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시민연대 심포지움'이 2015년 5월 30일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열렸습니다. 심포지움의 주제는 '어린이책에서 어린이 짚어보기'이며,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길벗어린이)를 중심으로 최근 어린이책에서 어떻게 어린이를 나타내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발제는 조은숙(춘천교대 교수), 김은호(성미산학교 교사), 서정홍(농부시인), 수수-류수민(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변춘희(어린이책시민연대 정책지원부장) 총 5명이 맡아주셨습니다. 발제문 전문을 게재합니다.
아동은, 비아동들의 사회는,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수수-류수민 (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활동가)
청소년인권운동을 소홀히 한 탓일까? 앉아서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를 읽는데, 청소년인권적 감수성에서 비판적으로 읽으려고 노력했음에도, 생각보다 딱 짚어 “이거다!” 라 말 할 수 있는 지점이 없었다. 지원과 병관의 가족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서로를 평등하게 존중하는 이상적인 가정이란 말은 아니다. 지원과 병권의 부모는 교과서마냥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으나, 엄마 혼자 매 끼니로 무엇을 만들까를 고민한다. 지원은 전형적인 여자아이마냥 운동을 기피하고 동생인 병관보다 태권도 띠가 낮았으며, 병관의 뒤에서 천천히 산을 오른다. 병관은 “내가 흔한 남자아이다!”를 온몸으로 외치는 것처럼 막무가내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 이 책이 그려내는 아동의 모습이 아주 큰 문제라고 선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어디에나 충분히 있을 법한, 아주 흔한 가정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 이야기 같은 현실적인 배경들과 이야기들이 참 와 닿아 좋은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
“그냥.. 우리 아이를 보는듯한 책? 정말 흔한 일상생활 속 이야기를 익살스런 캐릭터로 인해서... 조금 더 우리아이들이 보면... 비슷한 행동에 친근감을 가지는 책?”
그렇지만, ‘현실적’과 ‘흔한’이란 말을 다시 뜯어보자. <지원이와 병관이>가 아주 문제적이지도, 그렇다고 퍽 인권적 측면에서 추천할만한 책도 아닌 이유는, 이 책이 우리의 비아동중심적인 사회를 그대로 투영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 푸욱 담겨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당연히 이 책에서 그려내는 아동의 모습들은 익숙하고 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비아동중심적인 사회란 어떤 것을 뜻하는 걸까?
비아동이 중심이 되어서 구축된 사회, ‘어른’들의 말과 행동양식이 곧 성숙하고,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사회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이 현실 속에서 아동은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써 존재한다. 아동은 ‘어른’에게 지식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습관과 말하기, 감정표현방식까지 교육받아야 한다. 사회는 아동을 주인으로 받아들여주지 않기 때문에, 아동이 자신의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기 위해서는 한시바삐 교육·어른이 되는 사회화의 과정을 거쳐 비아동의 세계로 편입되어야 한다. <지원이와 병관이> 역시, 아동을 교정하여 비아동으로 만들어내는,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여기고 있는 바로 그 과정들을 보여준다. <지원이와 병관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어린이를 대하고 있는지, 어린이는 어떤 전략을 통해 ‘어른’이 되길 종용받는지,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어린이는 어떻게 그 주체성을 빼앗기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첫 번째 ‘사회화’의 전략: 폭력, 명령, 겁주기, 통제
<지원이와 병관이>의 구조는 대부분 문제상황의 발생과 그 해결로 이루어진다. 어린이가 어떤 상황을 빚어내고, 이는 어른인 부모에 의해 ‘문제’상황으로 설정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어른에 의해 해결되고 있다. <손톱 깨물기>, <용돈 주세요>, <집 안 치우기>, <거짓말>, <먹는 이야기> 전 9권 중 5권이 각각의 ‘문제’를 그 제목으로 삼는다. 여기서 부모에 의해 ‘문제’라고 규정되는 상황들은 대개 아동의 부모에 대한 비·불복종을 뜻한다.“먹는 이야기”에서 어린이들은 부모가 원하는 건강한 식단이 아닌, 과자와 소세지를 선호하는 모습을 양껏 보여준다. 용돈을 주지 않겠다고 하는데 어린이는 용돈을 원하고, 집을 치우라 명령하건만 어린이는 집을 치우지 않는다. <손톱깨물기>에서 지원은 손톱을 깨무는데, 이는 엄마가 “나쁜 버릇”이라고 말한 습관이다. 거기다 병관이 이를 따라하며 ‘문제’는 더욱 커진다.
“갑자기 엄마가 병관이 손을 찰싹 때리십니다. “얘가 무슨 짓이야! 어디 따라 할 게 없어서....... 손들고 서 있어!” 엄마는 심하게 야단을 치십니다.“
‘문제’를 교정하기 위해 엄마는 명령과 폭력을 사용한다. 손을 찰싹 때린 것은 폭력이라기보단 행위를 멈추기 위한 반사적 반응이라는 변명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엄마가 ‘어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엄마가 어떤 ‘문제’ 행동을 할 때, 그것을 본 병관이 엄마의 손을 반사적으로 찰싹 때릴 수는 없다. “어디 엄마를(어른을) 때리냐”면서 “손들고 서 있어!”를 들을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폭력은 여러 장치를 통해 축소되고, 합리화된다. 손톱을 물어뜯는 병관의 손을 엄마가 때리는 모습엔 ‘찰싹’이라는, 작은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수식어가 붙는다. 또한 엄마는 병관이 손을 찰싹 때리‘시’며, 야단을 치‘신’다. 그렇게 심하지도 않은 “나쁜 버릇”인 손톱 물어뜯기에, 별다른 이유없이 누나인 지원과는 정반대의 해결책으로 반응하는 엄마의 비합리성은 이렇게 정중한 높임말로 포장되는 것이다. 이 높임으로 인해 엄마의 비합리성을 어느 정도 소거된다.
“엄마, 꼭 하나만 해야 돼요? 두 개 하면 안 돼요?” “빨리 안 고르면, 그냥 간다.” 엄마가 겁주는 바람에 병관이는 얼른 막대과자를 집습니다.
“엄마, 사실 나 오천 원 주웠어요. 사천 원은 이거 샀어요.” 병관이는 책상 속에서 요요를 꺼내 왔습니다. “어쩌자고 주운 돈으로 맘대로 장난감을 사. 너 경찰 아저씨한테 가야겠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경찰 아저씨라는 말에 병관이는 얼른 잘못을 빌었습니다.
병관이 과자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엄마의 대응은 과자를 너무 많이 먹었을 때 구체적으로 어떤 악영향이 몸에 나타나게 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설득의 방식이 아닌, “그냥 간다”는 협박의 방식으로 문제상황은 해소된다. 병관이 놀이터에서 주운 오천 원에 대한 엄마의 반응 역시 과잉되어 있다. 주운 돈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일로서 여겨지지만(그리고 그 액수가 커서 주인이 돈을 찾고자 한다면 점유이탈횡령죄에 해당될 수도 있지만), 길거리에 떨어져 있던 오천 원의 주인을 찾아주는 것은 퍽 어려우며,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다 이 책의 제목은 “주운 돈 쓰기”가 아니라, “거짓말”이다. 책에서 설정한 문제상황의 핵심은 돈을 주웠다는 사실을 엄마한테 밝히지 않은 병관의 ‘거짓말’인 것이다. 하지만 돈은 병관이 주운 것이며, 다른 누구의 돈을 훔친 상황도 아니다. 병관은 엄마와 돈을 주우면 꼭 이야기하기로 사전에 약속을 한걸까? 하지만 이런 상황은 병관과 병관엄마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많은 어린이들은 주운 돈을 자의로 사용할 수 없게끔 훈육받는다. 그렇다면 그 이유와, 목적은 무엇일까?
병관은 자신이 주운 돈을 어떻게 쓸지 스스로 고민할 수 없다. 과자를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사는 것도 엄마에게 허락받아야 한다. 용돈을 받는 것도 “용돈 주세요” 편 이전에는 금지되어 있었다. 이렇듯 금전적인 요소에 관한 모든 통제권은 엄마, 즉 부모라는 이름의 비아동(어른)에게 전적으로 주어진다. 아동은 금전과 관련된 판단과 행위를 별 합리적인 이유 없이 모두 통제받으며, 어느 하나라도 그 통제에서 벗어났을 경우 ‘문제’라고 여겨지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금전에 관한 통제는 곧 아동의 일상영역 모든 것에 관한 통제이기도 하다.
거듭 말하나, 병관네 가정이 유독 통제적이거나 폭력적이지는 않다. “흔하고” “현실적”인 우리 사회의, 아동을 대하는 모습일 뿐이다. 폭력, 명령, 겁주기, 그리고 통제는 아동의 일상 소소한 단위에까지 적용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엄마 말 잘 듣”는, 순종하는 어린이를 만들기 위한 아주 흔하고, 일상적인 전략인 것이다.
두 번째 순종의 전략: 칭찬, 보상, “배려하는 부모”의 모습
그러나 부모의 폭력과 명령, 통제가 <지원이와 병관이>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아니다. 이런 강압적 기제들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아주 사소하게, 그리고 낮은 수위의 ‘일상’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이 돋보이게끔 하는 것은 칭찬과 보상의, 파지티브한 아이 길들이기, 곧 순종을 이끌어내는 전략이다. 칭찬과 보상으로서 아이를 길들이는 장면들은 폭력과 명령보다 길게 그려진다. 심지어 작가는 “칭찬 먹으러 가요”라는 한 권을 할애해 등산을 가기 싫어하는 아동들을 부모와 비아동들이 어떻게 구슬려 등산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는지를 보여준다.
“쟤 봐라, 너보다 동생인데 잘 올라가잖니. 어서 일어나 가자.” “싫어요, 힘들어요.” 아저씨 옆에는 병관이보다 커 보이는 남자아이가 주저앉아 있습니다. 병관이는 우쭐해서 씩씩하게 올라갑니다.
“옆에 있던 아저씨가 아빠 대신 대답하며, 지원이와 병관이를 칭찬합니다.”
“힘들지 않았니?” “녀석들 씩씩하네.” 쉬는 동안에도 어른들이 칭찬을 해 주십니다. 지원이와 병관이는 그때마다 기분이 좋아 으쓱해집니다.”
물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개인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과 독려는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보여주듯, 우리 사회 속에서 아동에 대한 칭찬은 마냥 긍정적 관심과 독려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이 칭찬은 ‘기특하다’는 표시임과 동시에 ‘귀여움’의 발로이다. 기특함과 귀여움이라는 감정은 자기보다 낮은 상대를 대상으로 할 때, 즉 상대를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지 않을 때 나타난다. 노화로 잘 걸을 수 없는 노인이 힘을 내 산을 올라갈 때, 우리는 ‘아유 씩씩하네.’ 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여기서 칭찬은 등산이라는 어른의 놀이를 하고 싶지 않아하는 아동을 구슬리기 위한 전략으로서 사용되고 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긍정적인 관심과 독려를 장려하는 것이 아닌, 아동과 함께 아동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칭찬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라, 는 말을 책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보상 역시 순종을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제시된다. 지원과 병관은 사실 산에 오르는 것보다는 산 중턱의 고깃집에서 밥을 먹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러나 <지원이와 병관이>는 이 책을 자녀와 함께 읽을 부모에게 아동의 욕구를 순종의 보상으로 제시하라고 지시한다. “손톱 깨물기”에서도 엄마는 지원의 “나쁜 버릇”을 없애기 위해 “일주일 뒤 다시 검사해서 손톱을 잘 기르면, 지원이가 갖고 싶은 것 한 가지 선물해 줄게”라는 보상을 제시한다. “먹는 이야기”에서는 ‘문제’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부모의 노력을 각양각색으로 보여준다. 야채를 먹게 하기 위해 과자의 양을 제한하기도 하고, 아이의 소세지 섭취를 줄이기 위해 괜히 자신은 잘 먹지 않던 소세지를 먹어버리기도 한다. 고기에 야채를 싸서 먹게끔 돕기도 하고, “야채 잘 먹게 하는 법”을 검색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문제상황의 설정도 어른이 하고, 문제상황의 해결 역시 어른의 독단적인 선택이다. 폭력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은 문제해결 상황을 길게 서술하는 모습은 꼭 어린이책의 형식을 빌린, 어른을 위한 올바르고 현명한 훈육의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 부모에 의해 쓰여진 다수의 서평들이 <지원이와 병관이>가 아이들의 기본생활습관을 길러주기 위해 좋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칭찬과 보상은 아동의 자율적인 판단 기제를 무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닿아있다.
이 모든 ‘문제’상황과 그에 대한 해결책은 블로그에 서평을 쓴 부모들의 말마따나, 현실적이고 마치 우리 집 모습 같다. 하지만 이 전형성은 또 아동과 비아동 간의 갈등상황의 맥락을 지워버린다는 위험성도 갖는다. ‘아이들은 “흔히”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고, 어른으로서 이렇게 대응·교육·계도 하여 어린이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면 된다.’ 이 과정에서 어린이들의 다양한 반응들의, 아주 다양한 이유와 맥락은 보이지 않게 된다.
어른의 눈으로 본 아동, 지속되는 객체화
많은 독자들은 책 속 지원과 병관의 표정을 이 책의 장점으로 꼽는다. 아동의 감정을 극대화해서 잘 묘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지점이 있다. 일러스트가 철저히 아동만을 비추고 있다는 점이다. 일종의 슬랩스틱코미디처럼, 어린이의 얼굴 표정은 굉장히 과잉되게 그려진다. 특히나 분노, 억울함의 부정적인 표정이 부각된다. 지원과 병관의 눈꼬리는 올라가있고, 얼굴 전체가 벌게져 있거나, 근육을 있는 한껏 찌푸리고 있다. 반면 어른들의 모습은 그다지 그려져 있지 않다. 실상 이 책을 읽는 아동이 자신을 주인공에 대입했을 때,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될 모습은 부모와 친구들일텐데 말이다. 어린이와 함께 화목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아니면, 어른들은 거의 대부분 익명성을 유지한다.
“이거 다시 만들려면 힘든데, 다 만들고 치울게요.” “엄마 말 안 들을래? 빨리 치워.” “얘가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엄마 말 안 들을 거면 나가!” “네?” “엄마 말 안 듣고, 네 고집대로 하려면 다른 데 가서 살아!”
“엄마, 심부름했으니까 용돈 주세요, 삼천 원이에요.” “무슨 소리니? 그럼 넌 엄마한테 밥값 줄 거야?” “아니 뭐 그래도.......”
“다른 데 가서 살아!”라고 소리치는 것이 지원 혹은 병관이었다면, 아마 아주 큰 얼굴로 과잉된 감정묘사가 담긴 일러스트가 사용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엄마의 이 본격적인 분노에도 불구하고, 일러스트는 엄마의 감정을 깊숙이 묘사하지는 않는다. 밖으로 향한 손짓을 한 전신 모습이 다이다. 심부름을 하고 용돈을 받겠다는 병관더러 엄마가 그럼 너는 내게 밥값을 줄거냐는 어거지에 가까운 주장을 할 때, 지원처럼 보상을 받고 싶어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한 병관에게 다짜고짜 손들고 벌서라는 명령을 할 때 모두 엄마의 표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두 내용 다 병관의 얼굴만 위에서 아래를 본 시선에서 클로즈업할 뿐이다. 이런 구도는 어른의 눈으로 볼 때만 가능하다.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에서 아동은 내용과 일러스트 두 곳에서 다 객체로서만 존재하고 있다.
이런 것을 아동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것이 답이라고 확언하기엔 나의 전문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동의 표정만이 유독 과잉되어 있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 과잉은 보는 사람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어린 사람들은 감정조절을 하지 못한다는 통념을 강화시키는 역할도 하게 된다. 어린이는 비합리적이다. 하지만 어린이와 어떤 상의도, 대화도, 깊은 소통도 하지 않고 명령과 통제, 당근과 채찍의 기법만 반복하고 있는 어른도 비합리적이지 않은가. 엄마도 당연히 감정의 과잉을 겪을 수 있다. 병관이 친구를 때렸듯, 엄마도 누군가를 때릴 수 있고, 병관이 자신을 깨운 지원에게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듯, 엄마도 계속 되는 고된 가사노동에 짜증이 나 괜히 병관에게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이것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어떻게 생각되는가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지원이와 병관이>는 우리 사회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풍자나 비꼼, 혹은 직시를 위해서가 아니란 점을 기억하자. 그저 몸에 배인 대로 아동과 비아동의 역학·권력관계를 묘사하는 컨텐츠는, 이것을 접하는 아동과 부모로 하여금 정상적인 아동과 정상적인 부모의 역할을 학습시키게 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책은 비난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는, 서론에서도 밝혔듯 참 애매하다. 충실한 묘사를 보여준 이 책을 읽고, 우리의 사회 속에서 아동이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 비아동은 아동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고 있는지를 계속 고민할 수 있다면, 정상적 역할을 답습하는 것 이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뱀다리: 내가 주로 가는 도서관 어디에도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가 없었다. 대학도서관, 서울에서 가장 큰 공립 도서관이라는 남산도서관, 그 밑의 용산도서관에도. 내가 검색을 잘못한 결과일수도 있겠으나, 심지어 국회도서관에서조차 이 ‘베스트셀러’를 빌려주지 않았다. (국회도서관에 어린이청소년은 출입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지만) 결국 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 와서야 이 책을 빌려볼 수 있었다. 한 부씩밖에 비치되어 있지 않은 이 ‘베스트셀러’를 보기 위해서 먼저 이 시리즈를 읽고 있던 한 모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얼마나 많은 ‘바깥’ 생활을 제약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