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3일 화요일 오후,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가 공동주최한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화권력의 현재' 긴급토론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명원 경희대 교수와 오창은 중앙대 교수가 발제하고, 뒤이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총장 조영선 변호사,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정원옥, 심보선 시인, 정은경 원광대 교수가 토론을 나눴습니다.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화권력의 현재' 자료집에 실린 발제문 전문을 아래에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1. 사실 : 신경숙의 「전설」은 미시마 유키오 작 「우국」의 표절인가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응준이 인터넷 언론인 <허핑턴포스트>(2015. 6.16)에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신경숙의 단편 「전설」1)이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1925-1970)의 「우국憂國」2)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3) <표절의 근거가 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1)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와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미시마 유키오, 김후란 옮김, 「우국憂國」, 『金閣寺, 憂國, 연회는 끝나고』, 주우主友 세계문학20, 주식회사 주우, P.233. (1983년 1월 25일 초판 인쇄, 1983년 1월 30일 초판 발행.)
2)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신경숙, 「전설」, 『오래전 집을 떠날 때』, 창작과비평사, P.240-241. (1996년 9월 25일 초판 발행, 이후 2005년 8월1일 동일한 출판사로서 이름을 줄여 개명한 '창비'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로 소설집 제목만 바꾸어 재출간됨.) 이응준,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 <허핑턴포스트>, 2015. 6. 16.
위의 인용문을 거론한 후, 다음과 같이 섬세하게 표절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에 대한 표절로 저렇게 적발되고 있는 신경숙의 「전설」의 일부분은, 한 소설가가 '어떤 특정분야의 전문지식'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설명하거나 표현하기 위해 '소설이 아닌 문건자료'의 내용을 '소설적 지문地文'이라든가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에서 활용하는 등'의 이른바 '소설화小說化 작업'의 결과가 절대 아니다. 저것은 순전히 '다른 소설가'의 저작권이 엄연한 '소설의 육체'를 그대로 '제 소설'에 '오려붙인 다음 슬쩍 어설픈 무늬를 그려 넣어 위장하는', 그야말로 한 일반인으로서도 그러려니와, 하물며 한 순수문학 프로작가로서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명백한 '작품 절도행위―표절'인 것이다.특히, 과연 경륜 있는 시인답게 김후란은, 1996년 6월 30일 초판이 발행된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제2권 '죽음의 미학' 편에 실린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에서는 "한 달이 채 될까 말까 할 때, 레이꼬는 사랑의 기쁨을 알았으며, 중위도 이를 알고 기뻐하였다."라고 번역된 부분에서 "사랑의 기쁨을 알았으며"라는 밋밋한 표현을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라는 유려한 표현으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언어조합은 가령, '추억의 속도' 같은 지극히 시적인 표현으로서 누군가가 어디에서 우연히 보고 들은 것을 실수로 적어서는 결코 발화될 수가 없는 차원의,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도용盜用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튀어나올 수 없는 문학적 유전공학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응준, 위의 글. (밑줄-인용자)
요컨대, 신경숙의 미시마 표절은 김후란 번역본의 의식적 표절이라는 것이다. 즉 원본을 “오려붙인 다음 슬쩍 어설픈 무늬를 그려 넣어” 표절 또는 도절을 위장하는 “작품 절도행위-표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SNS를 통해 일파만파로 번지자 해당소설을 출판한 창비 문학출판부는 언론 보도자료(2015. 6.17)를 통해 "일본 작품은 극우민족주의자인 주인공이 천황 직접 통치를 주장하는 쿠데타에 참여하지 못한 후 할복자살하는 작품이며, 신경숙의 '전설'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사랑과 전쟁중의 인간 존재의 의미 등을 다룬 작품"이라면서 "유사한 점이라곤 신혼부부가 등장한다는 정도"(강조-인용자)라고 밝혔다. 표절 가능성을 부인한 것이다.
작가 신경숙 역시 같은 날 창비에 보낸 메일을 통해 “오래전 '금각사' 외엔 읽어본 적 없는 작가로 해당 작품('우국')은 알지 못한다. 이런 소란을 겪게 해 내 독자분들께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풍파를 함께 해왔듯이 나를 믿어주시길 바랄뿐이고,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며 표절을 부인했다.
이러한 창비와 신경숙의 해명 아닌 해명은 문인과 독자 모두에게 납득할 수 없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고, 이 때문에 표절 의혹뿐만 아니라 작가와 창비의 태도를 이른바 ‘문학권력’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논의 역시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독자들의 예기치 못했던 반발을 접하게 된 창비 강일우 대표는 다음 날인 2015. 6. 18에 <독자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신경숙 작가의 표절 논란과 관련하여 6월 17일 본사 문학출판부에서 내부조율 없이 적절치 못한 보도자료를 내보낸 점을 사과드립니다. 이로써 창비를 아껴주시는 많은 독자들께 실망을 드렸고 분노를 샀습니다.보도자료는 ‘표절이 아니다’라는 신경숙 작가의 주장을 기본적으로 존중하면서 문제가 된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과 신경숙의 <전설>이 내용과 구성에서 매우 다른 작품이라는 입장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적된 일부 문장들에 대해 표절의 혐의를 충분히 제기할 법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독자들이 느끼실 심려와 실망에 대해 죄송스러운 마음을 담아야 했습니다.저희는 그간 작가와 독자를 존중하고 한국문학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진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한국문학과 함께 동고동락해온 출판사로서 이번 사태에 대해 신중하게 판단하지 못한 점은 어떤 사과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태를 뼈아프게 돌아보면서 표절 문제를 제기한 분들의 충정이 헛되지 않도록,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자유롭고 생산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 언제나 공론에 귀기울이겠습니다. 현재 제기된 사안에 대해서는 작가와 논의를 거쳐 독자들의 걱정과 의문을 풀어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내부의 시스템을 재점검하고 필요한 후속조치를 마련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한국문학과 창비를 걱정하시는 많은 분들께서 저희에게 보내준 질타를 잊지 않고 마음에 깊이 새기겠습니다.(밑줄- 인용자)2015년 6월 18일창비 대표이사 강일우 드림6)
위의 발표문을 통해 강일우 대표는 “지적된 일부 문장들에 대해 표절의 혐의를 충분히 제기할 법하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말했지만, 표절을 명시적으로 확정하지 않았다. 제기된 표절 의혹과 사후 가능한 조치에 대해서도 “작가와 논의”한다는 말 이외에 명료한 “후속조치”를 아직까지는 마련하고 있지 않다. 이런 까닭에 권성우, 오길영 등의 평론가를 포함한 독자들은 점증하는 여론의 압력을 일단 완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발표된 글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던졌다.
신경숙의 표절 의혹과 관련하여 창비가 여론의 비판에 직면했지만, 사실 작가 신경숙은 출판사 문학동네의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신경숙의 출세작이 되었던 두 번째 창작집 『풍금이 있던 자리』(1993)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는데, 이렇게 보면 이 작품 외에도 표절의혹에 대해 해명해야 되는 출판사는 이 세 출판사 모두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 계간 『문학동네』의 편집위원인 신형철이 <한국일보>에 신경숙의 표절의혹 관련 답변서를 보내고, 역시 편집위원인 권희철이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보도되었다.
신형철씨는 19일 한국일보에 보내온 답변서를 통해 문제가 된 우국(미시마 유키오)과 전설(신경숙)의 해당 부분이 “거의 같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며 “‘문장’ 단위라면 몰라도 ‘단락’ 단위에서 또렷한 유사성이 우연의 일치로 발생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고 말했다. 사실상 표절을 확인하면서 그는 “과정이 어떠하였건 ‘우국’과 ‘전설’ 사이에 빚어진 이 불행한 결과에 대해서는 작가의 자문自問과 자성自省이 필요해 보인다”고 덧붙였다.반면 작가에게 쏟아지는 무분별한 비판에 대해선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그는 “신경숙 작가의 뛰어난 작품들마저 부정할 수는 없으며 그 작품들에 제출한 상찬을 철회할 이유도 없다”며 “그래서 작가가 이번 사안에 대해서 사과하고 이를 창작활동의 한 전기轉機로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고 말했다.신형철씨에 이어 문학동네 편집위원인 권희철 문학평론가도 의견을 밝혔다. 권씨는 “의식적 표절이 아니더라도 해당 대목이 상당히 유사한 것은 분명하다”며 “존경하는 작가에게 영향을 받는 건 자연스런 일이지만 문장까지 비슷해지는 건 조심해야 한다. 문단이 이를 너무 소홀히 여긴 것 같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7)
신형철은 미시마의 「우국」과 신경숙의 「전설」 속의 해당 부분이 “거의 같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말했지만 표절을 확정하지는 않았다. 권희철 역시 “의식적 표절이 아니더라도”라고 단서를 단 후, “해당 대목이 상당히 유사한 것은 분명하다”는 식으로 신형철과 동일한 논법을 취했다. “거의 같다” “유사하다” 식의 유보적 표현을 통해, 표절이냐/아니냐는 사실 확정을 일단 회피한 것으로 보인다. 기사의 제목은 “표절 인정”으로 되어 있는데, 이 두 평론가의 진술은 모호하게 흔들린다.
요점을 말하면, 창비와 문학동네는 ‘문학출판부, 대표, 편집위원’ 등의 발언을 통해 문인과 독자들에게서 제기되는 표절 의혹의 중대성에 대해서는 깊이 인식하고 있으나, 현재까지는 그것을 표절로 확정할 수 없고, 이를 위해서는 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며, 특히 작가가 이를 강하게 부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경숙은 기본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는 작가이기에, 표절 의혹을 들어 간명하게 해당작가에 대한 어떤 조처를 취하기는 어렵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차적인 문제는 신경숙의 「전설」이 ‘표절’이냐 아니냐는 사실 관계일 터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응준의 논의가 있기 전에 이미 2000년에 정문순에 의해 <우국>과 <전설>의 표절관계가 명확하게 적시되었다는 점을 일단 지적할 수 있다.8) 최근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전설>의 표절 혐의를 적시하고 있다. 기사의 일부만을 인용해 보도록 하자.
정 평론가는 당시 "일제 파시즘기 동료의 친위쿠데타 모의에 빠진 한 장교가 대의를 위해 자결한다는 '우국'의 내용과, 한국전쟁 때 한 사내가 전쟁터에 자원입대하여 실종되는 '전설'은, 남편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때 남은 아내들의 선택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점에서 주요 모티브부터 유사하다"고 했다.또 "10여 개의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문구는 물론이고 남편의 죽음이나 참전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아내의 태도, 역순적 사건 구성, 서두에 역사적 배경을 언급한 전개 방식 등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나 영향 관계로 해석될 여지를 봉쇄해버린다"고 주장했다.정 평론가는 표절을 어떻게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두 소설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모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다른 소설과 비슷한 문장이 연속으로 10문장이 이어지는 것은 나오기 어렵다. 표절은 상식적으로 다 알 수 있다"고 말했다.9)
위의 인용문을 간추리면, 1) 플롯과 모티프의 유사성, 2) 유사 문장과 동일 문장 등을 보더라도 표절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전설>의 표절 의혹이 단지 문장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작품의 구조 전체에 해당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설>은 과연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한 것인가 아닌가. 명백한 표절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의식적인가 무의식적인가. 작품 구조의 유사성 뿐 아니라 문장의 표절양상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때10), 이를 무의식적인 것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특히 한두 문장이 아니라, 거의 한 문단 전체를 직접인용에 가깝게 약간 변용한 후 표절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의식적인 표절’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하다. 명백한 사실은 <전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의 표절이라는 점이다. 이 결론은 변할 수 없다.
2. 진실: 작가와 문학공동체의 책임
이응준이 신경숙의 <전설>에 대한 표절 의혹을 제기한 이후, 그간 잊혀져왔던 신경숙의 표절의혹들이 점입가경의 형국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표절 의혹을 일거에 해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의문들을 단순한 의혹제기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작가의 진정성을 믿고 봉합한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일단 내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차선책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먼저 표절의혹이 제기된 작품에 대해 작가가 취하고 있는 책임의 진정성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것이 일관되게 나타난다면 우리는 작가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작가에게 어떻게 작가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냐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럴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거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편 「딸기밭」(『문학동네』 1999년 여름호)의 사례가 그것이다. 한겨레신문 최재봉 문학전문기자는 당시의 연재칼럼인 <최재봉의 글마을 통신>에 신경숙이 단편 「딸기밭」에 1991년에 숨진 유학생 안승준 씨의 유고집 『살아있는 것이오』(삶과꿈, 1992)의 모두 여섯 문단에 해당하는 문장이 신경숙의 단편 「딸기밭」에 고스란히 옮겨졌음을 지적했다.11)
단편소설에서 한 문단도 아니고 마치 작가가 창작한 것처럼 여섯 문단이 옮겨졌다는 것은 참으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작가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의식했는지 최재봉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고 그 칼럼에는 적혀 있다.
작가 신씨는 “승준 씨의 어머니에게서 책을 받아 읽고 너무도 슬프고 감동적이어서 언젠가 소설로 써보고 싶었다.”며 “유족에게 누가 될까 봐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고 밝혔다. “필요하다면 창작집을 낼 때 출처를 밝히겠다.”고 말했다.12)
최재봉 기자는 “아무리 선의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작가 쪽의 부주의와 몰양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칼럼을 끝맺었다. ‘선의’ 여부에 대해서는 주관적이므로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작가가 타인의 저작을, 그것도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이의 유고집을 여섯 문단에 걸쳐 차용, 표절하여 자신의 단편소설로 삼는 일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이다. 더구나 안승준 씨의 책은 독자대중에게는 사실상 인지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상황이기 때문에, 최재봉 기자가 작가에게 해당 사실여부를 확인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독자들은 소설 속에서 진술되는 아래의 편지를 신경숙 개인의 창작으로 끝까지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안승준 씨의 유족 역시도 신경숙 씨가 ‘동성애 모티프’를 다룬 소설과는 전혀 달리 불운하게 죽은 아들의 편지가 도처에서 인용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위의 신경숙의 진술은 원작자인 유족들에 대한 진정어린 사과를 닮고 있는 말일까? 내 판단엔 “언젠간 소설로 써 보고 싶었다”는 자기 욕망을 강렬히 토로한 것에 불과하다. “필요하다면 창작집을 낼 때 출처를 밝히겠다”는 진술 역시 자신이 타인의 저작을 무단으로 도용했음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드러내는 진술이 아니다.
“필요하다면”이 아니라 타인의 저작을 대량으로 인용했다면 “반드시” 그 출처를 밝혀야 한다. 설사 출처를 밝힌다 해도 소설 내의 중요한 서사적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서간문을 당연히 작가 자신이 창작하는 게 소설가의 기본자세라는 점도 환기시키고 싶다. 이런 점에서 보면, ‘추궁된 고백’에 해당되는 위의 신경숙의 진술 역시 작가적 기본윤리와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개탄할 만한 상황에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유독 빈번하게 신경숙은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 「딸기밭」에서의 신경숙의 표절이 지적된 것과 거의 동시에, 문학평론가 박철화는 신경숙의 장편 『기차는 7시에 떠나네』(문학과지성사, 1999)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세계와 매우 유사하며, 단편 「작별인사」 역시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고 지적했다. 한겨레 기고문의 말미에서 박철화는 “그러니 적어도 『풍금이 있던 자리』의 신씨라면, 지금 상황에서는 자신이 표절을 하지 않고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도 유일한 선택일 것이다”13)며 칼럼의 끝을 맺었다.
박철화와의 논쟁 과정 속에서 신경숙은 시종일관 자신의 표절을 부정했다. 다만 최재봉 기자가 치밀하게 검증한 「딸기밭」의 경우는 디테일한 논거가 비교․제시되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진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 소설 「딸기밭」을 보면 현재 활동하고 있는 가수의 노래말이나 라디오 프로그램 멘트가 생략되거나 변용된 채 출처 없이 인용된다. 그 편지 역시 소설 속에 용해될 수 있을 거라는 소박한 생각을 했고, 또 소설화되면서 맥락이 달라져 유족에게 누를 끼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앞서서 굳이 해당 부분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14)
그러나 또 다른 표절의혹을 제시한 박철화에 대해서는 “위험한 단세포적 주장”이라는 과격한 언사까지 써 가며 격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번 기사에서 유감인 부분은 내 작품에 부당하게도 표절혐의를 씌운 박철화씨의 글이 언급된 데 있다. 박씨가 거론한 파트릭 모디아노와 마루야마 겐지는 내가 존중하는 작가이기는 해도 그들의 작품과 내 작품은 전혀 다른 줄거리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혹시 이들의 작품과 내 작품에서 유사한 모티프 한두 개를 발견해서 표절 운운 하는 것이라면 그건 위험천만한 단세포적 주장이다.15)
본인의 밝혀진 표절에 대해서는 “소설 속에 용해될 수 있을 거라는 소박한 생각”이었다며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면서도, 동료 비평가의 표절의혹에 대해서는 “위험천만한 단세포적 주장”이라 극언極言 하는 이중성이 잘 나타난다. 표절에 대한 작가적 윤리나 책임 문제에 대해서는 자의식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반대로 문제 제기자를 고압적으로 타매하는 양상만이 눈에 띈다.
이번에 소설가 이응준이 제기한 표절의혹에 대해서도 신경숙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한번 언급해 보기로 하자.
오래전 '금각사' 외엔 읽어본 적 없는 작가로 해당 작품('우국')은 알지 못한다. 이런 소란을 겪게 해 내 독자분들께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풍파를 함께 해왔듯이 나를 믿어주시길 바랄뿐이고,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16)
스스로를 “나”가 아닌 3인칭 “작가”로 거론하면서, 이런 일은 “나”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가 아니라,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라는 진술이 독자들의 분노를 샀던 것으로 보인다. “나”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표절의혹에 대한 ‘입증책임’을 사실상 방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신경숙은 문제제기자인 이응준을 포함한 문인들과 독자들에게 거짓 해명을 했고, 작가로서의 입증책임을 거부했고, 이응준이 제기했던 표절 문제는 사실로 밝혀졌다.
신경숙이 이응준의 문제제기를 너무 앞서 단호하고 과감하게 부정했기 때문에, 이전의 「딸기밭」의 경우처럼, 작가적 부주의나 몰양식의 수준으로 관용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것은 그 자신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더구나 문제가 된 작품을 출간한 출판사 창비의 작가를 비호하는 듯한 부주의나 몰양식 역시 작가 신경숙에 대한 신뢰감과 기대지평을 빠른 속도로 붕괴시킨 요인이다.
그러나 오늘의 이 사태가 초래된 가장 큰 원인은 작가 자신의 표절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경숙 문학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검토 자체를 봉쇄하고 상업주의와 타협해 결국 한국문학을 ‘비평적 베팅’의 장소로 희화시킨 문학권력으로 무장된 일각의 문학공동체의 상징권력과 명성을 둘러싼 패권주의 탓이 크다. 여기에는 뼈저린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3. 맥락: 문학을 작동시키는 ‘돈’
한국문학의 위기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까지 다양한 국면에서 논의되어 왔다. 이 시기에는 유독 표절, 문학 상업주의, 폐쇄적 매체권력, 문학권력과 언론권력의 결탁, 비평적 심의기준의 붕괴 등. 오늘날 우리들이 목격하게 된 여러 제반 모순이 폭발했다가 머지 않아 공론장에서 소멸하게 된 시점이었다.
이 시기의 문학출판시장은 사망 직전의 마지막 생기와도 유사하게 여러 형태의 ‘스타 시스템’이 가동되면서 일시적인 호황을 누린 듯 보였다. 종래의 문학계를 구성했던 일정한 문학적 이념형에 기반한 진영논리도 상실되어서, 창비와 문지, 문학동네를 아무런 부담 없이 오 가는 작가들도 많아졌는데, 비평적 환대에 있어서도 신경숙만큼 두루 상찬 받은 작가를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신경숙 문학을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신경숙 문학이 한 시대 안에서 정도 이상의 상찬을 받는 근거를 회의하는 독자 역시 그만큼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독자들을 대변하는 비평가들의 비평적 개입은 여러 형태의 히스테리컬한 비난과 봉쇄에 직면했다.
백낙청 교수는 신경숙의 소설을 읽으면서 ‘한국문학의 보람’이라는 말로 그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창비와의 미학적 연결망을 찾아내고자 했다. 『외딴 방』 같은 경우가 이에 해당할 텐데, 사실 이 장편소설은 신경숙의 첫창작집인 『겨울우화』(고려원, 1990)에 수록된 단편 「외딴 방」의 모티프를 장편으로 확대한 것이다. 첫 단편 「외딴방」의 모티프는 장편 『외딴 방』에도 『엄마를 부탁해』에도 『기차는 7시에 떠나네『에도 별무리처럼 흩어져 있다.
신경숙의 소설을 한국문학의 보람이라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문학과 지성사의 보람’ 또는 ‘문학동네의 보람’에 비해 ‘창비의 보람’으로서의 신경숙은 무엇인가 하고 자주 물었다. 신경숙 작가 자신이 창비, 문지, 문학동네를 거침 없이 유영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사실 이것을 해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한국의 문단과 비평계에서 신경숙처럼 ‘무오류의 권위’를 확보한 작가는 드물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작품의 매력이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것을 해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분명해 보이는 것은 신경숙 문학이야말로 각각의 문학출판사에 있어서는 까다로워졌거나 냉담해진 독자들의 구매력을 유혹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문화상품이었다는 점에 있다. 적어도 신경숙의 문학은 문단, 언론, 시장 모두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누렸다.
그것은 적어도 이해관계 동맹체로 변질된 주요 문학출판사와 매체에서 신경숙 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의가 더 이상 등장할 수 없다는 사실에도 기인한다. 동시에 신경숙은 어느 순간부터 그 자신의 문학적 명성과 권위를 문학 외적인 관계의 힘으로 확인시키는 일도 종종 있었을 것이다. 한국문학 안에서 신경숙은 일찍 거장이 되었다. 그 문학의 탁월함의 부분 보다는 환금성의 탁월함이 더 컸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문단은 정념의 공동체로 머물지 않는다. 문학제도는 시장화된 제도이면서, 심의하고 평가하는 제도이며, 권위를 부여하고 상징권력을 부여하는 복합적 공간이다. 이 공간 안에서 여러 형태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고, 무오류에 가까운 찬사로 치장된 비평에 둘러싸이고, 더 나아가 평범한 작가는 상상할 수 없는 인세수입과, 국내작가를 넘어 글로벌 작가로 나아가는 것이 현실화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작가 자신의 성찰능력이다.
작가 자신의 힘으로 그것이 불가능해질 때, 비평적 개입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현재의 비평공간에서 ‘이견’을 지닌 비평가들은 대부분은 한 줌의 중심의 질서 바깥에 비체제 지식인으로 존재하고 있다. 반체제 지식인이 아니다. 현재의 문학제도는 비평적 담론과는 완전히 무관한 산업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반체제 지식인은 존재 불가능한 공간이다.
한국의 문학출판산업은 빠른 속도로 쇠퇴하고 있다. 이 위기의식은 문학출판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는 바다. 그 원인은 어디서 오는가. 인쇄출판문화의 전반적인 쇠락이라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외하면, 문학출판에 대한 기대지평과 신뢰의 상실에서 온다고 판단된다. 오늘의 얼마 안 되는 본격문학 독자들은 ‘전업독자’이기보다는 ‘전업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독자’들이 많다. 공표하기에도 부끄러운 문학계간지나 월간지의 발행부수는 오늘의 문학이 왜소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00년대 문학의 실패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문단의 패거리와와 권력화, 이에 따른 비평적 심의기준의 붕괴와 독자의 신뢰상실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경숙의 표절 사태는 한국문학이 이렇게 돈과 패거리 권력으로 무장되어 경과했던 10수년의 실험이 희비극적으로, 어떤 희망 없는 변곡점에 도달한 사건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치매 상태에서 집 나가 행적을 알 수 없는 것은 신경숙 소설 속의 ‘엄마’가 아니라 오늘의 ‘한국문학’이다.
신경숙 표절 사태를 계기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일단 가장 선결적 문제부터 제안하자면 이렇다. 일단 문학적 논의와 무관하게 전개되는 법적 쟁송과 사태의 스캔들화에 대해서는 경계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다음과 같은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작가 신경숙은 독자 앞에 나아와 표절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최대한 정직하게 밝히고 사죄를 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둘째, 만일 작가의 은둔이 계속된다면, 이번에 문제된 「전설」 수록 작품을 출간한 창비가 독자적으로 사태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독자에 대한 사죄와 실행방향을 약속해야 할 것 같다.
셋째, 현재 신경숙의 표절 의혹이 거론되고 있는 저작은 창비 출간 소설 뿐만은 아니다. 의혹이 된 저작을 출판한 문학동네나 문학과지성사를 포함한 출판사들 역시 사실 여부를 체계적으로 검토해서 독자들에게 공표하고 결과에 따른 행동을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넷째, 넓은 범주에서 문학공동체 혹은 문인사회가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현재의 표절 문제에만 국한 시켜 할 수 있는 것과 넓은 범주의 한국문학의 비판적 성찰을 위해 필요한 방책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성찰적 작업을 우리는 할 수 있을까? 추가 부분에 대해서는 토론자들의 의견을 경청한 후 제 의견을 피력하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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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출은 「전설」, 계간 『문학과사회』, 1994년 겨울호. 이후 창작집 『오래전 집을 떠날 때』(창작과비평사, 1996)에 수록되었다가, 『감자 먹는 사람들』(창비, 2005)로 제목이 바뀌어 재출간 되었다.
2) 초출은「憂国」, 『小說 中央公論』, 3号・冬季号, 中央公論社, 1961. 1에 발표. 소설 발표 후 4년 후에는 미시마 자신이 감독 및 주연배우로 제작 출연, 칠레단편영화제 극영화 부문 2위 수상. 일본 위키피디아 참조. https://ja.wikipedia.org/wiki/%E6%86%82%E5%9B%BD. 참고로 일본언론에는 10건의 ‘도절’ 관련 기사가 검색됨. <한겨레> <조선일보> 일본판 외에, 스포츠신문 등 군소언론 및 에서 중국에서 미시마 유키오를 표절한 신경숙에 대한 대중적 반응을 싣고 있음.
3) 신경숙이 표절했다고 이응준이 밝혔던 번역 판본은 미시마 유키오, 김후란 옮김, 「우국憂国」, 『金閣寺, 憂國, 연회는 끝나고』, 주우主友 세계문학 20, 주식회사 주우, 1996. 9. 25 초판. 현재는 절판 상태임. 요컨대 김후란의 미시마 번역본을 신경숙이 표절했다는 것이 이응준의 주장이다. 이렇게 되면, 신경숙은 김후란의 변역을 통해 미시마의 소설을 표절한 것으로 추론됨.
4) 이응준,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 <허핑턴포스트>, 2015. 6. 16.
5) 이응준, 위의 글.
6) 창비 홈페이지(changbi.com) 참조.
7) 황수현 기자, 「"같은 것을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소장 비평가들 표절 인정」, <한국일보>, 2015. 6. 19.
8) 정문순, 「통념의 내면화, 자기위안의 글쓰기」, 『문예중앙』 2000년 가을호.
9) 우기화 기자, 「표절논란…그때나 지금이나 한국문단 바뀐 게 없다-15년 전 신경숙 소설 표절 의혹 제기한 정문순 문학평론가」, <경남도민일보>, 2015. 6.22.
10) 최근 JTBC는 눈문표절 감별 프로그램으로 미시마의 <우국>과 신경숙의 <전설>을 비교했더니, 표절 의심대목 5곳이 추가로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고석승 기자, 「<우국> 모른다는 신경숙, 표절 의심 대목 5곳 새로 발견」, , 2015. 6.20. 21:08분 보도.
11) 최재봉 기자, 「최재봉기자의 글마을 통신: 왜 신경숙 씨 ‘딸기밭’에 남의 글이 그대로 담겼나」, <한겨레신문>, 1999. 9. 21. 안승준의 『살아 있는 것이오』에는 안승준 씨의 시, 일기, 편지, 에세이, 지인들의 회상기 등이 담겨 있다. 현재는 절판된 책이다.
12) 최재봉, 위의 칼럼.
13) 박철화, 「신경숙씨 주장에 대한 반론」, <한겨레>, 1995. 10. 5.
14) 신경숙, 「글마을 통신에 대한 기고문 출처 안 밝힌 인용은 죄송 표절혐의 이해할 수 없다」, <한겨레>, 1999. 9. 28.
15) 신경숙, 위의 글.
16) 창비 보도자료에서의 「작가의 말」. 2015. 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