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좋은 것인가
시민들을 만나 강의할 때 “여러분 책은 좋은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 그러면 대부분 당연한 질문을 왜 하느냐고 쳐다본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토끼와 거북이 우화는 우리에게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그런데 뭍에서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수 있을까? 아주 특수한 사례가 아니면 그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우화는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건을 제시하는데, 이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면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즉 실패한 사람은 노력하지 않은 게으른 사람, 자립과 자조정신이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비틀어 볼 수 있는 사례도 있다. 청각에 손상이 있어 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적어도 집에 들어오면 장애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가족들이 수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밖에 나가면 그는 장애인이 된다. 사람들이 수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성립된다. “청각에 손상이 있는 사람이 장애인이 되는 것은 청각의 손상 때문일까, 사람들이 수화를 배우지 않아서일까?” 마서스 비니어드 섬은 공용어가 수화와 영어이다. 이 섬에서 손상은 장애가 아니라 그냥 손상일 뿐이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가 문제의 원인을 개인으로 보고 개인의 노력과 헌신을 강조한 것이라면 마서스 비니어드 섬의 사례는 사회가 연대성을 통해 개인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관점을 담고 있다.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김도현, 메이데이)와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김원영, 푸른숲)는 이런 관점을 기반으로 해서 쓴 글이다.
영화 <설국열차>를 보면, 윌포드가 타고 있는 앞 칸의 지배층과, 커티스와 민중들이 타고 있는 꼬리 칸의 피지배층이 있다. 윌포드와 커티스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책을 추천할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윌포드는 지배와 피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놓고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책을 추천한다면, 커티스는 구조의 문제를 제시하면서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책을 추천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워드 진은 교육과 책은 절대 중립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책은 나와 나를 둘러싼 공동체에 대한 철학과 의견을 담고 있다. 따라서 어떤 책을 읽는가에 따라 독자는 나름의 세계관을 갖게 되고 실천 방법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나는 책을 가려 읽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책을 읽되 그 책에 의해 ‘생각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즉 그 책의 얘기가 아니라 책을 매개로 나와 나를 둘러싼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앎에 관하여1)
앎에는 두 가지 모델이 있다. 아래 [그림 1]의 왼쪽 그림에서 D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A만큼 아는 사람은 D를 따라가기 위해 B, C 등의 지식을 축적해야 한다. 이 상황에선 D는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선생님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선생님의 학생들이다. 한마디로 말해 선생님의 지적인 노예들이 A, B 혹은 C인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선생님만 생각하면 된다. 즉 “I think”. 나머지는 모두 생각당한다.
[그림 1]의 오른쪽 그림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다’는 전제를 인정한 모델이다. 한 사람은 A와 B를 알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C와 B를 알고 있다. C는 A가 궁금해서 그를 초청해서 강의를 듣는다. 반면 A는 강의하는 과정에서 대화를 통해 C를 배우게 된다. 양자는 서로에게 학생이자 선생님이 된다. 둘은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인식 지평을 넓힌다. 즉 앎은 대화를 통해 함께 세상을 이름 짓는 과정이다. 즉 앎은 “나는 생각한다I think”가 아니라 “우리는 생각한다We think”에서 생겨난다.
두 앎의 모델을 책과 독자와 연관시켜 이야기해 보자. [그림 1]의 왼쪽에서 책을 D로, 독자를 A, B, 혹은 C로 가정해 보자. 여기에서 독자는 책과 저자에 포섭되어 책과 저자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즉 생각은 책이 하고 독자는 생각당하게 된다. 반면 [그림 1]의 오른쪽에서 책은 A, 독자는 C이다. 그렇게 되면 책과 독자는 서로 대화하고 이를 통해 서로 풍부해질 수 있다.
나는 때론 책을 읽을 때 책에 푹 빠져 책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책과 대화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책의 정체도 모르고 생각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윌포드나 커티스처럼 누군가의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을 혼자 할 수 있을까? 나는 혼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론: 차이가 편안히 드러나는 광장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의심해 보아야 한다. 책을 읽고 교육을 받아서 ‘생각하는 나’도 알고 보면 그 책을 추천하고 교육한 누군가에 의해 ‘생각당하는 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토론의 광장에서 진정으로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책은 토론하는 동료들과 함께 읽어야 한다. 독수공방에서 면벽수도하면서 읽는 것보다 함께 차이를 인정하면서 읽는 것이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는 데 지혜와 통찰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토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은 상대방을 전제한다. 상대방은 나와 차이를 갖고 있는 무수한 나들이다. 따라서 토론이란 차이를 편안히 드러내는 과정이다. 무수히 다른 나들과의 토론은 나를 다양한 세상과 대면하게 한다. 이런 차이의 드러남을 통해 나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토론은 토론하는 동료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이런 나와 나들이 모여 나, 우리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공동 성찰이 이루어진다. 그 과정은 나와 우리의 공동체를 찾는 여행이다. 이런 점에서 토론은 차이 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진정한 토론은 인생을 소풍 길로 인도한다.
하지만 모든 토론이 좋은 것은 아니다. 토론을 가장한 검열과 홍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림 1]의 왼쪽 그림에서 D는 A, B, C에게 토론을 하라고 한다. 이 토론은 D를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도구적인 것이다. 한편, 토론을 가장한 경쟁과 과시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100분토론>이 그런 것인데, 이 토론에서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은 공동 성찰을 하기보다 자신을 과시하고, 홍보하고, 전시한다. 이런 토론은 우열을 드러내는 도구이고, 상대를 죽이는 무기이고, 공동체의 자유와 비판을 억압하는 압제의 감시탑이다. <표 1>은 좋은 토론과 나쁜 토론의 방향과 태도를 보여 준다.
따라서 토론에서 지켜야 할 것은 나쁜 토론으로 귀결되는 일체의 것들에 대한 경계이다. ‘당신의 이야기는 어폐가 있다’거나 ‘당신의 이야기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차이를 우열로 만들지 않아야 하고, ‘나는 당신들하고 차원이 다르다’라는 식의 은근한 과시와 자기 홍보를 하지 않아야 하며, ‘나는 당신의 이야기에 동의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인정하기가 힘들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더 나아가 상대방이 솔직하게 말한 것을 꼬투리 잡아 그를 무시하거나,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전제하에 상대방의 의견을 검열하거나 심사해서는 안 된다. 또한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하려는 비판을 비난으로 받아들여 감정적인 언행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독서는 혼자 지식과 교양을 쌓는 과정이 아니라 토론하는 동료들과 함께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토론의 과정에서 타자를 이해함은 물론 이런 나와 타자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이해하고 개입하는 행위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독서 토론은 책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책을 매개로 해서 나와 타자, 그런 나와 타자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는 통찰과 지혜를 얻는 과정이다. 특히 책은 나와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주선자에 불과한데, 이 책만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삼가야 한다. 이것은 맞선을 볼 때 중매를 선 사람과만 하루 종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책은 토론하는 동료들을 중매하고 점차 사라져야 한다. 그 자리에 토론하는 동료들이 자신의 삶과 고민 그리고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를 주제로 이야기꽃이 피어나야 한다.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2)
나는 책이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주는 근본적인 물음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질문, 성찰 그리고 상상을 주는 책이 좋다. 질문은 상식이라고 여겨 온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성찰은 이 질문으로 내가 살고 있는 주위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상상은 이 공동체가 보다 나은 세상이 되도록 상상할 수 있는 책이다.
근본적인 물음과 관련하여 나는 《지금은 없는 이야기》(최규석, 사계절)를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현재의 상식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믿는 상식은 누군가가 자신의 주장을 상식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이 질문을 통해 《지금은 없는 이야기》는 나와 우리 주위 세계를 성찰하고 그리고 새로운 상상의 길로 인도한다.
또 다른 책으로 《푸른 눈, 갈색 눈》(윌리엄 피터스, 한겨레출판사)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신체적 차이에 따른 차별 실험을 보여 준다. 교사 엘리어트는 갈색 눈과 푸른 눈의 학생들로 나누어 신체적 차이가 우열과 연관성이 있다고 선언한 후 학생들 간의 관계를 살핀다. 이 책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 혹은 상식이 사실은 누군가에게는 비상식, 폭력, 억압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판단이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내 공동체에 대한 성찰과 관련하여서는 《의자놀이》(공지영, 휴머니스트)와 《철수 사용 설명서》(전석순, 민음사)를 추천하고 싶다. 《의자놀이》는 저자가 쌍용자동차 파업과 그 이후 해고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절규가 어떻게 현실화되고 있는지를 추적하고 있는데,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최근 관심을 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 《미생》(윤태호, 위즈덤하우스)이 현재 한국 사회의 성찰의 화두를 제공해 주는데, 《의자놀이》는 이런 한국 사회의 자화상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이다. 《철수 사용 설명서》 또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통로이다. 이 책은 그 사회의 현실에 적응하려고 몸부림치는 청년 철수를 보여 준다. 이 과정에서 점차 고유한 철수는 사라지고 규격화되고 소진된 철수가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희망은 있는가? 나는 새로운 상상을 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책으로서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와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강무홍・김효은, 양철북)를 추천하고 싶다. 전자가 앞서 언급했듯이 마서스 비니어드 섬의 상상을 논리적이고 현실적으로 짚어 주는 책이라면 후자는 토론하는 두 동료가 그들이 살아온 과정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토론하는 동료로 세상을 대면할지를 말해 준다.
독서, 토론하는 동료와 함께 나를 찾아 떠나는 즐거운 소풍 길
책은 교양과 정보의 보고이기도 하지만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매개자이기도 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했던 <베버리지 리포트>는, 이 리포트를 가지고 도처에서 토론하는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현실이 되었다. 베버리지 리포트가 나왔을 때 50~60명 규모의 시민들이 영국 전역의 술집, 교회, 학교 강당에서 등화관제나 때론 폭탄도 무서워하지 않고 토론을 했다. 또한 서유럽이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토론하는 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북유럽의 민주주의를 독서동아리 민주주의study circle democracy라고 한다. 독서동아리가 일상화되어 있고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참여와 태도가 학습되고 실천되기 때문이다.
나는 독서가 자신만의 만족을 위한 행위를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책을 매개로 해서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이웃의 동료와 함께 깊이 대화할 때 나는 세상이 조금씩 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독서는 토론하는 동료와 함께 나와 우리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즐거운 소풍 길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제도 정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읽고 토론하는 시민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실천할 때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