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12일, 문학과지성사가 창립 40주년을 맞았습니다. 출판사의 모태인 계간지 『문학과지성』의 창간으로는 45주년이 됩니다. 이를 기념하여 지난 22일 서울 마포구 문학과지성사 사옥에서 문지를 창간한 1세대 편집동인 중 한 명인 문학평론가 김병익(79) 씨를 모시고 ‘웹진 나비’의 안찬수 주간이 대담을 나누었습니다. 두 사람이 나눈 대담을 정리하여 싣습니다. (편집자주)
안찬수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처장, 시인)
문학과지성사가 최근 창립 40주년, 계간지로는 창간 45주년을 맞았습니다. 고교 시절 문예반 선생님 댁에 가면 잡지 『문학과지성』의 동그란 표지가 그렇게 인상 깊을 수 없었습니다. 편집은 자유롭고 격조가 있었지요. 김현 선생님을 포함하여 선생님과 같은 한글세대의 문장도 저희 문청한테는 굉장한 영향이 있었고요. 그 느낌을 지금은 다른 책에서는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편집과 발상이 가능했을까요?
김병익 (문학과지성사 1세대 편집동인, 문학평론가)
계간지가 창간된 1970년은 해방 후 한 세대 가량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일제의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한국전쟁의 혼란을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은 당시 한글세대가 품어온 시대정신이었지요. 정치적으로는 4․19 혁명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나 민주화만이 아니라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기였으니 한글세대가 기성사회로 막 진입하면서 어떻게 해방 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여 새로운 국가 사회 체제를 만들어갈 것인가, 어떻게 우리 사회의 문화적․지적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것이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중반까지 당대의 시대상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전근대에서 근대로, 한자세대에서 한글세대의 문학으로 넘어가는 기로에서 기존 『사상계』의 계몽주의적 성격과 『신동아』의 대중적 저널리즘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잡지 형태가 요구되었고, 그것이 계간지의 출현과 한글전용, 가로쓰기의 길로 이어지게 된 것이지요. 내용적으로는 유신 시절 반공주의가 압박하던 풍토에서 그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진보 이론에 대한 고민이 『창작과비평』을 통해 제기되고 『문학과지성』을 통해 확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문지로서는 창비라는 선배가 있었고, 창비를 포함해서 문지가 한글세대였기 때문에 말씀하신 편집이나 발상이 가능했겠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안 선생께서 기억하신 표지는 창간 10주년 복각본 「해제를 위한 회고」란 글에 쓰기도 했지만 김승옥 씨가 만든 것입니다. 전체적 윤곽은 똑같이 하되 계절에 따라 색만 달리 했었지요.
안찬수
최근에 내신 비평집에서 세로쓰기와 가로쓰기 문제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신 게 있어요. 문지가 창간된 1970년에는 전반적으로 세로쓰기였단 말이죠. 한겨레신문이 창간된 1988년만 해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여전히 세로쓰기를 고수하고 있는데 신문으로서 처음 한겨레가 가로쓰기를 도입한 거였어요. 심도 있는 토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가로쓰기가 일반화된 겁니다. 단순히 문체나 편집 체제만 변화한 것이 아니라 수면 밑에서 이루어지던 문화적 고민들이 형식의 변화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충분히 의식되지 않았던 게 아닌가. 가로쓰기의 역사로 보면 문지와 창비 두 잡지가 큰 역할을 했지요.
김병익
저도 그 점에 주목해서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그렇게 급격히 바뀌었는지 따져봤지만 정확한 계기나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1970년대 세로쓰기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창비가 먼저 가로쓰기를 시작했고, 문지로서는 그 체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거든요. 두 계간지에 이어 『세계의 문학』『뿌리깊은 나무』 등 몇몇 잡지들이 뒤따르기 시작했어도 신문이고 일반 단행본이고 전부 세로쓰기가 일반적이었단 말입니다. 문지의 경우도 초기에 잡지는 가로쓰기하면서, 단행본은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를 함께했지요. 단행본 중 인문사회학 도서와 비평집은 가로쓰기를 하면서 소설은 세로쓰기를 했어요.
안찬수
이반 일리치가 어느 저서에서 아주 근원적인 은유라는 의미로 ‘뿌리 은유root metaphor’라는 말을 쓰더군요. 사람이 어떤 존재냐고 물었을 때 “사람은 책이다.”에서 “아니다. 사람은 컴퓨터다.”로 바뀌는 식으로 시대마다 뿌리 은유가 바뀐다고 합니다. 가로쓰기와 세로쓰기의 문제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 문화의 지향 혹은 근원이 한자문명권에서 영미권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으로 옮겨 간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일본은 지금도 세로쓰기로 한자를 혼용하고 있지요. 그런 세계가 한쪽에서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김병익
공감합니다. 한글은 탄생 시점부터 세로쓰기가 원칙이었다는 설명으로 세로쓰기를 주장하시는 열화당 이기웅 선생 같은 분도 계시고 사실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서구식 가로쓰기라는 한글세대 문화의 양상적 변화가 컴퓨터 문화라는 시대적 변화와 어떻게 그렇게 적절히 들어맞을 수 있었을까,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한자문명권에 관하여 말씀하셨는데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넘어갈 때 한자 표기도 저절로 없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거의 사라지는 쪽으로 변화가 이루어졌거든요. 젊은 시절부터 한글전용주의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50년대에 한글전용을 주장하셨다가 국회의 맹렬한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었지요. 대통령의 권고에도 변하지 않던 한자 폐지가 가로쓰기로 바뀌면서 저절로 정착이 되었단 말입니다. 이 점에서는 창비와 문지의 기여도 크겠지만 『뿌리깊은 나무』의 공헌을 크게 봅니다. 문체 자체를 한글 문체로 바꾸었거든요. 가령, 이청준만 하더라도 4․19세대고 한글로 글을 쓰긴 했지만 문자에 한자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도시 지식인의 고민을 다루던 전기 작품에서 고향을 무대로 하는 후기 작품으로 가면 문체 자체가 전부 바뀝니다. 한글세대가 단순히 표기만 한글로 바꾼 게 아니라 문체 자체를 한글로 바꾸었다는 거지요.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한자문명권의 여러 동양 국가들이 문자 변화를 일으키거든요. 일본은 가타카나와 히라가나에 한문을 혼용하고 있고, 베트남에서는 로마자를 도입하여 성조를 표시하는 복잡한 체제를 쓰고 있고, 몽골은 키릴 문자로 바뀌었고, 중국은 중국대로 간자체에 백화 문체로 바뀌는데 한국은 한글전용으로 바뀌었습니다. 20세기 각 나라마다 문자 체제가 바뀐 이후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국제적으로 비교해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심포지엄이 되지 않을까요.
안찬수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일본의 망가manga(만화)가 왜 그렇게 많은 독자층을 가지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에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그리고 한자의 혼용과 연관된다고 설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화는 시각적 메시지가 있고 말풍선을 달아 텍스트도 넣지 않습니까? 뇌에서 만화를 받아들일 때의 작동구조가 히라가나·가타카나 그리고 한자의 혼용체에 대한 수용 구조와 같다는 거예요. 그럴 수 있겠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김병익
우리말에는 ‘그녀’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녀’라는 말은 일본말 ‘彼女’의 번역어로 김동인이 처음 쓴 말입니다. 황석영의 소설에는 ‘그 여자’라는 말이 나오지요. 황순원은 ‘그네’, 윤흥길은 ‘그니’라고 썼고요. 그리고는 과연 이 ‘彼’라는 말의 번역어로 ‘그녀’가 좋으냐, ‘그 여자’가 좋으냐 문인들 사이에서 앙케트를 한 적이 있었어요. 지금은 거의 다 ‘그녀’로 안착이 되었는데 이런 언어적 변화가 일본에도 있었습니다. 동양에는 원래 ‘연애戀愛’라는 말이 없답니다. 청춘남녀 간 사랑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없었던 건데, 용어만 없었던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런 관계가 거의 성립이 안됐던 거지요. 그래서 'love'라는 말을 뭐라고 번역할 것인지 당시 일본의 번역인, 학자, 출판인들이 상당히 고민을 했던 모양이에요. 그러다 한 출판사에서 부부간의 상열지사를 의미하는 ‘연戀’ 자에 부모 자식 간 사랑을 의미하는 ‘애愛’ 자를 붙인 말을 썼는데 그게 확 퍼져 일반화가 됐답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초기에 한자 용어를 빌려 온 곳은 중국이었거든요. 이를테면 ‘기하학幾何學’이란 말을 중국인들이 번역했다는 것 아니에요? 이후에는 근대로 걸음을 바삐 내딛던 일본에서 번역어를 만들기 시작했고요. ‘자유’도 그렇고 ‘민주주의’도 그렇고 한자어로 번역된 다음에 각국의 정치체제로 정립되었으니 언어가 먼저 생기고 나서 실체가 생겨난 거지요. 동양에는 없던 사회․정치 현상들이 언어의 번역을 통해 실체를 갖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주 재미난 현상입니다.
안찬수
우리가 사용하는 근대용어의 상당 부분이 메이지 유신기 일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지요. 철학자 니시 아마네西周(1829~1897)를 중심으로 하는 ‘메이로쿠샤’明六社가 만든 기관지 『메이로쿠잣시』明六雜誌를 통해 서양의 사상을 수입하고 소개하면서 정치, 경제, 과학, 사회 등의 용어를 번역했고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말에는 그것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병익
그렇다대요. 일본은 서구 문화를 어떻게 자기 언어로 만들어낼 것인가 고민했기 때문에 빨리 선진화될 수 있었고, 우리나라는 유학생을 통해 일본말을 고민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문화적 선진화가 늦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찬수
고민의 심도가 달랐던 거지요. 언어와 실체에 대해서는 저도 좀 더 탐구해보겠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40년이라는 게 짧은 세월이 아니잖습니까. 올해 우리나라가 광복 70주년을 맞았는데 절반 이상의 세월이지요. 그 세월을 ‘문학과지성’에 헌신하셨는데 소회가 남다르지 않으실까? 한 말씀 남겨주시지요.
김병익
헌신이라고 그랬던가요? 솔직히 저는 구속이라고 표현합니다.(웃음) 문학과지성사의 대표, 발행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닌 게 40년이니 어떤 자리를 가든 간에 문학과지성이라는 말이 제 이름 앞에 관용어로 붙어 있어요. 제 삶의 초창기 이후 근 45년을 문학과지성에 매여 있어 왔고 그 덕분에 사회적 명예든 문화적 성취든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그 이름 속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닌가, 그 이름을 벗겨 낸다고 잘 될 일도 아니지만(웃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창립 40주년에 언론에서 보여주었던 관심과 지식인들의 축하에 과분한 인사를 받는다는 느낌도 들고요. 저 개인으로서는 일을 할 때 제 직장으로 여겨 일을 했고, 잡지나 책을 만들 때는 편집자로서 하고 싶은 바를 했습니다. 한국의 문화나 정신을 대변한다는 말은 감히 할 수 없고, 제가 맡은 바, 제가 해야 할 바를 저 나름 정성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나이 많은 덕을 본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함께 일한 김현, 황인철, 김치수 세 사람이 먼저 가서 그 덕분에 제가 공을 얻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마우면서도 실은 민망합니다.
안찬수
저희가 고맙지요. 후배 문학도와 출판인들에게, 그리고 풀뿌리 독서운동을 전개하는 활동가들에게 선생님의 영향이 적지 않습니다.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문학과지성 에꼴의 영향이 뚜렷이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성과를 꼽아주시겠습니까?
김병익
제 입으로 하긴 민망한 이야기고 다른 분들이 비판을 하든 칭찬을 하든, 저로서는 출판계 내적으로 자랑하고 싶은 일은 있습니다. 판권란에 판版과 쇄刷를 엄격하게 구별했다는 것과 인세제印稅制를 정착시켰다는 것은 출판계를 향해 자랑하고 싶은 내용인데 아무도 인정을 안 해주는 것 같아요.(웃음) 당시 전집류, 외판에 의한 전집류 시장이었기 때문에 거의 원고료로 지급이 됐고, 단행본이 나올 때에도 원고료 매절로 지급됐었습니다. 번역서에는 인세가 적용되지 않은데다 판․쇄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인세를 준다고 해도 저자들이 출판사를 불신해 항의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고요. 문지가 『주말여행』이니 『겨울여자』의 인세를 10%로 정하기까지 내부적으로도 논란이 있었지만 우리도 저자인데 우리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인세를 10%로 정착시켜야 하지 않겠느냐 했던 것이 모든 출판사의 인세 10%로 정착이 된 것 같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광장』의 경우는 인세를 12%로 올렸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자의 기여가 많을 경우 인세를 올리고, 출판사의 노력이 더 필요할 경우 인세를 내리는 식으로 유연하게 조정했어야 했는데 그 시절에는 여유가 없어 일률적으로 정착시켰습니다.
안찬수
잡지나 책에 관한 자랑거리도 한 말씀 해주시지요.
김병익
자화자찬하자면 잡지든 출판사의 책이든 저 자신의 책이든 간에 문지는 판금된 책이 한 권도 없습니다. 창비의 책은 여러 권 판금 되었지요? 물론 글의 성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문지의 책은 제가 직접 원고 교정을 보면서 당시 삼엄한 유신정권의 검열을 피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저도 한두 번 기관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무언가 비판적 의도를 시사하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꼬투리 잡기는 어려웠다지요. 그 점에서는 제가 상당히 민감하게 대응했던 것 같습니다.
안찬수
그건 다른 분보다 김병익 선생님의 공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신문사에서 저널리즘 일을 해오셨기 때문에 감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정문길 선생의 『소외론 연구』도 창비에서 나왔다면 문제가 됐을 수 있다고 인터뷰하신 걸 봤습니다.
김병익
그렇지요. 마르크스의 ‘마’ 자만 나와도 걸려들던 때라 막스 베버의 책도 공항에서 걸리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책의 맨 첫 장이 ‘마르크스의 소외 이론’이었어요. 본문은 손대고 싶지 않아 궁리 끝에 제목만 ‘1840년대의 소외 이론’으로 바꾸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위대한 책’이라고 번역된 부분도 고민 끝에 ‘마르크스의 문제적인 책’으로 의도적으로 오역하여 넘어간 적도 참 많았습니다. 소설가 한 분이 “창비와 달리 문지는 필화 한번 안 당하지 않았느냐?”라고 나무라는 식으로 말을 하기에 그 말을 들은 친구 하나가 “문지는 김 아무개가 모든 구절을 들여다보며 묘하게 피해서 그렇다.”고 했더니만 아무 소리 못하더랍니다.
안찬수
그랬군요. 문학과지성을 보면 출판이나 잡지를 편집위원들이 후대로, 후대로 이어가는 독특한 전통을 만들어가고 계신데요.
김병익
창업자의 신상에 따라 출판사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걸 흔히 봐왔습니다. 창업자가 아프거나 늙거나 죽으면 출판사도 그만큼 약해지거나 없어져 버리던가 하지요. 사주의 신변에 따라 출판물이 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또 새로운 세대의 발언은 새롭게 발언되고 수용되어야 한다는 개방적인 입장이라 1976년, 문지가 생긴 지 얼마 안 돼 ‘우리 네 사람 외에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자!’라고 했는데 김현도 그런 점에 공감을 해서 오생근, 김종철 씨를 끌어들였습니다. 문지가 폐간되던 1980년 말에는 동인들끼리 송년 엠티를 간 자리에서 한 해 동안 있던 이런저런 일들을 얘기하며 출판사가 명맥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논의를 했지요. 출판계가 좁으므로 우리나라 필자에 의한 직접적인 비판보다는 외국 지식인이나 사상가, 학자들의 글을 번역하여 그 글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비판하게 만들자는 논의로 시작하게 된 게 ‘현대의 지성’이란 시리즈였고요. 『문학과지성』은 폐간되지만 언젠가 때가 좋아져 복간하게 된다면 재창간 형식으로 생각하고 젊은 세대들에게 편집권을 넘기자, 편집권을 보장하기 위해 제호까지 바꾸자고 해서 80년대에 나온 게 무크지 『우리 세대의 문학』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문학』으로 이름을 바꾸며 매년 한 권씩 내다가 88년 『문학과사회』를 창간할 때 편집동인들도 이인성, 정과리, 홍정선 등 아랫세대로 바꾸었습니다. 이러한 체제를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인성 선생의 기획이 많이 녹아 있습니다. 잡지는 평균 10년에 한 번씩 바뀌었고 세대교체를 거듭해 어느덧 5세대 동인으로 넘어오게 되었네요. 그중 강동호 씨와 얼마 전 인터뷰를 같이 했어요. 당신 나이가 몇 살이냐 물었더니 문학과지성보다 어리대요. 잡지도 늙었고 그만큼 나도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김현이 작고하고, 이어 황인철 변호사가 3년 만에 작고하기에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개인회사 체제를 주식회사 체제로 바꾸고, 주주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저자들로 제한하여 주식 이전도 이사회의 동의를 받아야 가능하도록 했는데 매우 특이한 경우라고 그러대요?(웃음) 수평 이동이 아니라 수직 이동을 통해 아랫세대로 세대교체가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안찬수
올해 이른바 신경숙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한국의 주요 문학 출판사들은 대개 신경숙 씨와 연이 있지 않습니까? 신경숙 씨는 문지에서 『풍금이 있던 자리』(1993) 외 여러 권을 냈고, 문학동네에서 『깊은 슬픔』(1994)과 『외딴방』(1999) 등을, 창비에서 『오래 전 집을 떠날 때』(1996)와 『엄마를 부탁해』(2008)를 냈고요.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문학판과 한국의 대표 문학 출판사들의 면목이 이른바 신경숙 사태를 통해 드러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평적이면서도 세대로 이어지는 문학과지성사만의 독특한 전통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김병익
아주 작은 회사지만 기업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하게 봐야 된다고 생각하는 건 우리 사회에 가족 간의 승계만 있지 세대 간의 승계로는 거의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편집동인이라는 체제에는 한계가 많습니다. 문학적인 이념과 함께 우정이 있어야 하고 서로 자주 만나 협의해야 하므로 출판을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문지가 뒤지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지요. 하지만 어떤 책의 출판도 개인의 결정이 아닌 공동의 합의로 결정한다는 체제 덕분에 출판사의 사유화가 아니라 공유화가 가능하게 됩니다. 90년대 어느 때에 이어령 씨가 창비는 대통령중심제고 문지는 내각제라는 비유를 했어요. 이어령 선생다운 참 재미난 비유지요. 문지는 국내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유례가 없는 체제가 아닐까요? 발언권은 물론이고 주주가 죽으면 주식도 이사회에 반납하고 얼마 되지 않지만 액면가로 지급된 주식은 다음 세대로 이어져 세대 간 승계를 이룹니다.
안찬수
창비가 대통령중심제고, 문지가 내각제라면, 문학동네는 이원집정부제일까요?
김병익
군주제라고 할 수 있겠죠.(웃음)
안찬수
창비 같은 경우 백낙청 선생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출판사 내부 체제는 한국문학을 지탱하는 주요 출판사들에 큰 과제로 남을 것 같습니다. 잘 하고, 잘 못 하고를 떠나 문지의 동인 체제는 독특한 사례로 존재하겠지요.
김병익
편집동인 체제란 그 나름의 장점만큼 한계도 분명 갖고 있기에 출판계의 생태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좀 더 탄력적인 구성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얘기를 후배들보고 가끔 합니다. 또 초기의 동인 체제는 문학비평가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시야가 문학 쪽으로 집중돼 90년대 이후의 급격한 사회변화에 좀 둔감한 편이었거든요. 서구의 선진적 이론들을 앞서서 끌어들이긴 했지만 국내의 변화에 대해서는 둔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5세대 동인들은 나이도 다 30대 초중반이고, 문학 외에 다른 쪽도 두어 분 있고, 시야도 넓히고 관심도 다양해질 좋은 변화로 보입니다.
안찬수
문학과 지성, 문학과 사회… 이런 말을 보면, ‘문학’이라는 것이 문지의 중심기둥이 되어왔습니다.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문학주의’라는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문학 자체가 근대 민족국가nation state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앞에 여쭈었던 가로쓰기냐 세로쓰기냐 같은 문제가 근대 민족국가와 겹으로 놓여 있다고 했을 때 그 중간에 문학이라고 하는 ‘덩어리’가 놓입니다. 김현, 김치수 선생님, 황인철 변호사님이 계시던 때의 문학이란 무엇이었습니까? 현재 한국문학은 시장의 상품처럼 변해버린 면모가 있습니다. 사회변화에 문학이 갖고 있는 가치나 의미가 변해온 것도 있고요. 그런데 선생님께 문학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김병익
70년대는 행정은 있으나 정치가 없던 때였습니다. 국회는 그만큼 미약했고, 권력의 횡포는 강했습니다. 시대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겠지만 그때의 문학이란 언어적 상상력과 창작문학을 넘어서 현실에 대한 관심까지도 다 포괄했던 것 같습니다. 문지 복각본 목차를 보시면 소련 지성인 이야기와 프랑스 혁명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즘 잡지에는 서평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서평란을 보시면 이슬람 문화와 음악에 대한 내용도 있고요. 잡지가 당시 문화적 양상을 모두 안으려고 했거든요. 문학이 관심 둬야 할 분야의 폭이 그렇게 넓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 당시 정신세계 전반에 관한 관심을 ‘문학’이란 이름으로 표현했다고도 볼 수 있겠고요. 이번에 강동호 씨가 발표한 성명서에 '문학주의'란 말을 다시 쓰고 있더군요.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주의와 그대로 들어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포괄적 의미로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안찬수
흔히 세론에서 창비와 문지를 함께 거론하며 문지를 ‘문학주의적이다’라고 표현할 때는 사회적 관심을 포괄하고자 하기보다 언어적 상상력 쪽으로만 한정하려는 걸로 보입니다.
김병익
5세대 편집동인에서는 2,3세대 선배들 때보다 문학이라는 개념이 폭넓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70년대 시절만 하더라도 전통적인 문학, 엄격한 문학, 진지한 문학, 고급한 문학만 으레 문학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요즘 와서는 문학 자체도 아주 다양해지지 않았습니까? 대중문학과 고급문학의 정도만이 아니라 퀴어에 환상에 무협 등 장르 문학으로 다양해지기도 하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세계도 지적인 고뇌보다는 여행이든 요리든 시장 시속의 갖가지 문제를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문학 내면의 세계가 다양하고 넓어진 거지요. 그를 통해 현대 사회를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을지 기대를 가져봅니다. 그런데 어느 고급지든 서평이 가장 중심이거든요. 『뉴욕 리뷰 오브 북스』The New York Review of Books는 오직 서평으로만 이뤄진 잡지 아니에요? 문지도 서평을 중시해서 꽤 많은 서평을 실었는데 지금은 서평란이 없어졌어요. 서평이 없다는 건 우리 시대 지적 작업에 대한 리뷰가 없다는 얘기가 되는 거고, 한동안은 좌담을 통한 리뷰를 실었으나 좌담과 글은 또 다르거든요? 서평은 복원되었으면 합니다. 사회가 문화적으로 다양해지고 문화 간의 교류로 경계를 넘어서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면서 문화란 개념이 매우 복잡다단해지고 있어요. 넓은 의미의 문학주의란 이름으로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단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안찬수
재작년이던가, 제가 홍콩에 가서 도서관 몇 군데를 둘러보았는데 ‘기본법 도서관’이라고 있더라고요.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 중국에 반환된 홍콩은 체제가 다른데 중국 전체를 관장하는 헌법이 있으니 홍콩을 규율하는 헌법적 지위를 갖는 법을 기본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도서관이 우리나라 법학도서관 같은 도서관인데, 현관 입구에 자료 두 개가 전시되어 있어요. 하나는 아편전쟁으로 청이 홍콩을 영국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을 때 양측이 도장을 찍은 문서예요. 그게 청나라 사람들의 생각이었을까, 영국 사람들의 생각이었을까, 99년까지는 홍콩을 영국이 소유하되 100년이 지나면 홍콩을 중국에 돌려주라며 당사자들이 도장을 찍었어요. 그것과 나란히 백 년이 지나 덩샤오핑과 마거릿 대처가 도장을 찍은 홍콩 반환 문서를 전시해 놓았어요. 곰곰이 백 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했습니다. 백 년 전 도장 찍었던 사람들은 백 년 뒤의 시간이 온다고 생각했을까? 그 당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고, 청나라는 망해가는 나라였어요. 영국은 백 년 뒤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건가? 청나라는 백 년은 금방이라고 생각했던 건가? 그게 궁금했습니다. 한국은 워낙 압축성장을 해온 나라여서 그럴까요? 저희 세대가 활동하는 중에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장기 전망이에요. 문화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백 년 뒤에는 어떻게 될까 가늠이 안 되고요. 십 년 뒤도 안 보이는데요. 그런데 영국과 중국이 백 년 뒤를 위해 도장을 찍었어요. 문지와 반세기를 겪어오셨는데, 백 년 뒤는 어떻게 될까 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김병익 선생님께서 뿌리신 씨앗, 백 년 뒤에 싹 틀 씨앗은 무얼까요?
김병익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걸 느낀 적이 있어요. 1967년에 조지 오웰의 『1984』를 번역할 때 1984년은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어요. 17년 후일 뿐인데도 오지 않을 시기처럼 느껴졌던 해가 막상 오니까 감회가 야릇해지더군요. 한 해 지나면 제가 80세가 됩니다. 한 번도 제게 오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나이가 다가오는 거지요. 그동안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변화의 양상이 엄청나기 때문에 정리하기도 어렵거니와 앞으로 올 백 년이란 감히 예상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도 언젠가는 수명을 다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수명을 다하게 마련이고, 문지가 문을 닫게 될 경우 그 나름의 시대적 의미를 갖고 있겠지요. 그 의미를 정말 의미 있게 갖추고서 쓰러진다면 그 나름대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망한 것 자체가 시대적 의미를 갖는 시대가 온 것이니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앞으로 문화적으로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던가 혹은 인간존재론 자체까지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시대가 열릴 텐데 그때 문학과지성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큰 흐름 속 사소한 흐름밖에 안 되는 거겠지요. 1970년대부터 반세기 동안 나름의 의미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그래서 문학사든 출판사든 혹은 우리 역사 어느 한 대목에라도 존재할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 것인가, 그 정도만을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저 자신은 지나간 세대 또는 물러간 세대로 생각하고 있어서 공적인 자리에 서거나 발언하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40주년 행사를 후배들이 거창하게 잘 만들어준 바람에 신문에도 나오게 되고 안 선생과 대담도 하게 됐군요. 맥아더 말이던가요?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진다는 말. 그런 모습이 제일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제 곧 그렇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고요.
안찬수
건강히 지내십시오. 부족할 때 길을 여쭐 수 있는 어르신들이 계셔서 감사하다고 느낍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한반도 전체, 동아시아 전체, 근대문명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시기입니다. 반성도 되고, 이 땅에 살면서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될 지 오랫동안 암중모색해왔지만 컴컴한 터널로 들어가서 끝이 잘 안 보이는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이 오래도록 계셔서 길을 일러주시면 좋겠습니다.
김병익
비관하지 마세요.(웃음) 우리도 그 캄캄한 터널을 지나왔지만 예를 들어 손세일 선생의 『이승만과 김구』를 보면서 그렇게 궁핍하고 전망이 안 보이던 시대에 독립운동 하던 시기를 거쳐 우리에 이르렀다는 걸 감동적으로 읽었던 적이 있는데요. 절망적인 시대에 대한 고민은 그때가 훨씬 심했을 텐데 민족의 권리를 되찾는데 헌신했고, 우리는 우리대로 4․19다 유신체제다 겪으면서 우리 나름의 역사적 존재감을 가지려고 했고요. 안 선생이 저와 25년쯤 차이가 나는데 그런데도 지금 이 시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문득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제목이 떠오르네요. 밤은 늘 있게 마련이고 해는 늘 다시 뜨게 마련이고. 해 뜰 때 어두운 밤을 생각하고, 어둠 속에서 환해질 날을 기다리는 일이 끝없이 되풀이되리라는 건, 역사의 반복이면서 진행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