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9일 오후 7시, '책읽는사회'는 사회적 독서토론을 개최했습니다. 최장집 교수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을 함께 읽고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이 날 진행 및 토론은 김동춘 교수가 맡아주었습니다. 토론 내용을 '책 읽는 사회를 위한 북매거진─나비'의 독자와 공유하기 위해 녹취문을 정리하여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안찬수 사무처장
신년 들어 처음 모였는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박수 한번 칠까요? (짝짝) 저희는 ‘책읽는사회’라고 줄여서 일컬어지는 비영리공익단체입니다. 전국 각지에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책을 읽음으로써 사람됨의 자질이라고 할까요? 시민적 자질을 키우는 그런 모임이 많아지기를 바라면서, ‘책읽기가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그래서 저희가 이 독서토론모임을 ‘사회적 독서토론이다’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2013년 첫 자리입니다. 굉장히 어렵게 모셨는데, 최장집 교수님을 연사로 모셨고, 진행과 패널로서 김동춘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따로 세세한 설명을 드리기 보다는 두 분 큰 박수로 모시면서 2013년 사회적 독서 토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수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짝짝)
김동춘 교수
반갑습니다. 김동춘입니다. 제가 오늘 최장집 선생님의 책에 대해서 토론자 겸 사회자 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먼저, 선생님이 여기 책에 쓰신 내용도 좋고, 그 뒷이야기도 좋고, 대선과 관련해서 쓰신 내용이 시사하는 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한 시간이나 40분 정도 그런 이야기를 좀 해주시고, 제가 책에 대해 논평이라기보다는 떠오른 생각을 몇 개 적어온 게 있는데, 질문 겸 혹은 논평 겸 해서 제기하고, 선생님이 거기에 대한 답변 혹은 의견을 이야기하시고, 그 다음에 여기 오신 분들이 또 질문하는, 이렇게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적당히 시간이 길어지면 그 다음에 쉬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문에 연재할 때나 혹은 책에 나온 내용을 보셨겠지만, 우리 사회가 대선을 치뤘습니다. 특히, 최 선생님이 인터뷰 했던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 상당수가 선거 끝난 이후에 더 어려워졌고, 자살을 택한 사람도 꽤 많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그냥 단순한 노동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이 되고요. 그런 점에서 최선생님이 퇴직을 하시고 상당히 연세가 드셨는데, 이런 현장 인터뷰 작업을 하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존경스럽고, 우리가 많이 듣고 배워야 될 그런 전통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책에서 선생님이 이야기하셨듯이 선생님 자신도 이걸 통해서 새롭게 느끼는 바가 상당히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고, 진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 먼저 40분 정도 이야기해주시죠.
최장집 교수
반갑습니다. 더구나 오늘 사회 겸 논평자 역할까지 김동춘 교수가 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매우 기쁘고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동춘 교수께서 제 책을 보고 느낀 것을 질문 형태로 만든 문안을 봤는데요, 읽고 논평해주신 것에 대해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크게 차이가 없는데, 접근하는 게 좀 다르다고 봅니다. 해결책을 탐색하는데 있어 방법이 상당히 달라서,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이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 훨씬 더 듣는 사람한테도 재미있고 토론하는 저희 자신들한테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할 것 같습니다. 비슷하면 토론의 의미가 클 것 같지 않은데요. 그래서 오늘 제가 발표하는 거는 비교적 짧게 하고, 김동춘 교수께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 말씀을 좀 길게 하시고, 거기에 대해서 제가 대답하는 방향으로 토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하면 유익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입니다. 판단은 청중들이 하시는 거구요. 그래서 한 30분 정도가 될까, 제가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책을 쓰게 된 계기
우선 이 책의 출발은 신문에 칼럼을 쓰는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제가 지금도 경향신문에 한달에 한번, 정기칼럼을 쓰고 있습니다. 처음에 칼럼을 쓸 때 신문사에서 저한테 바랐던 것이, 보통 칼럼의 길이가 200자 원고지 10매 정도 되는데 한 두 배 정도 길게 써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보통 칼럼의 두 배면, 그냥 시사 문제라든가 논평을 하는 것처럼 쓰면 너무 길어가지고, 읽는 사람도 재미가 없고 쓰는 사람도 별로 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매 형식에 맞는 내용이 뭐가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기자처럼 현장을 인터뷰해서 쓰면 스토리도 있고, 그걸 소재로 의견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김동춘 교수나 저는 노동 문제를 했기 때문에 전공이 같습니다. 최근년에 들어서 노동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민주주의라든가 정치철학이라든가 이런 이론적인 문제를 많이 하다보니까 20여년 전에 했던 노동문제가 어떻게 변하고 발전했는지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그 사이에는 굉장히 중요한 사태가 있는데, 90년대 말에 IMF 국제금융위기가 있었죠.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경험하게 되고, 그것이 좋은 점도 가졌을지 모르지만 굉장한 파괴력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 실제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만들어낸 한국사회의 여러 가지 노동문제라든가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엄청나게 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정치의 내용이 과거와 굉장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그런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최근에 노동문제에 대해 별로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이 기회를 빌어서 노동문제를 좀 봐야 되겠다,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노동문제는 현장을 보지 않고 논문만 보거나 해가지고는 판단을 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영역입니다. ‘일단, 노동자들의 실제 삶의 현장을 보지 않고서는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신문에 나온 글이든 정치적인 의제든 또는 학술논문이든 제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가져야 되는데, 여기에 앉아서 그것만 읽어가지고는 알 수 없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제 자신의 공부를 위해 그런 실상을 알기 위해서 시작한 부분도 있겠습니다.
인터뷰의 어려움
그런데 칼럼에 인터뷰를 열 번 썼는데요, 인터뷰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노동현장에 찾아가서 사람을 만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우선 인터뷰를 하기가 힘들고, 사람을 만났을 때 묻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제가 가정의 즐거움이나 인간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한달 수입이 얼마냐 하는 그 어려운 부분을 주로 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괴로운 질문을 하는 것도 불편하고, 대답하는 사람도 곤혹스럽고 해서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좀 더 하고 싶었는데, 그런 것이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했습니다.
또, 제 자신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중상층의 사회계층에 속해있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다른 사람이 어려운 걸 봤을 때 굉장히 침울해진다고 그럴까 기분이 울적해지고, 우울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제가 이제 열 번에 걸쳐 분야가 다른 노동자들이나 중하층 서민 사람들을 만나면서, 하고 싶었는데 못했던 것이 있습니다. 50대 중년 실업의 문제에 대해 사람들을 좀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만나기도 그렇고 만나서 묻기도 그렇고 해서 못했고, 그 다음에는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정도 나이에 있는 아주 젊은 사람들, 주로 아파트 경비라든가 비정규직 일을 하는 젊은 세대를 인터뷰 하고 싶었는데, 이것도 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었던 걸 못한 경우가 좀 있어서 아쉬운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측면에서, 아까 말했듯이 한국 사회에 엄연히 계층이라는 것이 있는데, 저 같은 사람이 중하층 서민들, 노동자들을 찾아가서 그 세계를 들여다본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편하고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제 삶의 어떤 내용과 제가 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의 차이가 너무 느껴져서, 제 자신이 이중인격자 같은 느낌을 많이 가졌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살아도 되는 건지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대표되지 못하는 사람들
보통의 중산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생활 현실과 중하층 사람들의 생활 현실 사이에는 굉장한 단층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문에서 간헐적으로 인터뷰 기사도 내고, 그런 사람들의 생활 상태에 대해서 보도도 하지만, 그런 것은 어쩌다가 있는 일이고, 그런 보도가 사람의 관심을 얼마나 끄는 것인지 잘 모르겠고요. 그 삶의 세계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관심이 없고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많이 가졌고, 그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고 굉장한 단층이 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목소리를 갖지 못하는 사회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정치인이나 운동의 진보적인 활동가들조차도 이런 사람들의 조건에 대해서 얼마나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을 많이 가졌습니다.
과연 이런 사회 계층들이 한국 사회에서 규모가 얼마나 될까 물을 때, 이게 사회학적 질문입니다만, 제가 대학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대학교수를 하긴 했지만 대학 교수들이 이런 경험적인 연구들을 좀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이런 사회 계층들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냥 추정해서 한 20% 정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지난번 대선 때 신문을 보면, 어떤 대학 교수가 ‘한국 사회의 문제는 1%의 문제다, 0.01%의 문제다’ 이래가지고, 현재 엄청난 부를 가진 전체 인구의 0.01%가 온 사회의 GDP의 몇 프로를 차지한다 이런 식의 주장을 했는데, 저는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한국 사회의 문제는 오히려 지금 소리를 갖지 않은, 단층이 져 있는 중하층 사람들의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0.01%는 물론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의 다른 측면이긴 하지만, 문제의 초점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고, 한국 사회에서 만약 진보가 존재한다면 이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대표하고 이들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변화 없는 현장
사회학적인 측면에서는, 제가 10년 전까지만 해도 노동문제를 했고, 30년 전, 60, 70년대 노동운동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뒤의 노동자들은 어떻게 변했는가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노동문제에 대해 일단 손을 좀 놓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인터뷰를 하면 그 변화를 좀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 거죠. 그리고 그 30년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 사회가 아주 막 산업화를 시작했던 시기, 1세대 노동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집단이 활동했던 시기에서, 한 세대가 지나 자식 세대들이 성장해서 활동을 할 연령이 된 시간입니다.
그 사이에 한국 사회는 세계 7위권을 육박하는, 총생산규모 등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 성장의 선진 국가 대열에 들어갈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한 겁니다. 그런데 제가 봤던 사람들의 생활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 30년 전하고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어요. 우선 수입도 그렇고, 주거 환경도 그렇고, 자식들의 교육도 그렇고, 어려운 건 굉장히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죠. 특히, 제가 장위동의 봉제공장 노동자들을 보고 인터뷰를 했었는데, 인터뷰 대상자들이 딱 70년대 전후, 청계피복노조의 전태일 사건이 일어났던 시절의 노동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아버지, 엄마가 돼서 자식들이 다 성장하고 결혼한 다음, 다시 취업을 했던 사람들을 여럿 봤습니다. 그래서 한 시대 후에 이 사람들이 변한 걸 봤는데, 물론 사람들의 생활은 많이 향상된 게 있었어요. 자식들 공부시키고,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은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해서 중산층적인 상향 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은 전혀 발전이 없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현장을 보면서 진보운동이라든가 노동운동에 대해서 좀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정당정치에 대해서는 더 비판적이 될 수밖에 없고. 왜냐하면 단층 아래 사회집단한테는 정치적인 관심을 두지 않거나 정책의 대상으로서 바라보지 않고, 진보의 슬로건이나 운동 같은 것도 역량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청년 운동'을 쓰면서 언급을 했는데, 민주화 이후 ‘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으로 말한 대목을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정치적인 방법으로 또는 운동의 방법으로,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 그리고 그 앞 총선에서 뭐가 잘못됐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김동춘 교수와 토론하는 과정에서 자세히 얘기하고 싶습니다.
복지 체계의 문제점
복지 문제를 언급한다면, 전주 덕진리의 복지센터라고 하는 데를 갔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키는데, 이 교육이라는 것이 직능적인 것입니다. 자전거 수리를 한다거나 꽂꽂이를 배운다거나, 그 사람들이 다시 시장에 나와 재활할 수 있도록 하는 기초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사회복지사들도 있고, 여러 가지 관련 복지정책이 시행되는 현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곳을 예를 들어 봐도, 우리가 복지 예산을 통해 복지 정책을 편다고 할 때, 예산이 상당히 행정적으로 소비되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기초생활수급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는 게, ‘민스 테스트’라고 해서 시행기관에서 자격요건을 심의해서 이 사람이 기초생활수급대상자인지 차상위수급대상자인지 차차상위수급대상자인지 등급을 정해서 복지비를 지출합니다. 이런 행정 중심적인 복지예산의 지출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문제가 많다는 걸 봤습니다.
또 하나는 거기서도 아주 어려운 사람들은 혜택을 못 받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노인들, 주로 독거노인들인데, 전주 덕진리 복지센터가 교육센터의 모델케이스라고 해서 보니까 복지센터는 엄청나게 잘 지어졌고 좋은데, 그런 복지센터는 노인이라도 교직자로 있다가 퇴직했다던가, 행정공무원으로 있다가 퇴직한 사람들, 옷 같은 것도 잘 입는 사람들이 나와서 친구들 만나고, 점심도 싸게 주니까 와서 먹고, 바둑도 두고, 서예도 배우는 등 노후를 보냅니다. 이런 것은 좋은데, 정작 더 어려운 사람들은 가려고 하면 아무래도 심리적인 벽이 생기는 거죠. 그래도 번듯한 직장을 가졌다가 은퇴한 노인들이 가는데, 아무것도 없이 한 사람들은 거기서 점심을 얻어먹기도 발이 안 내키고, 그러다 보면 완전히 고립되어서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선거 때 운동을 하면 주로 그런 데 와서 정치인들이 한바퀴 돌고 악수하고 복지 어쩌고 하는데, 정작 거기에 나타나지 않는 어려운 노인들 집을 찾아가서 보니까 굉장히 지원이 필요한 이런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보편적인 복지, 복지 확대가 이슈가 된 건 좋은데, 정책이 섬세하지 못하다 보니까 정부에서 그냥 복지예산을 늘려 시행하고는 이게 복지라고 합니다. 그럼, 저는 새누리당도 얼마든지 복지를 잘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복지의 개념이라는 것이, 어떻게 하다보니까 ‘노동 없는 복지’ 이런 얘기도 나옵니다만, 복지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가지고 수혜를 받는다는 의식을 갖거나 그 사람들의 요구를 일단 존중하고 그 요구에 대응해서 복지비가 지원이 된다거나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그냥 행정적인 원리로 복지예산이 일률적인 기준에 의해서 배분 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대선 이후에 새로운 정부, 그게 새누리당 정부든 민주당 정부가 혹시 대선에 승리해서 정부가 됐든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이럴 때 인프라스트럭쳐가 굉장히 개선되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복지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주체성이라든가 자긍심이라든가 자기의 권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실제로 스스로 할 수 있는 역량이 커져야 되는데, 그거보다는 일단 예산을 늘립니다. 돈이 늘어나면 수혜 대상자들은 당장 도움은 받겠지만 일시적인 거에 불과한, 온정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복지 밖에 안 됩니다. 이런 복지 인프라스트럭쳐가 깔려 있는 상태에서 예산이 거기에 투하가 되면 문제가 상당히 복잡해질 수가 있는 거죠. 복지 체제가 개선되고 다른 질적인 변화를 갖는 게 아니라,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먼저 개선된 다음에 복지예산이 그거를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있는 위에 이게 부여될 때는 있는 문제가 더 커지고 별로 효과가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복지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이 정부가 들어선 뒤에 실제로 어떤 효과가 있는가, 한번 저 자신이라도 가서 들여다보면 아마 뭐가 변했는지 이런 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예를 하나만 들었을 뿐인데 제가 말씀드릴 건 여기서 중단하고 김동춘 교수의 논평을 듣고 또 대답하는 게 오히려 더 다이내믹한 내용이 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