책으로 전환되는 순간 시 고유의 특성은 사라져버리고, 페이지를 넘기며 시간의 축을 쫓아 읽게 된다는 점에서 이야기 그림책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 정보 그림책과 이야기 그림책 가운데 영유아의 발달에 적합한 책은 당연 이야기 그림책이다. 이야기는 가장 손쉽게 세계를 수용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대상을, 대상의 관계를, 삶 속에 존재하는 대상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심지어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세계를 인식한다. 이야기할 수 없다면, 세계와 세계에 곧바로 경험은 그저 흩어진 편린으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정보 그림책조차 이야기의 형식 속에서 자리잡을 수 있어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그 결과 현재 우리의 그림책은 이야기를 담아내기에 몰두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 문화 그림책은 전통문화라는 지식 정보를 이야기 속에 잘 풀어낸 사례에 해당한다. 그리고 거듭 재생산되는 옛이야기 그림책 또한 그림책으로 전환되기에 가장 적합한 글을 이미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놓칠 수 없는 한 축이다. 여기에 덧붙여 최근의 라가찌상 수상이나 해외로 수출되고 있는 창작 그림책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창작 그림책의 진전 또한 이채롭다.
다만 대부분의 창작그림책이 글과 그림을 한 사람의 작가가 감당하고자 부심한다는 점에서 이야기의 힘이 다소 뒤처진다는 점이 문제로 거듭 지적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출판 편집자의 역할이 한층 더 증대되어야 하며, 편집자의 매개를 통한 생산적인 소통과 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음 양상은 저학년 동화의 양적 비중이 점차 증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저학년동화와 고학년동화라는 엄격한 구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둘 사이의 장르적, 미적 특성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담아내고 있는 경험과 경험에 대한 상상의 폭과 깊이가 서로 다를 뿐이다. 그럼에도 출판 시장 자체는 독자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초점은 자연스럽게 저학년동화로 기울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학교교육이 갖는 문제점과 직결되어 있다.
애초 아동문학의 출판은 학교교육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미국의 경우 1차적인 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1950년대는 소련의 스푸트닉호의 발사로 말미암아, 기초교육, 특히 과학교육이 중시되는 가운데, 비롯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은 민권운동의 신장과 함께 전후 베이비붐 세대에 출생한 어린이들이 대거 공교육으로 인입되어 온다. 그 결과 학교를 향한 재정적 지원이 확대되고, 그와 나란히 아동출판은 제2의 부흥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결절점은 ‘Whole Languge'와 함께 ’Literature-Based Instruction'이라 지칭되는 문해력교육의 변모에 기인한다. 80년대 후반의 문해력교육은 기존의 Basal이라고 불리는 독본 중심의 교재를 넘어 실제 존재하는 문학작품이 대거 교실로 수용된다. 이는 의미있는 실천으로서의 실질적인 언어활동을 통한 문해력교육이 강조되는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또한 두 차례에 걸친 보수적인 부시 행정부 기간 동안 성취도 검사와 'NCLB'법의 시행으로 말미암아 독서 시장이 위축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지난 10년 민주 정부의 정치적 지향은 자연스럽게 아동의 독서력에 착목하게 되었고, 어린이도서관의 필요성과 독서교육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었으며, 그 결과 독서진흥정책을 총괄하는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로 집약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원회가 활동하던 시기부터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의 존폐를 공공연히 거론하더니, 결국은 그 역할을 축소하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도서관, 독서교육 정책의 기조를 바꾸어버렸다. ‘어륀지’ 파동으로 드러나듯, 영어교육을 강화하였고 그 결과 초등학교 저학년에까지 영어가 정식과목으로, 3,4학년 이상은 수업 시수를 늘리는 가운데, 독서교육의 수원지인 국어교육을 위축시켰다. 성취도 검사는 학력을 중시하는 것으로 초등학교 교실상황을 변화시켰으며,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화를 주창하며 학력 중심으로 학교교육을 다시금 재편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초등학교 고학년에 진입하는 순간, 어린이들은 책을 멀리 하게 된다. 저학년을 위한 아동문학 작품이 양산되는 것은 출판 자본의 속성상 당연하고 또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문학작품은 언제나 다양성을 중핵으로 삼는다. ‘생물종의 다양성’과 마찬가지로 문학작품 역시 어느 특정한 부문의 이상 비대와 여타 부문의 위축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인위적인 재편의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도 당분간 저학년 동화 중심의 아동문학판이 변화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망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2010년 들어 동시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최승호의 ‘말놀이동시’를 필두로 하여, 문학동네, 창비, 청개구리, 푸른책들이 앞다투어 동시집을 출간하고 있으며, 동시전문지인 『동시마중』이란 격월간지까지 발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동시의 질적 전개 양상 또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도 고무적이다. 이 새로운 경향은 몇몇 예외적인 상업적 성공에 그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동시는 아동문학의 중핵에 해당한다. 일반문학이 서사적 삶의 총체성 탐구에 주력한다면, 아동문학은 서정적인 상상력이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림책은 그 자체가 서사적 형식이지만, 장면의 독자성으로 말미암아 시적 자질을 강제하며, 동화 역시 서사와 함께 중층적인 이미지의 구축이나 판타지와 같은 전복적, 은유적 장치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시의 발전은 마치 인문학의 필요성과 다를 바 없이, 한국 아동문학의 뿌리를 실팍하게 키워가는 근본적인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아동문학 출판의 양상에서 놓칠 수 없는 지점은 ‘청소년문학’이 부상할 뿐만 아니라, 아동문학 장르로 명료하게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물론 저학년동화의 융성에 비할 바가 아니나, 그럼에도 청소년문학이 착근하기에 이르렀음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여전히 초창기의 면모를 일신하지 못한 채, 장르문학으로서 청소년문학이 갖는 한계도 증폭되어 나타나고, 전복적인 상상력으로 기존의 질서를 뒤엎지 못하고 성장소설의 양상에 머무른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그동안 동화와 소설의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한 청소년문학이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근래 보기 드문 성취에 해당한다.
이들 다양한 진척에도 불구하고, 사실 아동문학 출판의 경향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독서 인구가 그다지 크게 늘어나지 않고 있다는 현실과 함께 무엇보다 출산율의 저하로 아동기에 처한 아동들의 절대적 수가 심각하게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매체 환경의 지속적인 변화 역시 아동문학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음은 분명하다. 문제는 급격한 위축을 막아내고, 연착륙을 가능케 해야 하는 내적 동력들을 견고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출판, 도서관, 학교, 아동문학계, 시민단체 등 관련된 모든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우리 사회의 문화적 능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동문학의 균형 잡힌 장르적 발달이 급선무다. 어느 한 편으로 치우지지 않는 균등한 발전을 위해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는 문화적 실천이 요청된다.
Ⅳ. 아동문학 출판의 발전 방향
아동문학의 발전은 단순히 아동문학이란 제한된 테두리 안에서의 발전만으로 촉발되고 완결되지 않는다. 일반문학의 독자와 아동문학의 독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일반문학의 독자는 감식력이 있는 훈련 받은 독자들이다. 특히 본격문학의 경우 그러하다. 따라서 일반문학의 역사 역시 작품이 실제 소통되는 상황과 역사로 기록되는 상황이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아동문학의 경우 사정은 확연히 달라진다. 아동문학의 독자인 어린이들은 무차별적인 대중으로 존재하는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에게도 취향이나 감식안이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소박한 독자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아동문학은 문학계에 포함된 작가만의 몫으로 발전하고 쇠퇴하는 것은 아니다. 중개인들의 노력, 작품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이 그 어떤 장르보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동문학의 주된 독자인 어린이들은 구매력이 없다. 또한 문학작품에 관한 독특한 취향들도 여전히 형성중인 와중이다. 따라서 중개인들에 해당하는 출판사의 편집인, 비평가, 도서관 사서, 서적상의 매니저, 어린책 시민단체 등의 노력이 그 어떤 장르보다 화급하게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당연히 정부의 정책이 놓여 있다.
아동문학의 발전은 무엇보다 정부의 문해력 정책, 교육 정책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먼저 국어교육을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기능적 교육에서 총체적 교육으로, 문학 중심의 고등사고능력의 교육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작품을 유기적인 전체로 인식하지 않고, 고작해야 특정한 기능을 담보하는 제재로 다루는 한, 아동문학 작품은 제 자리를 찾기 어렵다. 국어교육, 나아가 문학교육의 발전 역시 지체를 거듭하게 됨은 확연하다. 작품은 언제나 국어교육의 중심에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독서교육의 궁극적인 목표가 ‘생애의 독자’를 길러나간다는 점을 고려할 때, 문학작품은 생애의 독서를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언어교육이 의미 있는 맥락 속에서 실제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가장 잘 습득된다고 할 때, 문학작품의 언어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삶의 맥락 속에 존재하며, 실제 사용된 언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출판되고 유통되는 문학 작품이 곧바로 교실로 들어와야 하며, 학습자들은 조각된 단편이 아닌 책의 형태로 읽기/쓰기/듣기/말하기 등의 언어 활동을 익혀가야 한다. 그러자면 학급 문고, 학교 도서관, 지역 도서관의 역할은 심대하다. 양질의 문학작품들이 이들 서가들을 가득 채워야만, 실질적인 국어교육의 변화와 발전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 정책은 거꾸로 가는 실정이다. 독서교육의 진작은커녕 오히려 발목을 잡고, 구태의연한 행태들을 강요하고 있다. 적어도 정부가 국민의 독서능력을 일부러 끌어내려, 비판적이고 사려 깊은 시민의 육성과 동떨어진 방향으로 의도적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될 지경이다. 지금부터라도 정부는 수월성에 바탕을 둔 엘리트교육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문학, 역사, 철학, 기초과학을 기조로 한 보편적인 시민 교육으로 교육의 방향타를 바꾸어가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의 정책은 오히려 더 반대편으로 치닫고 있다. 경박한 현정부의 교육 정책은 지식 중심의 기능적 독서를 강조하고, 심지어는 고등학교 교육의 방향을 쥐고 있는 평가를 EBS 방송 교재에서 70% 출제한다는 원칙을 정함으로써, 고등학생들의 독서를 원천적으로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미디어복합체란 자본의 위협보다 어쩌면 한국의 출판 상황은 왜곡된 정부 정책과 맞서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이 정부는 교과서 제도 전부를 e-book의 체제로 바꾸어가고자 운을 떼고 있다.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으로 교과서가 대체될 경우, 한국의 출판 시장은 출판 시장이 아닌, 컨텐츠 시장으로 전락할 것이며, 교과서의 특성상 편집되고 발췌된 책의 일부가 약간의 사용료만으로 광범위하게 전송 복제됨으로써 출판 시장은 궤멸될 것이 자명하다. 종이책과 전자책은 단순히 매체의 형식이 아니라, 매체의 내용 자체를 변화시켜 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출판계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전자책의 유통 방식이 결코 책의 형태가 아니라, 쪼개어진 정보의 형태로 취사선택되리라는 것이 번연함에도 체질 개선의 필요성만을 운위하는 출판계의 단견, 곧 종이책이 아니라 전자책을 팔면 될 것이라는 안이한 시각이 안타깝다.
도서관을 비롯한 출판문화를 관장하는 산하기관들의 노력도 한층 절실하다. 도서관은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를 명실상부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단순히 수서와 정리, 대출의 통상적인 일상적 업무를 넘어 양질의 도서를 선정하고, 도서의 내용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간행물윤리위원회’와 같은 출발선상의 속성이 모호한 위원회가 독서운동의 외피를 둘러쓰고 낡은 형식에 새로운 내용을 담아내는 것을 기관의 역할 변화라고 승인하는 풍토는 사라져야 한다. 독서운동 전체를 포괄하는 기구가 있다면, 그 기구를 내실화하는 것이 당연 급선무일 것이며, 나머지는 기능을 축소하거나 통합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정부기구들이 도서구매를 입찰제로 하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관행 또한 개선되어야 한다. 낮은 입찰가로 도서를 구매하고자 하는 것은 문화적 산물인 책을 납품 단가를 언제든 낮출 수 있는 소비재로 간주하는 것이기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게다가 납품가를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할인폭이 큰 작품들이 구색으로 들어가는 것도 용납하기 어렵다. 적어도 공공도서관만이라도 책을 정가로 구매하는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나아가 지금보다 한층 더 다양하고, 풍성하게 양질의 책을 지원하는 제도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출판사의 노력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출판은 상업적인 이익을 도모함과 동시에 최소한의 문화적 자부심을 견지할 수 있는 운영 원칙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특히나 아동문학 출판의 경우, 메이저라 불리는 출판사들이 너나 없이 공모제를 통해 작품을 빗자루로 쓸어담듯이 끌어모으는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작가로 등용되는 과정이 느슨해진 지금, 공모제는 필요악의 측면들을 의당 지니고 있다. 실험적인 작가군들이 입신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인세를 상금으로 포장하고, 좋은 작품을 가려뽑고, 뒤처진 작품들을 다시 수정 보완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행태는 결코 출판 기획의 좋은 선례라고 보기 어렵다. 적어도 아동문학 출판문화의 융성을 기대한다면, 기왕에 출간된 작품들을 선정하여 작품성을 담보하는 사후의 수상 제도가 아쉽다. 물론 유수의 작가들 이름을 빈 문학상들이 특정 단체, 특정 문학인들의 집안 잔치로 끝나고 마는 형편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적어도 아동문학 작품을 통해 뿌리 내린 출판사들은 이해관계를 넘어선, 아동문학 전반의 발전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출판사들은 또 상업적인 독서 시장을 바탕으로 출판 풍토를 어지럽게 만드는 사설 단체들의 도서정가제를 무색케 하는 납품제도를 거부하여야 한다. 1만부, 2만부의 시장이 확보된다고 해서, 공 들여 만든 책들을 헐값으로 팔아넘기고, 작가의 인세를 듣기 좋은 말로 함께 낮추는 것은 출판 시장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작가들의 자기존중감까지 훼손시키고 있다. 독서를 빌미로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기에 급급한 단체들에 휘둘리지 않는 자정의 노력들이 필요하다.
또한 출판사들은 우리 창작자들의 노력을 등한시하고, 외국문학의 손쉬운 번역으로 기사회생하는 편한 길을 가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대규모 출판사들의 국내 대행사의 노릇이 출판사의 주력이 되는 한, 우리 아동문학의 내재적 발전이 그만큼 멀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참고문헌
한국어린이책연구소(2011), 한국어린이책연감 2010, 나무늘보
대한출판문화협회(2009~2011), 출판연감(www.kpa21.or.kr) 참조.
Taxel, J.(2002), "Children's Literature at the Turn of the Century; Toward a Political Economy of the Publishing Industry", Research in the Teaching of English, Vol.37, November.
Hade, D.(2003), "Storyselling: Are Children's Book Publishers Changing the Way Children Read?", Children's Literature Association Quarterly, Vol.28, F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