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사회
이쯤에서 1960년대 마을문고운동을 하신 한 분을 모셔서 당시 지역의 문고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분은 단순한 문고 활동가가 아닙니다. 엄대섭 선생님과 같은 시기에 도서관운동을 하셨고, 이용남 교수님과도 상당한 인연이 있는 분이십니다. 1950~60년대 경남 합천에서 묘산도서관을 운영하셨던 장석순 님을 모시겠습니다. 모두 큰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장석순 나오며 사회자와 악수하고, 이용남과 포옹한다. 무대를 향해 인사하고 자리에 앉는다.)
사회
두 분 잘 아는 사이시죠? 몇 년 만에 만나신 겁니까?
이용남
50년 가까이 되었죠.
장석순
아마 그 정도 되었을 겁니다.
사회
언제 처음 만나셨습니까?
이용남
제가 대학 다닐 때 방학마다 농촌봉사활동을 갔습니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하고 겨울방학 두 번을 묘산도서관으로 봉사활동하러 갔습니다. 그때 장석순 님이 관장이셨지요.
사회
묘산도서관에 대한 기록을 보니 도서관 개관 시기가 1954년으로 1953년 개관한 경주도서관보다 1년 정도 늦었습니다. 그때부터 도서관을 운영했습니까?
장석순
그때는 제 동생이 운영을 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죽어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맡아서 운영했습니다.
사회
묘산도서관은 아주 특이한 도서관입니다. 엄 선생님의 경주도서관은 설립은 선생님이 하셨지만 모든 시설과 장서를 경주시에 기증하고 관에서 운영한 공립도서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묘산도서관은 개인이 운영한 사립도서관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립도서관 1호로 등록된 도서관이기도 합니다. 또한, 지역도 아주 외진 산골이었어요. 당시 우리나라 도서관은 수적으로 매우 적었지만 대부분 도시를 중심으로 설립되었고, 군 지역에서 설립되어도 유동인구가 많은 읍 지역에 설립이 되었는데, 묘산도서관은 그때나 지금도 면 지역이고, 더한 것은 면사무소 소재지도 아닌 농촌마을 한가운데 설립이 되었습니다. 이 묘산도서관에 대해 조금 더 말씀해 주시지요.
장석순
네, 사회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묘산도서관은 1966년 무렵까지 10년 조금 넘게 운영된 도서관이고, 정확한 위치는 경남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 중촌마을에 있었던 도서관입니다. 지금도 면 소재지까지 나가려면 한참을 나가야 되지요. 당시는 농촌마을에 문맹자가 많았고, 농한기면 마을 곳곳에서 노름판이 벌어지고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도 마찬가지였고, 마을마다 뜻 있는 청년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몽운동을 하는 일들이 많았지요. 저나 제 동생도 그런 흐름 속에서 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도서관을 중심에 놓고 일을 했던 것이 다른 점이죠.
사회
어떻게 도서관을 생각하게 되었습니까?
장석순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요. 이것을 바꾸려면 먼저 사람들이 글자를 배우게 하고, 글을 통해 지식을 얻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을 생각했고, 마을회관을 개조해서 도서관으로 만든 것이지요.
사회
마을회관에 만들어진 도서관이라고 하면 규모가 아주 작았겠는데요. 지금 작은도서관 정도였습니까? 당시 규모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이용남
거기에 대해 제가 말씀드리죠. 묘산도서관은 산골에 있었지만 요즘 작은도서관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운영됐지요. 당시 마을문고가 30권의 도서로 운영되었고, 지금도 작은도서관 기준이 장서 1천 권 이상이지만, 그때 묘산도서관 장서가 6천 권이 넘었습니다. 장서 면에서는 당시 웬만한 도시의 도서관보다 나았습니다.
사회
정말입니까?
장석순
네, 시골 마을회관이 크면 얼마나 크겠습니까? 크기는 작았지만 책만큼은 꽤 많았지요.
사회
선생님은 직접 연세대 도서관학당에서 연수까지 받으셨다던데 어떻게 받게 되었습니까?
장석순
죽은 제 동생 말고 그 아래 동생이 당시 한양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동생이 저에게 도서관학당이 있다는 걸 알려 줬어요. 그래서 이왕 도서관을 운영하는 거 제대로 운영해보자는 생각을 했지요. 또 그때는 도서관학당 강습회 일 년짜리 과정이 없어지고 단기과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단기과정으로 한 달 동안 연수를 받았지요. 그러면서 도서관 개괄, 분류법, 정리법도 배웠지요.
사회
엄대섭 선생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습니까?
장석순
아무래도 연세대 도서관학당이 인연이었지요. 그때 우리나라 도서관 관계자들을 알게 되었어요. 연세대 이재철 교수님, 서울대 백린 선생님 등. 그걸 계기로 돈암동 선생님 댁에도 찾아가고 도서관 운영에 많은 도움을 받았지요. 또 동생 분한테 도움도 받았습니다.
사회
어떻게 도움을 받았습니까? 동생 분들은 마을문고운동을 하신 분들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장석순
동생 분들이 의사셨어요. 1950~60년대는 우리나라 사람들 몸에 많은 기생충이 있었습니다. 마을 주민들 건강을 위해 기생충 검사를 하기 위해 부산대 의대를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의대생들 가운데 엄〇섭이란 분이 계셨어요. 그래서 혹시 마을문고운동하시는 엄대섭 선생을 아시냐고 물었더니 자기 형님이라고 하더군요. 뭐 그때부터 일이 잘 풀려서 마을주민 전체가 기생충 검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기생충 약을 먹으면 기생충이 밖으로 나왔어요. 그래서 온 마을이 기생충 사체로 뒤덮인 적이 있었지요.
사회
교수님, 묘산도서관 활동이 엄 선생님과 마을문고운동을 하게 된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지요?
이용남
당시 학생들이 묘산도서관에 가서 책 정리작업을 했지요. 분류표대로 분류하고, 편목법에 맞추어 카드형으로 멋지게 편목을 해 놨는데, 얼마 뒤 엄대섭 선생님이 묘산도서관에 다녀오신 뒤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자네들 도서관학과 봉사단의 도서 분류·목록 정성이 대단히 지극했더군. 그런데 주민들은 자네들이 만들어 놓은 카드목록이 더러워질까 봐 그런지 이용을 잘 하지 않아 아주 깨끗하더군.”이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만들어 놓은 목록이 개가제로 운영되던 묘산도서관에서는 큰 쓸모가 없었던 거지요. 그때 깨달았지요. 도서관이 형식보다 내용이라는 것을.
사회
교수님은 묘산도서관 시절에 큰일을 겪으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용남
겨울 도서관 봉사 마지막 날 눈이 왔어요. 우리는 마을 청년들과 함께 눈싸움을 하다가 갑자기 제가 기침을 하며 쓰러졌어요. 그때 입에서 피가 나오더군요. 모두들 혼비백산해서 진주로 해서 서울로 왔지요. 결핵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1년 동안 학교를 쉬었습니다.
사회
장석순 선생님은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장석순
네, 기억합니다. 생생하지요.
사회
사실 이 자리에 묘산도서관 운영자인 장석순 선생님을 모신 것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묘산도서관은 엄대섭 선생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운영한 문고는 아닙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문고라고 하기엔 장서량이나 활동 면에서 굉장히 컸지요. 앞서 마을문고 이념 가운데 첫 번째 이념 ‘민중도서관’이라는 것은 주민들의 자율조직으로 스스로 도서관을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주민들 속에서 주민들과 함께하는 상향식 대중도서관운동인데요. 요즘 많이 생겨나고 있는 작은도서관들이 새겨야 할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석순 선생님, 묘산도서관 운영방법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장석순
묘산도서관은 지역사회 계몽운동의 방법으로 시작했지요. 그런데 도서관을 운영하고 지역사회를 계몽하려면 아무래도 운영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고민과 활동을 했지요. 공동으로 논밭을 개간하고, 양잠을 해서 비용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농촌 책보내기 사업으로 책이 우리 도서관에 왔는데, 그 책들 가운데 덴마크의 협동조합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는 책을 보았지요. 그걸 보면서 우리도 협동조합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먼저 소비조합을 만들었지요.
사회
앞에서 엄대섭 선생님도 그렇고 교수님도 1950년대 농촌 책보내기 운동이 실패했다고 했는데, 드물게 성공한 지역이 묘산도서관이군요.
장석순
그렇지요. 이 책을 보면서 우리는 고민한 끝에 소비조합인 마을 구판장을 만들었어요. 마을회관이 도서관이자 마을 문맹자들과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공민학교이고, 마을 구판장이었어요.
사회
와! 그 모든 것이 한 곳에서 이루어졌습니까?
장석순
네, 실제로 당시에 도서관 문 앞 한쪽 기둥에는 묘산도서관이란 간판이, 다른 한쪽 기둥에는 묘산고등공민학교 간판이 붙어 있었어요.
사회
지금도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도서관이나 평생학습시설이 잘 없을 텐데 대단하군요. 좀 더 말씀해주시죠.
장석순
도시에서 생필품을 사가지고 와서 주민들에게 약간의 이문을 남기고 팔았지요. 이건 서로에게 이득이었어요. 다른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보다 값이 많이 쌌으니까요. 우리는 그 수익금으로 도서관을 운영했습니다. 또, 마을 일에 쓰기도 했고요. 그러니 자연스레 마을에는 글자를 모르는 이들이 없고, 마을사람들 모두가 책을 읽게 되니 새로운 농사법이나 생활개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요. 당시 농한기에는 노름하는 이들이 참 많았어요. 도서관을 운영하는 청년회에서는 노름판 없애기 운동도 했지요.
사회
다시 선생님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 마을문고는 지속적으로 재정이 어려웠지요? 재정 타개를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 주시죠.
이용남
선생님이 마을문고를 운영하시면서 수익금이 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나 어려웠어요. 그때마다 큰돈 작은 돈을 융통해서 위기를 넘기셨지요. 그런데 1967년 무렵에는 큰 위기가 왔어요. 그래서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던 이후락 씨를 회장으로 추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지요. 선생님의 노력에 이후락 씨가 굴복한 거지요. 그때부터 몇 년간은 재정에 문제가 없었어요. 그리고 1977년 무렵에 진짜 큰 위기가 왔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 대기업을 찾아다니면서 기부나 운영을 부탁했지요. 그런데 전부 거절했습니다. 마침 내무부에서 지원을 해주어서 위기를 넘겼지만 말입니다.
사회
선생님은 이런 위기를 겪으면서도 마을문고운동에만 그친 것은 아니셨습니다. 끊임없이 독서진흥과 도서관 관련 사업을 해나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국민독서연맹이었지요.
이용남
네, 정열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1960년대 후반 마을문고가 본궤도에 오르자 소외된 쪽이 있었어요. 바로 도시였어요. 농촌지역보다 인구가 훨씬 많지만, 여전히 공공도서관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한 끝에 국민독서연맹을 만드신 거지요.
사회
국민독서연맹이 처음엔 마을문고 산하단체였다면서요?
이용남
그렇지요. 국민독서연맹이 처음 설립된 것은 1965년이었어요. 제가 1966년도에 마을문고에 들어갔으니, 제가 들어가기 전이었습니다. 그때는 전국에 마을문고가 막 확산되기 시작하던 때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국민독서연맹이란 사업을 하려 했으니 제대로 안 되었지요. 이름만 있고 제대로 활동을 못 했어요. 그러다가 1969년에 고민 끝에 국민독서연맹을 별도의 사단법인으로 만들고 도시형 문고운동을 하셨습니다.
사회
주요 사업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용남
주요 사업으로는 직장에 문고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도시 직장을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을문고와 똑같은 구성에 크기는 조금 컸지요.
사회
잘 운영되었습니까?
이용남
아휴, 말도 마세요. 솔직히 그건 선생님의 욕심이었어요. 그때 직장문고 설치 대상을 5인 이상 사업장으로 잡았어요. 그 대상에 심지어는 목욕탕도 있었습니다.
사회
요즘도 작은도서관 설치 규정이 300인 이상 사업장인데 그때 5인 이상 사업장이라니 엄청나군요.
이용남
그리고 그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이 힘든 시기였습니다. 종업원들 학력도 매우 낮았고, 사용자들 의식 수준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지요.
사회
그래서 얼마나 설치했습니까?
이용남
직장문고를 설치하기 위해 엄청나게 뛰어다녔습니다. 아무리 언론사의 협조를 받는다고 해도 마을문고처럼 잘되지 않았지요. 결국 설득 끝에 서울의 버스 안내양 합숙소에 문고를 설치했지요. 곧이어 부산지역 버스 안내양 합숙소에도 설치했습니다. 이밖에 몇십 군데 더 설치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회
버스 안내양 합숙소에 설치했다니,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용남
버스 안내양 대부분이 못 배우고 어린 나이에 시골에서 올라와 힘들게 일을 했지요. 여기에 설치를 한 것은 당시 농촌지역 마을문고 운영 주체가 이들 또래였습니다. 농촌에서 마을문고를 한창 운영하는 청년들이 도시에 와서 책을 읽을 기회가 없어진 거지요. 그래서 이들에게 책 읽을 기회를 준다면 이들이 나중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마을문고를 운영할 자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셨지요.
사회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용남
아시다시피 1970년대부터 급격하게 산업화가 되었지 않습니까? 이들 대부분이 도시에 눌러앉았지요. 그러니 실패할 수밖에요.
사회
또 다른 활동은 무엇이 있습니까?
이용남
국민독서연맹 활동과 순회문고 활동, 도서보급운동이 있습니다. 국민독서연맹에서 중점적으로 한 것은 국민독서경진대회가 대표적인데 이것은 새마을 중앙회에서 아직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회문고 활동은 경주도서관이나 강진도서관처럼 마을문고와 공공도서관이 활발하게 교류를 하고 있던 지역에서는 순회문고가 잘 운영되고 있었고요. 나머지 지역에서는 잘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고민을 한 거지요. 그 과정 속에서 이동도서관도 나오고 여러 가지 안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실행에 옮긴 것은 없습니다. 도서보급운동은 당시 계획만 세워 놓고 있다가 제대로 못 하고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새마을운동의 지원을 받아서 농어촌 실무서적을 중심으로 책을 직접 발간한 사업입니다.
사회
국민독서연맹 활동이 실패한 사업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선생님이 단순한 마을문고 운동가가 아니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시켜주는 활동이라 생각합니다. 농어촌과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독서운동과 도서관운동을 생각하셨고, 또한 그때부터 순회문고 활동에 대한 고민을 하시면서 이동도서관까지 생각하셨다니 참 대단합니다.
이렇게 힘든 시기를 지난 끝에 선생님이 1980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받게 되었습니까?
이용남
1977년 무렵이었어요. 필리핀 어느 연구기관에서 우리나라 농어촌지역 독서실태조사를 나온다고 해서 안내를 했지요. 아,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 막사이사이상 사전 조사였어요. 꽤 꼼꼼하게 이것저것 물어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더구나 시상식장에 가서 더 놀랐습니다. 세계도서관대회 참석차 필리핀 마닐라에 가셨던 이봉순 이화여대 교수님이 시상식 할 때까지 계셨어요. 그냥 그런가보다 했더니, 막사이사이상 재단 사무총장님이 이봉순 교수님하고 미국 유학 시절부터 교분이 있던 분이셨어요. 이봉순 교수님을 통해 막사이사이상 재단은 엄 선생님의 활동에 대해 조언을 받으셨고, 막사이사이상 재단은 개발도상국의 독서운동과 도서관 발전을 위한 모범이 되는 운동이라며 공공봉사 부문 상을 수여했습니다.
사회
사모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어 막사이사이상 수상이 확정되었다면서요?
이용남
네, 1980년은 선생님 스스로 가장 희비가 엇갈린 해라고 하셨어요. 6월에 사모님이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고, 8월에 수상이 확정되었으니까요.
사회
우리나라에 막사이사이상을 받으신 분이 꽤 되지요?
이용남
선생님보다 앞서 받으신 분은 장준하 선생, 김활란 박사, 김용기 선생, 이태영 변호사, 아동문학가 윤석중 선생, 장기려 박사가 있고 최근에 받으신 분으로는 법륜스님이 대표적이죠.
사회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뒤 사정은 좀 나아지셨습니까?
이용남
그렇지 않았어요. 선생님은 상을 받아 전국적으로 인지도나 성과를 확실하게 인정받았잖아요. 그걸 계기로 좀 더 확실하게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지재단을 만들려고 여러 곳으로 뛰어다녔습니다. 하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새마을 중앙회로 통합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일선에서 후퇴를 하셨고, 저는 그대로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한성대학교에서 교수 모집공고가 났습니다. 주변에서 권유도 있고, 후배인 곽태원 부장이 저 때문에 만년 부장을 하고 있으니 후배를 위해서라도 길을 터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