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시민연대 심포지움'이 2015년 5월 30일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에서 열렸습니다. 심포지움의 주제는 '어린이책에서 어린이 짚어보기'이며,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길벗어린이)를 중심으로 최근 어린이책에서 어떻게 어린이를 나타내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발제는 조은숙(춘천교대 교수), 김은호(성미산학교 교사), 서정홍(농부시인), 수수-류수민(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변춘희(어린이책시민연대 정책지원부장) 총 5명이 맡아주셨습니다. 발제문 전문을 게재합니다.
지원이와 병관이네 ‘일상’ 이야기에 도대체 왜 끌리지?
조 은 숙 (춘천교대)
1. 왜 재미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고대영 글, 김영진 그림, 길벗 어린이, 이하 ‘시리즈’로 약칭)의 매력에 흠뻑 빠진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제1권 『지하철을 타고서』가 나온 것이 2006년이니, 거의 10년 동안 시리즈물을 내고 있는 셈인데, 아직도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여전히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시리즈의 어딘가에 독자를 끌어당기는 강한 자력이 흐르고 있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도대체 그게 뭘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평소 이런 종류의 책에 큰 호기심을 느끼지 않는 편이다. 만약 이 시리즈가 도서관이나 서점 서고에 다른 여러 책들과 함께 꽂혀 있었다면 아마도 다른 책들부터 뽑아 들었을 것 같다. 『두발자전거 배우기』, 『집안 치우기』, 『용돈 주세요』, 『거짓말』과 같은 제목부터가 어쩐지 아이들에게 올바른 생활 습관을 익히게 하거나 교훈을 전해주기 위해 이야기의 틀을 빌린 ‘그렇고 그런’ 작품이 아닐까 하는 일종의 편견이랄까, 선입견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적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괜찮다고 하고, 더욱이 아이들이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좋아하더라는 입소문을 접하게 되면 자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독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못 알아보고 지나쳤던 그 ‘매력’의 실체가 궁금해서라도 다시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다시 천천히 읽어 보면서 얻게 된 결론 중 하나는 이 책의 인기는 특별한 인물이나 기발한 사건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가 잘 알고 너무나 익숙한 ‘그렇고 그런’ 가족의 일상을 담아냈기 때문이라는 역설이었다.
지원이와 병관이네의 ‘일상’ 이야기에 도대체 왜 끌리는가? 그것은 단지 경험의 유사성 때문인가, 그것을 넘어선 또 다른 무엇이 있기 때문인가. 이 그림책을 읽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2. 이 아이들, 못 말리는 표정의 달인들
일단 이 아이들의 표정을 보라. 지원이 병관이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한다. 아이들은 그때 그때의 감정을 솔직하게 얼굴에 드러내며, 뭔가 숨기더라도 오래 감추지 못하는 직설법의 눈매과 입꼬리를 지녔다. 망설임, 당황스러움, 부끄러움, 억울함 등 상황에 따른 다양한 표정을 과장스런 만화 캐릭터같다고 느낄 만큼 커다란 얼굴에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려진 배경과는 달리 인물의 핵심적인 특징과 감정 상태만 부각시킨 과감한 표정 기호는 나이 어린 독자라고 하더라도 작중 인물의 기분이 어떤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뿐만 아니라 이 아이들의 감정은 변덕스러울 만큼 변화가 빠르다. 금세 풀이 죽어 있다가도 맛있는 것 앞에서는 활짝 피어나는 모습은 저절로 웃음이 나게 만든다. 어른스럽게 동생을 챙기다가도 긴장이 풀리자 곧장 울음을 터뜨리는 지원이(『지하철을 타고서』), 용돈 때문에 시묵룩해 있다가도 용돈을 준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뻐하는 병관이 (『용돈 주세요』)의 모습은 솔직하고 건강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아이다움’을 두 아이는 잘 갖추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혹시 이처럼 아이들의 표정이 복잡하고 뒤숭숭하지 않기를 바라는, 아직은 잘 읽을 수 있는 단순하고 선명한 텍스트이기를 바라는 것은 어른들의 바람이 아닐까. 어른들의 칭찬에 힘을 얻어 더 잘 하고 싶은 것도 아이들의 마음이지만(『칭찬 먹으러 가요』), 그런 마음을 훤하게 들키고 싶지 않은 한편의 자존심도 촘촘하게 그려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3. 생활공간의 크기와 밀도
이 시리즈가 일상을 다룬다고 할 때, 그 생활의 공간이 어떻게 그려지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단 이 이야기 공간의 생생한 실감은 그야말로 ‘깨알같은’, PPL처럼 들어있는 구체적 묘사에서 비롯된다. 시리즈의 배경은 주로 아파트, 놀이터, 마트, 학교, 공원 같은 곳으로 도시의 아파트 생활을 하는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풍경이며, 이들은 마치 사진이라도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우리의 생활 풍경이 이토록 흡사한 것은 우리가 소비하는 품목들이 유사한 데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 지원이네가 마트에서 담아 온 시장바구니에는 신라면, 오뚜기 옛날 당면, 동원 참치, 샘표 간장, 롯데 자일리톨 껌 등이 들어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경험의 유사성은 작중 상황이 우리랑 똑같다고 느끼는 공감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흔한 가족, 평범한 일상에 대한 공통 감각은 도시의 30평 안팎의 아파트, 주말에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아이들은 태권도 학원을 다니며 피아노를 배우고, 피자와 소시지를 좋아하는 식성을 가진 4식구로 옮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접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세심하게 다시 옮겨 보여줄 때 우리는 이것을 ‘우리’ 이야기라고 친숙하게 느낀다. 그러나 공감에도 정도와 수준이 있다고 할 때, 1차적인 형태적 유사성에 기댄 공감보다 더 높은 차원의 공감은 유추 가능한 것, 상상할 수 있는 능력으로 공감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끼리’의 직접적인 경험의 유사성에 바탕을 둔 공감은 ‘우리’가 아닌 타자에게 배타적이고 공격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림의 서사에는 글의 서사 공간과는 달리 일상의 숨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지하철 문에 생긴 환상세계로 통하는 비상구는 일상의 틈을 벌리는 틈새 공간이다. 자칫 뻔하게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살려낸 데는 일상의 공간에 환상의 숨은 공간을 그려넣어 서사적 풍성함을 느끼게 만든 그림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매 페이지마다 까메오로 출현하고 있는 귀여운 비밀 친구들도 단조로운 일상의 풍경에 유머를 곁들이는 데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환상은 한정된 일상의 크기를 확장시키고,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평범한 사건에 변화와 밀도를 주는 역할을 한다.
4. 매일의 밀고 당기기
나날의 생활을 되비추어 주는 이야기는 대개 안정감을 주지만, 질문이 많은 능동적인 독자는 만족시키기 어려운 법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원이와 병관이네가 일상의 실랑이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를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용돈, 식단, 청소, 습관 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는 소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일상의 밀당들이 있다.
혹시 이와 같은 과정을 흔하게 벌어지는 방식으로 무심코 묘사하는 과정에서 일상에 스며있는 권력(?)의 관계마저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재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든 일이 아이들의 편보다 엄마와 아빠의 시선에서 모든 일이 해석되고 판단되고 있지는 않았는지(『거짓말』), 아이들과의 갈등에서 지원이와 병관이 부모는 여느 부모처럼 상투적인 협박(?) 명령을 마찬가지로 반복하고 있지는 않았는지(『집안 치우기』)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원이가 엄마의 역할을 대리하면서 했던 말들이 대부분 부정적인 금지어, 명령문이었다는 점을 다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지원이가 할머니댁에 병관이를 데리고 가면서 했던 말을 모두 모아 본 것이다.
○ “야! 같이 가. 엄마가 누나 말 잘 들으라고 했잖아!”
○ “엄마가 비염 때문에 안 된다고 했잖아.”
○ “안 돼, 엄마한테 혼나.”
○ “안 돼, 잘못 넣으면 어떡하려고.”
○ “야! 표 잃어버리면 안 돼!”
○ “병관아! 넘어져, 조심해.”
○ “병관아, 똑바로 앉아.”
○ “저거 보고 세어 봐.”
○ “가지 마, 병관아!”
○ “내려야 한단 말이야.”
○ “야, 같이 가.”
○ “너 거기 안 서? 너 엄마한테 이른다!”
○ “너 정말 거기 안 서? 잡히면 가만 안 둔다!”
5. 공감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공감은 우리 시대의 화두다. 사전적 의미로 공감이란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 정도로 정의된다. 그런데 이렇듯 사회 모든 분야에서 공감의 중요성을 목소리 높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문화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어려서부터 타인에 대한 이해보다는 경계하며 경쟁하는 것을 체득해 나가는 현대의 문화 생태계가 그만큼 위험한 곳이 되었다는 증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가 얻는 인기의 많은 부분은, “나도 그런 적 있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똑같지.”하는 일차적 동질감에서 비롯되며, 이는 일차적으로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그것에 그친다면 우리는 아는 것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것에 머무르고 말지 모른다. 문학은 거울처럼 우리와 우리의 삶을 비춰 추지만 매일의 햇살과 마음에 따라 표정을 달리 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만드는 데에 매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생활, 역사라기보다는 매일의 나날을 다루는 일상의 어린이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작품은 일상 이야기의 위험과 가능성을 함께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일상 그림책의 방향에 중요한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