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시민연대 심포지움'이 2015년 5월 30일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열렸습니다. 심포지움의 주제는 '어린이책에서 어린이 짚어보기'이며,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길벗어린이)를 중심으로 최근 어린이책에서 어떻게 어린이를 나타내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발제는 조은숙(춘천교대 교수), 김은호(성미산학교 교사), 서정홍(농부시인), 수수-류수민(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변춘희(어린이책시민연대 정책지원부장) 총 5명이 맡아주셨습니다. 발제문 전문을 게재합니다.
아이다움?
김 인 호 (성미산학교 교사)
얼마 전, 언론과 인터넷에서 ‘초등학생 잔혹동시’가 논란이 되었다. 10살, 초등학생이 낸 시집 ‘솔로 강아지’에 수록된 ‘학원가기 싫은 날’이라는 시가 그 이유였다.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로 시작되는 이 시는 어린이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과격한 단어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시 아래에는 한 소녀가 심장을 물어뜯고 있는 섬뜩한 삽화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어른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이 시를 표현의 자유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과 폐륜적인 시를 아이들에게 보일 수 없다는 의견이 서로 부딪혔다. 하지만 곧 후자의 여론으로 기울었다. 시를 쓴 아이와 그 아이의 시를 수용한다는 부모에게 무수한 악플이 달렸다. 어른들의 분노는 점점 더 커져갔다. 출판사는 홈페이지에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항의를 수용한다는 사과문을 게시했다. 그리고 시집을 전량 회수,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어른들은 아이의 시에 왜 그리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을까? 무엇이 그들을 그리도 분노하게 했을까? 그 분노는 ‘아이다움’을 벗어난 것에 대한 분노였다. 아이의 시는 독자를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자극적인 단어들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초등학생으로서 우리 사회를 살아가며 품은 문제의식이 분명히 담겨있었다. 치열하고 잔혹한 경쟁 속으로 떠미는 어른들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 문제의식과 분노를 오롯이 바라보지 않았다. 시구에 담긴 의미와 맥락에 대한 고민은 없었고, 단어가 얼마나 과격한지, 내용이 얼마나 자극적인지에만 호들갑을 떨었다.
어른들은 자신이 정해놓은 기준, ‘아이다움’에서 벗어난 아이에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아이라면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품어야 한다. 아이라면 세상을 순수하고 맑게 바라보아야 한다.’ 따위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아이의 진심에 공감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지원이와 병관이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는 2006년 ‘지하철을 타고서’를 시작으로 모두 9권이 발간되었다. 이 시리즈는 현재까지 80만부 이상이 팔렸으며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어있다. 부모와 아이들 모두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동화다.
이 책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영 작가는 자신의 자녀들을 키우며 경험한 일상들을 글로 옮겼다고 한다. 그 동안 아이들의 생활을 담은 책은 많았지만,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처럼 직접적이고 꾸밈없이 표현한 책은 드물었다. 아이들이 만나는 첫 경험의 순간, 올바른 생활 습관을 기르기 위한 노력, 삶의 순간에서 품게 되는 작지만 큰 고민들, 소소한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부모들과 아이들은 두 아이의 이야기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들이 경험한 것들을 떠올리며 깊이 공감한다.
이 책에 담긴 삽화 또한 매력적인 요소다. 삽화는 우리 주변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런 사실적인 배경은 독자로 하여금 내 주변에 살고 있는 또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한다. 장난꾸러기 병관이와 듬직한 지원이의 모습이 친숙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다. 지원이와 병관이의 모습을 담은 스티커북이 나왔을 정도로 아이들에게는 이미 친숙한 캐릭터가 되었다. 또, 그림 곳곳에 숨어있는 동물들을 찾아내는 것 또한 책을 보는 또 하나의 재미다.
너무도 착한 지원이와 병관이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이 숨어있다...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으로 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 중 한 글귀다. 우리가 수필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이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나의 삶을 되짚어보기 위함이다. 수필에서는 나와 닮은 기억 혹은 내가 스쳐지나간 삶의 순간을 다른 이는 어떻게 만났는지, 그 만남에 어떤 의미를 담아냈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파격’을 맞이한다. 삶을 낯설게 보는 것이다. 수필은 익숙한 일상 속에 여유로운 숨을 불어 넣고 그 안에 작지만 반짝이는 깨달음을 담아내게 한다.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는 수필을 닮은 동화다. 아이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는 동화다. 하지만 수필다운 여유와 파격을 담고 있지 못한 것이 아쉽다. 지원이와 병관이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재미는 있지만 그 공감을 통해 삶을 되돌아보거나 낯설게 보는 경험을 하기는 어렵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답답함을 만나게 된다. 이 답답함은 ‘아이다움’을 바라는 어른의 시선이다. 삽화에는 많은 생각을 품게 하는 여유로움과 자유로움이 담겨있지만, 글에는 ‘이런 아이가 착한 아이에요.’하는 도덕교과서 같은 교조적인 태도가 담겨있다. 이 답답함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지원이와 병관이는 착한 아이들이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자신의 실수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너무도 착한 아이들이다. 흔히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모습이 이 아이들에게 온전히 담겨 있다.
부모는 아이들의 삶의 방식과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배움의 과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배움의 과정에서 지원이와 병관이는 너무나 수동적이다. 부모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많다. 이야기에서 지원이와 병관이는 어른의 충고와 꾸짖음을 통해 잘못을 깨닫는다. 또 어른을 통해 삶에 대한 가치관을 세우고 살아가는 방식을 배운다. 삶의 순간에 적극 부대끼고, 그 과정에서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고, 스스로 자신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병관이가 놀이터에서 5천원을 주웠다.(《거짓말》중에서) 주운 돈으로 야광 요요를 사고 누나와 컵떡볶이를 사 먹었다.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는 비밀로 하려 했지만 결국 엄마에게 들키고 만다. 병관이는 누나와 함께 꾸중을 듣고 벌을 선다. 처음에는 천 원을 주웠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이내 5천원을 주워 요요도 샀음을 솔직히 말한다.
병관이가 실수를 했다. 부모님이 병관이의 잘못을 꾸짖는다. 해결책을 제시한다. 병관이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이야기지만, 답답하다. 그 이유는 병관이의 이야기 속에 아이다움을 가르치는 어른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병관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부모가 있다.
“어쩌자고 주운 돈으로 맘대로 장난감을 사. 너 경찰 아저씨한테 가야겠다.”
“돈을 주었으면 먼저 큰 소리로 주인을 찾아봤어야지... 그리고 병관이는 벌로 다음번 생일 선물 없다.”
돈을 주운 것이 왜 잘못이 되는지 또는 자신이 왜 거짓말을 하게 되었는지 따위의 병관이의 고민과 성찰이 끼어들 틈이 없다. 부모의 권위에 의해서 도덕 기준이 정해지고, 그에 따른 처벌을 받음으로써 병관이는 반성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병관이는 덩치 큰 우진이가 짝꿍 한솔이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싸워도 돼요?》 중에서)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우진이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고민하던 병관이는 아빠에게 묻는다.
“우진이라고 덩치 큰 앤데요. 나하고 내 짝꿍을 꼬마라고 놀려요.”
“놀린다고 싸우면 어떡하니? 참을 줄도 알아야지.”
“걔가 먼저 때리려고 하면요?”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함부로 주먹을 쓰면 안 돼. 주먹은 정의로운 일에만 쓰는 거야”
부당함에 고민하는 병관이에게 아빠는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답한다. 그리고 주먹은 정의로운 일에만 써야 한다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여기에서도 도덕 기준을 정해주는 것은 부모다. 하지만 병관이는 결국 우진이와 싸우게 된다. 싸움을 한 둘은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다시는 친구를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친구를 때리지 않겠습니다.”라는 반성문을 쓰게 된다.
자신이 처한 부당함에 참는 것도, 맞서는 것도 답이 될 수 있다. 아빠가 병관이에게 전해 준 조언을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병관이는 아빠의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병관이는 왜 아빠와 대화 이후에 우진이와 싸우는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여기에서도 병관이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순간에 스스로 결심하고 선택하는 과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서도 아이의 갈등 상황을 맺어 주는 것 역시 어른이다. 선생님은 싸움을 한 병관이와 우진이에게 모두 반성문을 쓰게 했다. ‘싸움을 했으니 너도 잘 못이고, 너 또한 잘못이다.’라는 선생님의 태도가 아쉽다. 아이들의 갈등의 맥락을 살펴보고 스스로 해결책을 찾도록 북돋아 주는 어른의 모습이었다면 어땠을까?
세상에 정답은 없다. 모순으로 가득하다. 너무도 복잡해 머리가 아프다. 뒤엉켜 있는 정의와 불의를 판단해야 하고, 무수한 갈등과 만나 부대껴야 하며, 내가 품은 답이 과연 옳은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곧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름답고 정의로우며 긍정적인 것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의 어느 한 면만을 보여주려 애쓴다. 또 어느 한 면은 보여주지 않으려 애를 쓴다. 이 과정에서 아이에게 ‘아이다움’을 강요하게 된다.
어른들이 ‘아이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아이는 아직 미성숙한 존재이고 나약하다는 믿음이다. 아이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음에 대한 의심이다. 이는 곧, 어른들이 답을 정하고 그 정해진 답들을 아이가 고스란히 가슴에 품기만을 바라는 태도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아이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솔로 강아지’의 논란에서 보인 어른들의 분노는 어쩌면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부끄러움은 아니었을까? 누군가를 밟지 않으면 내가 밟힐지 모른다는 불안감. 경쟁에서 낙오되면 자신은 가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잔혹한 경쟁을 선택한 우리 사회의 어리석음을 한 초등학생 꼬마아이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들켜버린 것이다.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분노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른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오묘한 세상을 아이들도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얹혀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부대끼며, 세상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음을.
아이들 또한 모순과 상처를 품을 만한 지혜를 지녔다. 그리고 스스로 선택을 하고 성장을 할 힘을 지녔다. 어른들은 이를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한 강의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 누르지 말자. 삼십년 사십년 뒤진 옛사람이 삼십 사십년 앞사람을 잡아 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 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어른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이러이러 해야 한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른의 역할은 아이들과 함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아이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지하고, 아이 스스로가 삶과 부대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 아닐까. 어른과 아이는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동지(同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