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동아리를 위한 책 읽기 5
분야별 추천 도서_ 사회과학
왜 사회과학인가
‘사회과학’을 읽는다는 것은, 당대의 세상을 읽는다는 것이다. 좀 단순화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때때로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푸념하곤 한다. 바로 이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릴 실마리를 열어 주는 것이 사회과학 책이다.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안다고 뭐가 달라질까. 물론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세상은 내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건 모르건 아무 상관없이 그 모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세상을 살아야 하는 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건 꼭 사회과학 책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어떤 책이든 책을 읽어 이전까지 모르던 것을 알게 되면, 또는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분명하게 와 닿지는 않던 것을 확실히 깨우치고 나면, 내 삶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달라진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삶의 ‘조건’이 달라진다는 듯이 아니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된다고 해서 곧바로 가난한 사람에게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따돌림을 받던 사람에게 갑자기 친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달라지는 것은 내 삶을 둘러싼 조건들이 아니라, 그 조건을 대하는 나의 태도다. 인문학 책을 읽으면 자신을 포함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자연과학 책을 읽으면 자연 현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사회과학 책을 읽으면, 우리가 흔히 ‘세상’이라고 말하는 사회 현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런데,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진 것이다. 그 세상을 이루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달라진다면, 그게 바로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나 한 사람이 성별(또는 외모, 학벌, 기타 등등)에 따라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나아가 나 또한 알게 모르게 숱한 차별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해서,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그 차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된 내가 이전보다는 언행을 좀 더 조심하기는 할 것이다. 그렇게 달라지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면, 실제로 차별을 당하는 일은 이전보다 줄어들 것이고, 그것을 우리는 적어도 이전보다는 차별이 줄어든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알아 가는 일은 실은 ‘내가 왜 이 모양인지’를 알아 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과학 책은 특히 ‘함께’ 읽을 때 더 의미가 크다. 만일 내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데 나 혼자만 달라진다면, 나와 그 사람들은 더는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딴 세상 사람’이 되는 게 고작일지 모른다. 내가 남들 안 읽는 책을 읽고 알게 된 내용을 아무리 떠든다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공연한 찰난 척’으로밖에는 안 보일 수도 있다. 세상이 달라지기는커녕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된 사람이 오히려 세상에서 고립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이즈음 사회과학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환영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세상이 그런 대로 살 만한 세상’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라면 굳이 사회과학을 읽어야 할 이유를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사회과학을 꺼리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좀 더 살 만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그런데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가 안 궁금해?”
신문 읽기와 뉴스 보기부터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듯, 이런 당위만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건성으로 듣고 있는 사람과는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읽어야 한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으며, 오로지 ‘읽고 싶다’가 선행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책이든 읽어야 하는 까닭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읽고 싶어지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 달리 말해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사람, 예컨대 신문이나 방송 뉴스조차 멀리하는 사람에게 사회과학 책을 읽게 할 수는 없다. 흔히 사회과학 책을 읽게 함으로써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을 것처럼 오해하곤 하지만, 오히려 이 주제에 대한 반감과 독서 일반에 대한 염증이라는 부작용이나 안 생긴다면 천만다행일 것이다.
사회과학을 읽는 일이 당대의 세상을 읽는 일이라고 할 때, 지금 여기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사정은 사회과학 책 이전에 신문이나 시사 잡지, 방송 뉴스 등에 담겨 있고 이런 매체들은 책보다는 훨씬 접근성이 높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막연하게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사람에게는 여간해서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대신 신문을 정독하고 방송 뉴스를 꼼꼼히 챙겨 보기를 권한다. 그러고 나서 더 궁금해지는 내용이 있는지를 묻는다. 사람에 관해서건,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관해서건, 자연 현상에 관해서건, 더 알고 싶어진다는 것, 그것만이 독서의 유일한 동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을 때, 그 관심의 깊이와 방향을 주의 깊게 듣고 나서야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그 사람이 ‘지금’ 품고 있는 궁금증에 대처하기에 가장 적절해 보이는 책을 조심스럽게 추천하곤 한다. 혹시 아무리 열심히 뉴스를 챙겨 봐도 딱히 더 궁금한 내용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뉴스에서 다루는 사건들을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딴 세상에서 일어난 일처럼 건성으로 넘겼다는 뜻이다. 과연 정말 그럴까. 어쩌면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최초의 계기’다. 신문 지면이나 뉴스 화면을 채우는 저 사건들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만이라도 궁금해진다면,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더 많은 지식을 쌓을수록 새롭게 알게 되는 내용보다 더 알고 싶어지는 내용이 훨씬 더 늘어나게 마련이다. 그에 따라 읽고 싶어지는 책의 목록도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대책 없이 늘어 가기만 하는 목록에 지레 질리지 않는 것이다. 그저 ‘무작정 손에 잡히는 대로, 조금이라도 더 끌리는 책부터’ 차근차근 읽어 가다 보면, 더 이상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는 요구는 필요가 없어진다. 읽고 싶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의 목록이 책을 읽어 갈수록 눈덩이처럼 늘어갈 테니까.
여러 사람이 함께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은 무한히 많을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란 없다. 그러니 구성원 각자가 가장 읽고 싶은 책을 제안하고, 다른 구성원들도 그 책이 읽고 싶어질 수 있도록 왜 그 책을 읽고 싶은지 잘 설명하는 과정을 성실히 수행하면, 가장 많은 구성원이 읽고 싶어 하는 책부터 읽어 나가는 일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책을 읽고 나서도 더 궁금해지는 내용은 제각각일 것이고,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의 목록은 그만큼 더 늘어난다. 그 가운데에서 더 많은 구성원이 끌리는 책을 골라내는 일은 더 흥미진진할 것이다. 관심의 방향들이 너무 달라서 합의가 쉽지 않다면? 그런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데도, ‘저 사람은 왜 저런 책을 읽고 싶어 하는지’가 안 궁금해지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그렇다면 일단 그 책을 읽는 게 그 궁금증에 대처하는 가장 쉬운 길이다.
고전은 발견된다
덧붙이자면, 이런 독서법은 ‘고전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에도 의미심장한 실마리를 던진다. 나는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끌리지도 않는 책을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다고 단언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책이란 읽고 싶을 때만 제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관심이 넓어질수록 읽고 싶어지는 책의 목록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더 알고 싶어지는 내용이 생길 때마다 그 궁금증에 가장 적절한 책들을 추천받더라도 그 모든 책을 한꺼번에 읽을 수는 없으므로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덜 끌려서’ 언젠가는 읽을 책으로 밀쳐질 것이다. 그런 과정이 거듭되다 보면, 어떤 내용에 대한 책으로 추천받았던 책을, 얼핏 그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다른 내용이 궁금할 때도 추천받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어떤 책에 대해 그런 일이 누적된다면 더 밀쳐 두기는 점점 어려워질 텐데, 신기하게도 그런 책은 대개 많은 사람들이 ‘고전’으로 지목하는 책일 가능성이 높다. 그제야 ‘아, 그래서 이 책을 고전이라고 하는구나’ 깨닫게 될 것이다. 고전이니까 읽으라고 강권하지 않아도, 이미 더는 피할 수 없을 만큼 읽고 싶어져 자연스럽게 손에 잡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는 그런 책이 있기는 한데, 아무리 봐도 ‘고전’이라고 널리 지목되는 책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런 경우를 나는 ‘나만의 고전’이라고 말한다. 남들이 뭐라건 나한테는 그 책이 틀림없는 ‘고전’이라는 것이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고전’을 추천할 만한 사회문화적 지위를 갖게 된다면, 나는 그 책을 추천 목록에 넣을 수도 있다. 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 목록’도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요컨대 고전이니까 읽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읽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고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앞서 막연한 추천을 피하는 까닭을 설명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만용을 무릅쓰고 추천할 책을 굳이 꼽아야 한다면 그저 내가 발견한 ‘나만의 고전’을 언급할 수 있는 게 고작이다. 이 책들을 꼭 읽어야 한다고 강권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목차와 책 소개를 찾아 훑어보고 끌리면 읽어 보시기 바란다. 이 책들의 관련 도서로 함께 검색되거나 언급되는 책들 가운데 더 끌리는 책이 있다면 이 책들보다 먼저 읽어 보는 것도 좋겠다.
당대를 충실히 읽는 데 도움이 되는 책
《현시창》, 임지선, 알마, 2012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엄기호, 따비, 2013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오찬호, 개마고원, 2013
《사건으로 보는 시민운동사》, 차병직, 창비, 2014
사회과학의 갈피를 잡는 데 도움이 되는 책
《헌법의 풍경》, 김두식, 교양인, 2011
《신문 읽기의 혁명》, 손석춘, 개마고원, 2003(1권)/2009(2권)
《인권을 외치다》, 류은숙, 푸른숲, 2009
《경제사 오디세이》, 최영순, 부키, 2002
좀 더 본격적인 토론에 도움이 되는 책
《날아라 노동》, 은수미, 부키, 2012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교양인, 2013
《간디의 물레》, 김종철, 녹색평론사, 2010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임승수, 시대의창,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