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7일 토요일,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강당에서 '어린이 독서문화에 대한 진단과 모색'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심포지엄은 KBS한국어진흥원이 추진했던 'KBS어린이독서왕대회'에서 드러난 문제들을 돌아보고, 책 읽는 문화의 형성을 위해 힘써온 각계의 경험과 인식을 교류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웹진 나비는 발제자인 김상욱 교수의 글을 게재하여 공유함으로써 어린이 독서문화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 바람직한 어린이 독서문화를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Ⅰ.
독서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그 논쟁은 언제나 독서를 둘러싼 근본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논쟁이라기보다 부정적인 양상을 저지하고자 하는 가운데 촉발되고는 한다. 독서인증제를 들고 나온 독서새물결이 그러하며, 교과부나 교육청의 독서교육정책이 그러했다. 안타까운 노릇이다. 새로운 독서문화의 창출을 위해 진력해야 할 단체와 자원들이 그릇된 문화적 도발을 막는 데에 땀과 눈물을 낭비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문제의 중차대함을 알고 모든 관련 주체들이 장인이 한 땀 한 땀 옷을 깁듯, 판을 새로 짜는 일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물론 다시금 문제를 공공연하게 끌어낸 것은 ‘KBS 독서왕’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른바 매체의 힘을 이용하여, 가수를 뽑고, 춤꾼을 뽑고, 락밴드를 뽑고, 모델을 뽑고, 미인을 뽑고, 퀴즈왕을 뽑는데, 우리말의 달인을 뽑는데, 독서왕이라고 어디 뽑지 못하란 법이 있겠는가? 더욱이 가수는 노래를, 퀴즈는 상식을, 춤꾼은 춤을 척도로 삼는다. 특정한 능력을 시험대에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독서는? 독서라면 적어도 특정한 능력을 넘어서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아주 광범위한 활동이지 않은가? 대부분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 서바이벌 혹은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면, 어린이 청소년뿐만 아니라 이 아이들의 부모들까지 한꺼번에 텔레비전 앞으로 불러모을 수 있지 않겠는가. 불러 모으기만 한다면, 프로그램의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일 것이다. 이즈음 되면 어찌 이런 황금알을 낳는 발상을 지금까지 하지 않았는지 의아할 지경이다.
그런데 사실 속내를 뜯어보면, 하지 못한 저간의 사정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다. 우선 일차적으로 어떤 능력을 평가할지가 모호하다. 책을 읽는 것만을 문제 삼는다면 다독왕을 뽑으면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또 심심하다. 그 많은 양의 책을 정말 읽었는지, 나아가 제대로 읽었는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양과 함께 질을 담보해야만 한다. 그런데 독서량이 아니라면, 독서의 질, 심층적인 독서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결국은 암기력을 평가하고, 말하는 능력을 평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은 그동안의 읽기교육이 맞닥뜨리고 있는 난제이기도 하다. 읽기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평가하는 도구는 어쩔 수 없이 표현으로 드러나는, 말하기와 쓰기라는 도구밖에 없기 때문이다. 읽기 능력 그 자체만을 떼어놓고 평가할 수가 없다. 읽기를 통한 이해가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전문가들은 포토폴리오라는 누적적인 과정을 갈무리함으로써 진전의 과정을 평가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물론 국어교육의 경우라면 읽기와 쓰기를 모두 포괄하기에 쓰기를 통해 읽기를 동시에 평가할 정당성은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읽기 평가는 선다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읽기가 아닌 암기력이나 지적 능력일 뿐 공감적 읽기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어쩔 수 없다. 독서왕을 뽑기 위해서는 독서를 통한 전면적인 삶의 마주침을 버리는 대신, 객관식 선다형이나 단답식으로 해야 한다. 독서와 평가는 이처럼 ‘동그란 세모’와 같이 형용 모순인 셈이다.
그런데 또 문제가 불쑥 튀어나온다. 어떤 책을 대상으로 평가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이 명확하게 구분되기에 분명 객관성에 또 어긋난다. 특정한 책을 읽은 사람만이 독서왕이 되고, 읽지 않은 사람은 독서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모두가 읽지 않은 책이라면 애초 독서왕을 뽑을 수도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결국 책을 미리 선정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럼 어떻게 선정할까? 서울대가 뽑은 고전백선? 너무 어렵다. 그 백 권의 책 중 제대로 읽은 책이 독서에 관한 발표를 하는 필자조차 변변히 없을 지경이다. 그 백 권의 목록은 아마도 자신들의 지적 세계가 얼마나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있으며, 너무나 고상한 나머지 일반인들은 범접할 수도 없는 존재들임을 입증하기 위한 시위쯤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누가 책을 선정하게 할 것인가? 전문가들? 어린이, 청소년책의 전문가들? 그런데 이들 전문가들은 정말 천차만별이며, 고집이 센 나머지 줄을 세우기가 개미들 줄 세우기보다 어렵다. 심지어 제대로 된 전문가라면 의당 선정한다는 것 자체를 고까운 시선으로 보며 거부한다. 열 권의 책 가운데 더 좋은 책 한 권을 가려 뽑을 수는 있다. 그러나 수 많은 책의 바다에서 진주 같이 반짝이는 책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쯤 되면 정상적인 취지나 의미가 무색해지고 퇴색되기 시작한다. 책을 선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면 굳이 모두에게 좋은 책은 허상이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그저 모두에게 나쁘지 않은 책이면 되지 않을까? 책인데 설마 나쁘기까지 하랴. 더욱이 목표가 책 그 자체가 아니라, 왕을 뽑는 것이니, 책이 어떤 책이든 무슨 상관이랴. 하겠다는 출판사의 하겠다는 책을 대상으로 적당히 선정하자. 중학년 20권, 고학년 20권이면 적절할 것이다. 대회 운영에 비용이 필요하니, 책값의 납품가를 대폭 낮추자. 통상 출고가격이 65%니 유통마진을 생각해서 45% 정도로 납품을 받자. 또 참여자들이 한 권씩 구매하기 번거러울 테니……. 진행 주최는? 교육청이 제일 만만하지. 방송이라면 맨발로 달려오겠지. 그리고 교육적인 것만큼 모호한 게 또 어디 있겠어. 백년지대계라 당장 알 수도 없잖아. 대신 당근으로 상을 팡팡 주자. 참가하면 가산점도 주고. 무엇보다 대학입시와 연결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
결국 일사천리로 일은 진행되고, 뒤늦게 비판적인 목소리가 들려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논리를 들이대며, 형식적으로 할 테니 눈 감아 달라고 말한다. 책을 이미 구매한 사람들 때문에 대회를 철회할 수 없다는,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것으로 몰아가며, ‘당신네들이 배상해주겠냐’는 겁박을 끼워넣는다. 그 결과 가운데 지금도 단위 학교, 일선 교육청은 대회를 착착 준비하며 결전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책은 계속해서 세트로 팔려나가고. 참담하다. 애초 한국방송공사는 준조세에 가까운 시청료로 운영된다. 그 산하의 언어교육원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며, 본연의 역할은 방송 언어의 질적 제고를 도모하는 것일 터이다. 현재의 독서문화가 먼눈으로 보기에도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제 일을 밀쳐두고 이렇게 나섰을까 가상하기도 하다. 그러나 첫단추가 잘못되었기에, 아니면 너무나 제대로 끼워졌기에 사태는 이다지 참담하게 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 동어반복에 그치고 말겠지만, 읽는다는 것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다시금 살필 수밖에 없겠다. 근본으로 되돌아가 묻고 답하는 것. 그것이 집의 터를 바로잡는 일의 비롯됨이고 주춧돌을 세우기 전에 할 일이기 때문이다.
II.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글자를 읽다’, ‘책을 읽다’, ‘마음을 읽다’, ‘행간을 읽다’ 등 다양한 뜻으로 활용된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활자나 활자로 이루어진 책을 읽는 것과 ‘마음을 읽다’에서처럼 헤아리는 것이 주요한 의미로 부각되고 있다. 그저 단순히 소리내어 읽는 것을 넘어 기표 너머의 기의를 읽는다는 의미의 이해와 기표와 기의의 관계 속에서 지시대상까지 포함하는 추론적인 읽기를 포괄하는 쓰임이다. 이 모든 것이 읽기의 원래 의미인 셈이다.
읽기가 전통적으로 경전의 읽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서양에서 플라톤의 <대화>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기록한 것이었으며, 성서는 하느님과 예수의 언행과 행적을 기록한 것이었다. 동양의 사서삼경 역시 공자를 비롯한 선철들이 남긴 경전으로 추앙되었으며, 읽는다는 것 자체에 신비로운 세계의 해석, 해석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하는 위력으로 작동하였다. 따라서 읽기는 아주 오랫동안 소수의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이 위력이 대중적인 읽기로 전환되는 것은 루터를 비롯한 청교도 운동이 성서를 개별적인 읽기로 바꾸어낸 다음부터였다. 여기에 덧붙여 <천로역정>이나 <신곡> 등 개인의 새로운 읽기물들이 출현하고, 급기야는 <돈키호테>를 비롯한 세속적인 읽기물이 가세함으로써 읽는 독자의 편폭은 넓어지게 된다. 나아가 자본주의의 융성과 더불어 신문, 잡지 등 정보 위주의 읽기물 역시 급속히 대중화되며, 지금에 이르게 된다. 결국 읽기는 깨달음, 즐거움, 앎 등의 요소들을 두루 포괄하며 진전되어 온 셈이다.
읽기의 본질 역시 다채롭게 진전되어 왔다. 읽기 연구는 초기 읽기를 소쉬르적인 언어학에 기대어 기표와 기의라는 관점으로 파악했다. 상징적인 대체물로서의 단어를 그 단어가 감싸 안고 있는 기의를 읽어내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 단순한 이원적 도식은 소쉬르가 과학으로서의 언어학을 정초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근대적인 읽기는 이 단순한 모형에 기반하여 읽기를 모색하였다. 이는 마치 의미가 텍스트 속에 내재되어 있으며, 읽기는 잠복된 진실을 파헤쳐 드러내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성서 읽기나 경전 읽기와 동일한 읽기의 양상이다. 의미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읽기의 주체는 그 객관적 의미의 수동적인 해독자로 남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읽기의 모형이 현실적이지 않음은 소쉬르 이후 수 많은 탐구들이 입증한 바 있다. 예컨대 언어의 의미 작용을 문제 삼고자 한다면, 곧 명명을 넘어 의미에 육박해 가고자 한다면, 언어의 의미는 단순히 기표와 기의의 관계만으로는 부족하다. 곧 기표와 기의가 바탕에 두고 있는 현실, 곧 지시대상에 덧붙여 그 의미의 진리치를 해명하고자 하는 해석 주체를 설정할 수밖에 없다. 언어는 투명한 유리그릇이 아니라, 언제나 해석을 기다리는 역동적인 유동체라는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의미의 읽기는 단순히 기표를 기의로 대체하는 것을 넘어 주체의 능동적인 무한한 해석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정초된다. 읽기는 읽는 주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수용미학이나 독자반응이론, 푸코나 데리다를 비롯한 후기구조주의론 등 다양한 이론적 입각점들이 의미의 객관성, 독립성, 절대성을 근저에서부터 흔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의미의 객관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 또한 계속된다. 맑스주의 인식론이나 피쉬의 ‘해석공동체’,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성’ 등의 개념적 범주들은 그 흔들림 속에서도 진리를 보증하고자 하는 일단의 노력들이다. 그리고 도대체가 객관성이란 존재하기나 한가 질문을 던지며 상대성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의미가 텍스트와 독자의 거래적 관계를 통해 형성될 뿐이라는 구성적 관점이 전면에 등장하기도 한다. 읽기는 객관적인 의미를 읽는다기보다 주체가 자신의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의미를 구성해가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항상적으로 빈틈을 남겨두고 있다는 점에서 구성적 측면은 한층 더 강화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최근의 읽기 연구는 이 의미의 구성적 과정이 단순히 개인적, 심리적 차이뿐만 아니라, 인종, 성, 계급, 문화 등의 사회적 변인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실천, 문화적 실천으로서 인식하는 관점이 확산되어 가고 있다. 텍스트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잠정적으로 확정하는 과정 속에 텍스트 자체도 일정한 이데올로기적 지형의 바탕 위에 구성되어 있으며, 읽기 또한 이 이데올로기에 동의 혹은 부정이란 스펙트럼 속에 주체의 위치를 설정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 주체가 의당 사회적, 정치적 주체이며, 문화적 주체임은 명확하다.
이들 읽기의 본질과 읽기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는 독서를 보는 관점 역시 변모시킨다. 독서는 단순히 책에 담긴 지혜, 지식, 즐거움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니라, 한층 능동적인 실천이다. 능동적인 개입과 관여 없이 책은 다만 지식, 정보, 즐거움 등과 무관한 물리적 실체로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책과의 만남은 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마주침을 통해 감추어진 빛을 내뿜을 따름이다. 주어진 것을 수동적으로 수용하거나, 소극적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는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며, 읽기의 본질에 비추어보아도 터무니없다.
읽기의 능동적인 자발성이란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책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은 읽기의 본질을 현저히 침해한다. 물론 앞선 독자들이 뒤따르는 독자를 위해 책을 권고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또한 호기심과 기대를, 앎에 대한 욕구를 촉발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그 어떤 연유에서든 읽어야만 한다는 강제가 수반되는 한, 자발적인 문화적 실천은 실종되고 말 것이다. 모름지기 ‘나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라는 읽기 전의 욕망을 재조정하는 것, 동기를 갖는 것만이 독서와 독서교육의 출발선에서 독자가 갖추어야 할 전제이지, 그 동기와 욕망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를 정해진 책들을 통해 지도를 제시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더욱이 그 지도가 방향조차 알 수 없는, 표지판까지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는 지도라면, 전도가, 본말이 뒤집힌 것이 아닐 수 없다.
Ⅲ.
독서 활동의 본질이 문화적 실천이라면, 그 문화적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는 독서의 과정은 어떠할까? 그 과정은 전적으로 특정한 방법에 의해 규정되기보다 쉼 없는 자유분방한 사고가 필수적이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독서 과정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텔레비전을 비롯한 영상물과 책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빚어진다. 영상은 쉼없이 화면을 쏟아내고, 시청자는 그 화면을 받아들이기에 급급하다. 기껏 끝나고 나서 생각할 법 하면 또 다시 더 재미있는 광고를 쏟아낸다. 시청자의 역할은 그만큼 수동적이다. 텔레비전에 비할 때, 그나마 만화가 한층 더 생각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낫다. 만화는 적어도 페이지를 넘겨야 하는 수공업적인 노동을 요구한다. 더욱이 칸과 칸 사이의 틈은 곧 사고가 끼어들 틈이기도 하다. 이에 비할 때 책은 더 많은 개입, 더 많은 사고를 가능하게 만든다. 읽기 전과 읽기 중에 끝없이 주체의 목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매체가 책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어떻게 책을 읽나 생각해 본다. 요즘 내가 보는 책은 밥벌이로 읽는 딱딱한 책을 빼면, 주로 동화를 읽고, 시를 읽고, 또 몇몇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책들을 손에 잡히는대로 읽는다. 동화나 시는 사실 평론가입네 하는 직함 때문에 분석하고 평가하면서 읽기도 하지만, 이런 책들도 처음 읽을 때는 그저 소박한 독자로서 읽는다.
손에 잡히는 시집을 한 권 읽어보기로 한다. 그냥 손 가까이에 닿는 시집. 이면우의 시집이다. 제목이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라고 되어 있다. 그렇겠다고 생각한다. 이 지구상의 인구가 지금 몇 명이던가? 옛날 인구에 사람들이 예민했던 시절에 40억인가 50억인가 했으니, 지금은 더 늘었을 게다. 우리나라 인구는 줄고 있다지만, 그래도 아프리카나 인도에서는 아직도 ‘산 입에 거미줄 치랴’하며, 계속 낳고 있을 테니까. 게다가 시집의 ‘아무도’가 꼭 사람만 지칭한다는 법도 없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존재가 이 지구상에 있을까? 모르겠다.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어딘가에는 누군가가 밤에 울고 있으리라. 밤에는 또 사람들 감정이 조금은 헤퍼진다. 그러니 울고 있을 확률이 낮보다 더 많으리라.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지. 밤늦도록 연애편지를 쓰고 아침에 일어나 다시 보았을 때. 그 낯 뜨거움이라니. 그래도 꼭 밤에는, 이 편지를 읽기만 한다면 한 여자가 내 진심을 알아줄 것 같았고, 이제 편지를 부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어느 날인가는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긴 적도 있었다. 환한 낮에 편지를 다시 읽고 구겨버리기 전에, 밤에 흥분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바로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어 버린 적이 있었다. 그 다음 날 오전 내내 나는 우체통 옆에 지키고 앉아 아저씨가 편지를 수거해 가기만을 기다렸고, 내가 부친 그 편지를 되찾아 왔다. 아,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맞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밤이 평화로우면 세상 모두가 평화로운 듯이 알고 있다. 자기의 척도로만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시인은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시집 전체로 말하고 싶은 것일 게다. 타자의 고통에 관해. 원래 시인이란 사람들은 그렇다. 고통에 민감하다. 제목이 약간 선정적이기는 하지만, 시집 제목으로는 괜찮다 싶다. 목차를 훑어 본다. ‘봄밤’이란 깜찍한 제목이 있다. 쪽수를 찾아 펼친다. 그곳에 이런 시가 있다.
봄밤
늦은 밤 아이가 현관 자물통을 거듭 확인한다
가져갈 게 없으니 우리집엔 도둑이 오지않는다고 말해주자
아이 눈 동그래지며, 엄마가 계시잖아요 한다
그래 그렇구나, 하는 데까지 삼 초쯤 뒤 아이 엄마를 보니
얼굴에 붉은 꽃, 소리 없이 지나가는 중이다
아, 좋다. 좋은 시다. ‘엄마가 계시잖아요’ 하는 아이의 말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 듯 하다. 금새 붉게 물드는 엄마 얼굴도 봄날 꽃처럼 환하게 보인다. 그런데 둘이나 되는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이쁜 말을 왜 한 번도 내게 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나도 이런 시 한 편은 쓸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시인이 못 된 것은 내 재능 탓이 아니고, 바로 함께 사는 이 녀석들 때문이닷! 내일 마누라 읽어줘야지. 근데 이 시인은 누구지? 누군데 이렇게 말간 시를 쓰지. 이면우라. 찾아보니 대전에서 보일러공으로 일한단다. 술은 한 잔도 입에 안 대고. 멋지다. 일이 힘들텐데. 일 끝나고 쐬주 한 잔 마시면 기분 좋을 텐데. 이 시답잖은 글을 쓰면서도 나는 술 생각이 간절한데. 아무래도 나와는 씨앗이 다른 사람인가 보다. 그러니 시를 쓰지.
여기까지가 나의 시집 읽기이다. 여기에도 방법이 있었던가? 그냥 읽었다. 읽으면서 생각을 했다. 그렇다. 책 읽기에도 방법이 있다. 정말 중요한 방법. 그것은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다. 단숨에 휘리릭 읽지 않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 뭘 생각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책 읽기의 방법이다. 읽기 전에 생각하고, 읽으면서 생각하고, 읽고 나서 생각하는 것. 잠깐 머물러서 생각하는 것. 아니 생각이 꼬리를 물면 계속 계속 혼자만의 생각을 이어가는 것. 그도 아니라면 책을 아예 덮어두고 생각만 이어가는 것. 그것이 책읽기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의 생각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으로 규정하려고 하는 시도들은 무조건 반문화적이다. 평가가 그것이다. 평가란 모름지기 앞서 언급한대로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컨대 이 시를 쓴 시인의 직업은?, 주량은? 뭐 이런 질문은 하지 않겠지만, 이 시를 쓴 시인은 누구인가? 묻는 순간 우리는 이면우를 외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해 보는 것이 아니고, 암기해야 한다. 그 순간 자유분방한 사고는 설 자리를 잃고 만다. 독서 퀴즈 대회가 그렇고, 한국방송의 독서왕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질문에 답하기 위한 독서는 결코 올바른 독서의 방법을 준용하지 못하게 만든다. 분방한 사고가 독서의 본질일 터인데, 시험은, 평가는 독서의 과정 자체를 제약하고 왜곡한다. 책을 읽는 동안 아무도 내 사고의 방향을 조정할 수 없다. 그 순간 독서는 생애의 독자를 길러낸다는 목적과는 달리 유용성으로서의 읽기로 전락한다. 스스로 설정하는 목적이 아닌 한, 유용성으로서의 독서는 쓸모 있는 일이 되고 만다. 독서의 쓸모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쓸모여야만 한다.
Ⅳ.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읽기, 독서 방법으로서의 사유 등 독서의 본질을 생각할 때, 독서와 교육은 나란히 이어붙이기가 결코 쉽지 않은 일들이다. 독서를 교육의 틀 안에 가두는 한, 교육의 논리가 적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독서가 우리 앞의 생에 놓인 거울이자 빛이라고 한다면, 교육을 하지 말란 법도 없다. 여전히 어린이와 청소년은 수많은 경험들을 통해 성장해야 하며, 독서는 경험을 건네는 유효한 방법임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교육 또한 필요에 따라 선정되는 것이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고형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달리기를 가르치는 것이나 수영을 가르치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 독서는 정해진 절차를 단순 반복해서 익힐 수 있는 기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독서는 사회나 과학 같은 지식을 얻는 활동과도 역시 달라야 한다. 독서는 방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적 가능성을 열어두되 한층 섬세하게 접근해야 한다.
교육적 가능성은 먼저 독서를 공교육의 교육과정 속에 안착시켜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교육을 할 경우, 그나마 가장 안전한 통로는 공교육이다. 학교를 떠나 이루어지는 교육은 아무래도 상업적인 이해와 얽혀들지 않을 수 없으며, 상업적인 논리가 앞설 경우 독서와 교육의 결합은 교육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폭력이 되기 십상이다. 논술을 위한 독서교육이나 경쟁 체제 속에서 왕을 뽑는 것은 결코 교육적이지 않으며, 독서의 본질과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다.
교육과정 속에 독서가 들어서는 방법은 독서라는 특화된 교과일 수도, 국어과의 하위 영역 속의 교과일 수도, 아니면 저마다의 교과들이 필요로 하는 독서일 수도 있다. 다만 특화된 교과이든 교과 속에서의 독서이든 중요한 것은 전적으로 교사와 학생의 직접적인 소통 속에서 책이 선정되며, 활동이 제시되고,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학생과 직접적인 면식이 없는 교육청이, 개별적인 학생들의 요구를 알지 못하는 학교 행정이 독서에 개입하는 순간, 문화적 활동으로서의 독서가 갖는 자율성은 그만큼 훼손되게 된다. 독서교육은 오직 교과의 필요에 의해 교사의 오랜 경험과 성찰, 교육과정 속의 적절한 자리매김, 그 과정을 온전히 체현할 수 있는 책의 선정 등을 통해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 중간의 섬세한 매개를 생략한 채, 독서가 수직으로 내리꽂힐 경우 독서는 인간 정신의 자유로운 성장을 위한 촉매가 아닌 정신을 가두고 제약하는 족쇄로 작동할 것이다.
몇해 전 서울시교육청은 교과독서를 위해 기본도서와 참고도서를 설정하고, 각 도서를 통해 습득해야 할 지식이 무엇인지를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단위 학교의 교실, 학습자와 유리된 채, 관료들이 책상 위에서 그려본 지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당연히 숱한 문제를 야기하였으며, 결국 폐기되고 말았다. 교육 당국은 지금이라도 외부에서 독서를 강제하려는 기획 대신 독서교육의 전문가들을 진작하고 장려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데에 힘써야 한다. 교사들이 혹은 사서들이 눈앞에 있는 어린이, 청소년과 함께 책을 읽으며 소통하지 않는 한, 독서교육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결국 독서교육은 교사들과 학부모들에게 맡겨두고 정책 당국은 독서 환경의 개선을 위해 진력을 다하는 것이 본연의 역할을 하는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좋은 책을 기획하고, 발굴하고, 보급하며, 향유할 수 있도록 자원을 조직하고, 배치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섣불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을 버려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음을 자각하고, 언제 어디에서라도 목마른 이들이 스스로 우물을 파지 않아도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더 나아가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면 책을 읽게 만들까가 아니라, 왜 책을 읽지 않을까에 더 많은 공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