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처음 자신의 책을 갖는 순간이란 여러모로 경이롭다. 세상에 오직 자기 자신만이 펼쳐볼 수 있는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 같은 그 느낌은 누구나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책이 지금보다 훨씬 귀하고 ‘어른의 물건’ 이었을 때는 그 시점이 무척 늦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어떤 사람은 평생 자신의 책을 한 권도 가져보지 못하고 삶을 마쳤을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책’이 세상에 나오고 요즘은 어느 서점에든지 가면 그림책과 동화책이 쉽게 눈에 띄는 세상이 되었지만 ‘자신의 책’을 갖는 기회는 여전히 모두에게 골고루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가 책과 만나는 통로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다. 삶이 절박하고 고단한 부모는 ‘한가롭게 아이들 책을 뒤적이고 있을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나중에 어린이가 알아서 책을 읽게 되는 날’을 막연히 기다린다. 어린이는 부모의 삶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함께 겪으면서 책과 멀어지기 쉽다. 책이 무엇이고 이야기에는 어떤 행복이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은 개인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공동체의 소명이다. ‘책’은 커뮤니케이션의 기초이며 ‘이야기’란 다함께 공유하고 나눌 때 당대의 풍요로운 성장을 이루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할 수 없다면 이웃이, 동네가, 사회가 어린이의 첫 책을 챙겨주어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부모와 사회가 어린이의 삶을 양적 경쟁으로 생각하다가 책을 놓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금의 사회는 경쟁에 대한 반성 없는 찬양이 이루어지고 있고 경쟁의 폐해를 걱정하는 사람조차 ‘피할 수 없는 양적 경쟁’에 대해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상황이다. 더 빠른 나이에, 더 강도 높게 경쟁을 시킬수록 승리의 확률이 높아진다고 착각한다. 책도 그 자체로 바라보지 않고 경쟁의 수단으로 생각하면서 일찍부터 속도를 올리고 타인의 독서 습관과 비교를 일삼는다. 경쟁에 도움이 되는 책만을 선별하여 아이의 무릎에 놓기를 바란다. 독서 선행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이른 나이부터 학습과 직결되는 도서, 문장과 구성이 어려운 도서를 읽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독서 사교육 현장에서부터 시작되었을 이러한 풍토는 아이들이 ‘내 마음의 책 한 권’을 갖기보다는 ‘현란한 독서 이력’을 갖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기획된 독서는 책을 대하는 어린이의 감정을 더욱 메마르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느긋하고 풍요로운 책읽기도 있다. 어린이 독자의 마음속 움직임을 섬세하게 존중하는 한 권의 책이 있고 그 책을 조급하지 않게 아이와 나누려는 교사와 부모가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이때 어린이와 책 사이에서는 작은 기적이 일어난다. 어린이는 책 속의 인물을 만나 시간,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다른 세계와 평등하게 마주치는 수평적 상호작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가장 존중하고 나를 가장 깊게 이해해주는 사람이 책 속에 있다는 것처럼 든든한 성장의 동력은 없다. 가능하면 많은 어린이에게 그런 기회를 줄 수 있는 책날개 프로그램이 되기를 바랐다. 초등학교 입학이라는 시점은 이제 글자에 익숙해지고 그림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그들이 ‘내 마음의 책’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순간이기도 하다.
이번 책날개 선정 도서들은 그러한 프로그램의 목적에 가장 가까이 부합할 수 있는 책으로 골랐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연령의 어린이 가운데 비교적 더딘 걸음의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천천히 가는 책’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어린이의 생활이나 상상 세계와 더 깊게 공감할 수 있는 ‘가까이 오는 책’을 고르려고 노력했다. 학습 교양과 연결 짓기 쉬운 비문학책보다는 문학성과 예술성이 높은 ‘이야기가 있는 책’을 선정했으며 어린이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우리 작가의 작업을 중심으로 하였다. 우리 작가들의 창작 작업을 응원하는 의미도 있고 처음 입학하는 어린이에게는 우리가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이 곳의 책’을 선물하는 것이 좀 더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옛 이야기와 현대적인 이야기는 골고루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전문 인용되는 익숙한 책보다는 ‘새로운 책’으로, 글과 그림의 기계적 안배보다는 작품의 통합적 예술성을 잘 살린 ‘자유로운 책’으로, 특정한 성별이나 국가, 지역, 인종에 대한 차별이 담겨 있지 않은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책’으로 선정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기존 학교도서관의 장서와 중첩을 피하고 더욱 참신한 목록을 구성하기 위해 출간 2년 이내의 책으로 한정하였다. 전체 선정요청 도서 목록과 그동안 출간되었으나 목록에서 제외되었던 작품을 포함하여 전수 심사를 벌인 후에 각 심사위원이 50여 종의 도서 목록을 후보작으로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 목록을 수합하여 장시간에 걸친 토론과 실물 검토 회의 끝에 최종 목록을 작성하였다.
심사위원들이 가장 고심하였던 부분은 이 책이 ‘입학하는 어린이를 위한 선물’이라는 점이었다. 입학과 함께 받는 책의 느낌은 그 어린이의 학교생활에 대한 느낌과 연결되어 기분을 좌우하기도 한다. 가능하면 경쾌하고 즐겁게 초등학교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생동감 넘치는 그림과 글이 담겨 있는 작품을 우선으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그 나이 무렵의 아이들이 고민할만한 슬픔, 외로움,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일부러 배제하지는 않았다. 예술적으로 잘 승화된 서사와 그림은 충분히 어린이의 기분과 자연스럽게 공명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만 예술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이미지가 지나치게 자극적이거나 섬뜩한 공포감을 자아내는 경우는 ‘선물’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논의 끝에 제외하였다. 한 학급 또는 한 학교의 신입생들이 서로 다른 책을 받아 돌려 읽게 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가능한 한 다양한 주제, 넉넉한 종수의 책을 선정하고자 하였다. 소규모 출판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책은 가능하다면 더 주의 깊게 살펴보려고 하였으나 출판사의 규모만을 배려의 기준으로 삼지는 않았다. 책의 적합성에 대한 엄정한 판단을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았다.
책날개 프로그램은 민간과 관이 함께 벌이는 ‘공적 운동’이다. 책읽기를 통해 동시대 어린이들에게 폭넓은 소통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으며 이렇게 선물받은 ‘그 어린이의 첫 책’이 ‘그 집 가족이 다함께 읽는 첫 책’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세대 간 독서 공감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신뢰 속에 꾸준히 진행되기 위해서는 목록의 선정이 중요한 작업임을 심사위원들도 잘 알고 있기에 어깨가 무거웠다. 책날개 도서와 함께 신입생으로서 첫 학기를 맞이하게 된 전국의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들에게 축하를 보낸다. 아무쪼록 자유롭고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책읽기의 큰 즐거움을 깨닫는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책은 우리에게 날개가 되어 주지만 우리의 풍부한 상상은 어떤 무거운 책도 훨훨 날게 할 수 있다.
심사위원 : 강승숙, 김지은(총평 정리), 유영진, 이동림, 황정원
★ 정리: 김지은(아동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