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도서관 운동가 엄대섭 선생이 태어난 지 100년 되는 해입니다. 때맞춰 ‘엄대섭 연구’로 학위를 받고 현재 울산 매곡도서관에서 일하는 최진욱 사서가 《공공도서관 엄대섭이 꿈꾼 지식나눔터》를 출간했습니다. 책에 실린 2012년 11월 9일 토크콘서트 〈엄대섭, 도서관에 바친 혼〉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출연
이용남(전 마을문고진흥회 사무국장, 한성대 명예교수)
장석순(전 합천 묘산도서관장)
이용재(부산대 문헌정보학 교수)
정선애(전 대한도서관연구회 간사, 관악문화관도서관 사서과장)
사회
안찬수(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처장)
사회
지금부터 〈엄대섭, 도서관에 바친 혼〉 토크콘서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안찬수입니다. 책읽는사회문화재단에 대해 아세요? 이곳 울산 북구에도 세워진 ‘기적의도서관’ 사업을 주도했고, ‘북스타트’라고 하는 영유아들을 대상으로 책 읽는 습관을 기르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엄대섭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엄대섭 선생님을 오랫동안 보좌하고 함께해오셨던 이용남 교수님을 모시겠습니다. 교수님 나오십시오. 교수님은 이번 행사가 무척 감회가 깊으실 텐데 간단한 소감을 말씀해주시죠.
이용남
엄대섭 선생님을 오랫동안 모셨던 이로서 선생님에 대해서는 마음의 빚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나신 이곳 울주에서 이런 행사를 만들어주신 데 대해 무척 고맙습니다.
사회
교수님은 학교 다닐 때 처음 엄대섭 선생님과 인연을 맺어 평생을 선생님과 함께하셨는데,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까?
이용남
제가 연세대 도서관학과를 나왔어요. 지금은 문헌정보학과지요. 당시는 우리나라에 도서관학과가 이화여대하고 연세대 두 군데밖에 없었어요. 이 학생들이 마을문고운동을 많이 도왔습니다. 우리로서는 그것이 아주 당연한 것이었지요.
사회
그때 같이 하셨던 분이 누구입니까? 혹시 우리도 알만한 분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죠.
이용남
한상완 연세대 교수가 대표적이죠.
사회
대통령 직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장 지내신 분 말이시죠?
이용남
엄 선생은 틈만 나면 제대로 공부를 한 이들이 마을문고를 맡아주셨으면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우리는 마을문고 진흥회에 일이 있으면 가끔씩 도와주곤 했지요. 엄 선생은 은근히 한상완하고 나 둘 중에 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상완 교수는 곧바로 대학원에 진학해버리고 내가 마을문고의 일을 하게 되었지요.
사회
엄 선생님은 흔히 말하는 자수성가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엄 선생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이용남
선생님은 아주 어려운 가정의 장남으로 나셨어요. 특히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셔서 초등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치고 중퇴할 수밖에 없었어요. 도서관 이용과 책 읽기는 유일한 낙이었다고 합니다.
사회
그 당시면 시기상으로 1930년대인데 일본에는 도서관이 많았나요?
이용남
일본은 1900년대 초부터 초등학교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있었고, 이미 1930년대 전국에 2천 개가 넘는 공공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각지에도 일본인들이 세운 ‘독서구락부’라는 도서관이 많이 있었지요.
사회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공공도서관인 부산시민도서관도 일본인들이 세운 독서구락부가 그 뿌리죠?
이용남
네.
사회
막연히 도서관을 이용하고 책만 읽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이용남
선생님은 책에서 깨달음을 얻었어요. 이것저것 읽다가 책 구절 가운데 “남들과 똑같은 것을 해서는 성공할 수가 없다.”는 구절을 읽고 남다른 것을 생각해냈지요. 무얼 할까 고민한 끝에 생각한 것이 헌옷 수집 사업이었어요. 당시 일본이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하던 1930년대 후반이라 물자가 귀했거든요. 그런데 부잣집에서는 다른 사람들 눈치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집에 쌓아놓은 헌옷이 아주 많았어요. 그걸 아주 싼값에 사서 서민들에게 팔았지요. 그 사업 2년 만에 일본 고베 시내 헌옷은 거의 대부분을 수거했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많은 돈을 벌었어요.
사회
그때나 지금이나 헌옷 수집이 꽤나 돈이 되는 사업 같군요. 얼마 전 뉴스를 보니 헌옷 수집함을 놓고 그 운영권을 서로 맡으려고 장애인단체끼리 싸웠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엄 선생님 그때 나이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용남
우리 나이로 19살 무렵이었을 거예요. 부모님들은 가난 때문에 일본으로 떠나면서 늘 입버릇처럼 “논 열 두락 살 수 있는 돈만 있으면 고향 갈 텐데.”라는 말씀을 하셨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번 돈으로 고향 가까운 경주에 논을 사고, 경주 시내 집을 사고도 돈이 남아 울산 강동에 멸치어장도 샀다고 합니다.
사회
혹시 그때 엄 선생님이 사셨다는 논이 어디쯤인지 아십니까?
이용남
경주군 현곡면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지도에서 찾아보니 지금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부근으로 추정됩니다.
사회
그때면 전쟁이 한창일 때인데 바로 귀국을 하셨습니까?
이용남
아니요. 일단 부모님과 동생들은 귀국을 시켜놓고 혼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다른 사업도 조금씩 하면서 야간 상업학교에 다니시고 혼인도 하셨지요. 지금 미국에 계신 아드님도 일본에서 낳으셨습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귀국을 하셨지요.
사회
귀국하신 뒤에는 무얼 하셨습니까?
이용남
일단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으니 이것저것 사업구상을 하기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학교설립도 생각해보셨다고 합니다.
사회
그러면 어떻게 도서관운동을 하게 되셨습니까?
이용남
그때 가족들은 경주에 있고, 선생님과 사모님은 부산에 사셨어요. 사모님께서 부산진 시장에서 단팥죽 장사를 하고 계셨거든요. 그 가게에 딸린 방에 살면서 동아대학교 법학과에 다니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언제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어요. 틈만 나면 책을 사 모으는 것이 취미셨지요. 그때도 헌책방을 돌면서 관심이 있는 책을 몇 권씩 사고 있었어요.
사회
부산의 헌책방 하면 지금도 유명한 보수동 헌책방 골목 말씀이세요?
이용남
아마 그럴 거예요. 거기서 일본어로 쓰인 《도서관의 실제적 경영》이라는 책을 만났어요. 이 책을 보면서 충격을 받으신 거죠. 그 책만 몇 달 동안 되풀이해서 읽으셨다고 해요. 그리고는 도서관운동을 하겠다고 결심을 했지요.
사회
사모님은 반대를 안 하셨답니까?
이용남
그때는 반대를 안 하셨어요. 선생님이 살아오신 것을 아시니까. 더구나 일본에 있을 때 하신 말씀이 있으시거든요.
사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용남
일본에서 혼인을 하신 선생님은 처가가 있는 도쿠야마에 갔을 때 당시 성주가 자신의 집을 사립도서관으로 만들어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해놓은 것을 보고 막연하게 자신도 나중에 이런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고, 그때 사모님이 흔쾌히 동의를 하셨거든요.
사회
지금까지 말씀을 들어보면 도서관운동을 하더라도 사모님과 함께 살고 계시는 부산이나, 아니면 가족이 있는 경주에서 시작하셔야 하는 것이 맞는데 어떻게 울산에서 시작하셨습니까?
이용남
부산은 그때도 엄청난 대도시였고 경주에서 할까, 울산에서 할까 고민하셨어요. 그런데 그때는 울산이 경주보다 더 농촌지역으로의 색깔이 짙었다고 합니다. 경주는 이미 관광지로 이름이 나 있었거든요. 도서관 본래 목적이 정보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농촌지역이던 울산에서 시작한 것이죠.
사회
그래서 울산에서 시작한 것이군요. 울산 어디쯤이죠?
이용남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하고요. 당시 울산시외버스터미널 근처라고 합니다.
사회
어떤 식으로 운영했습니까?
이용남
장서 개발이나 자료 조직, 운영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책을 읽고 시작하셨기 때문에 최소한의 원칙은 가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건 당신이 책을 읽어온 방식이기도 합니다. 어떤 책이든 무작정 읽어왔고, 많은 책을 읽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는 방식이었지요. 그래서 비치했던 책 3천 여권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일본어로 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사회
어찌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겠네요. 그때는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우리 글로 된 출판물이 많지 않았을 수 있겠네요. 더구나 선생님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사시다가 오셨지 않습니까? 그럼 도서관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 이용했습니까?
이용남
아무래도 책 구성도 그렇고, 우리 국민 70%가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사회
그러면 선생님이 울산에 도서관을 설립한 목적과 다르지 않습니까? 상대적으로 정보에서 소외된 농촌지역 주민들을 위해 도서관을 만들었는데, 정작 농촌주민들보다는 지식층이 왔다는 것은 의외인데요.
이용남
그래서 선생님이 직접 농촌지역을 돌면서 순회문고를 운영한 것이지요. 당시는 전쟁 중이라 버려진 탄통이 많았어요. 이 탄통은 책을 보관하기 안성맞춤이에요. 조금 무겁긴 하지만, 책 30권 정도를 담고 다니면 밀폐되어 비에 젖을 염려가 없지요.
사회
그게 오늘 전시되어 있는 울산도서관 순회문고함이군요.
이용남
그렇지요. 그걸 자전거에 싣고 농촌지역으로 직접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사회
그런데 울산도서관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51년 여름에 시작해서 1953년 경주로 갔으니, 2년 정도밖에 운영을 못 하셨어요. 왜 그랬습니까?
이용남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도서관 이용자들이 주로 학생과 지식인들이고, 당시로는 생각도 못 하는 무료로 운영했잖아요. 그래서 경찰의 감시가 심했습니다. 이용자들이 읽은 책을 파악하고, 책을 압수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경찰에 불려가기도 했습니다. 또 주변 사람들로부터 정치에 나오려고 그런다는 의심도 받았습니다.
사회
저도 책읽는사회문화재단에서 일을 하면서 전국 각지의 작은도서관 활동가들을 만나고 이야기도 해봅니다만 요즘도 그런 목적으로 도서관을 운영하는 이들이 드물게 있긴 합니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요.
이용남
그런 감시가 싫어서 선생님은 당시 울산읍장을 찾아갑니다. 울산읍장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과 시설을 기부할 테니 울산읍에서 운영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렇지만 거절당하지요.
사회
울산에 제대로 된 도서관이 설립된 것이 1984년에 설립된 지금의 울산중부도서관이니까 만약 그걸 울산읍에서 받았다면 울산의 공공도서관 역사가 30년은 앞당겨졌을 텐데 아쉽네요.
이용남
그렇지요. 울산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업도시이자, 광역시로 성장한 대도시인데 도서관 인프라 구축은 많이 늦었지요.
사회
그래서 그 시설을 가지고 경주로 가셨군요.
이용남
경주로 가서 경주읍장하고는 이야기가 잘 되었지요. 그리고는 경주도서관을 설립하고 무보수로 경주도서관장을 맡았지요. 여기서도 울산에서 하던 농촌지역 순회문고를 계속 운영했어요.
사회
엄 선생님이 초대 한국도서관협회 사무국장을 하셨지요. 어떻게 맡게 되었습니까?
이용남
1955년에 전국도서관대회가 서울에서 열렸어요. 그때 경주도서관장 자격으로 참여하셨지요. 가서 보니 선생님 마음에 썩 들지 않았나 봐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국이 어수선했고 도서관 상황은 더욱 심했지요. 우리나라 도서관계를 이끌어 가시던 이재욱, 박봉석 선생 두 분이 전쟁 중에 납북되셨으니 도서관계를 제대로 이끌어갈 분들이 안 계셨어요. 그때 엄 선생님은 지방에서 올라왔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사업을 하다가 도서관 운영에 뛰어드신 분이기 때문에 도서관을 공공경영 측면에서 이야기를 하셨고, 또한 자신의 오랜 경험을 통해 여러 가지 해결책도 내놓으셨어요. 그것이 그 자리에 모인 도서관인들의 관심을 받았지요. 또한, 한번 생각을 굳히면 확실하게 밀어붙이는 성격이셨어요. 그 자리에서 도서관협회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한 거지요. 그러니 자연스레 도서관협회가 설립되면서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지요.
사회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화여대 도서관장을 지내신 이봉순 선생님의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더군요.
이용남
국립중앙도서관장이던 조근영 씨가 협회장을, 엄 선생님이 사무국장을 맡기로 해놓고 협회 간부들을 모셔야 했는데, 이봉순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미국에서 도서관학을 전공하고 오셔서 당시 이화여대 도서관장을 맡고 계셨지요. 그런 분이 꼭 협회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설득하셔서 이봉순 선생이 협회 전무이사를 맡았지요. 이봉순 선생을 설득하기 위해 얼마나 찾아갔는지, 그 집요함에 굴복당하셨다고 해요.
사회
그런 의지와 노력이 오랫동안 도서관운동을 해오신 동력이군요. 경주도서관장 일도 같이 하셨지요? 도서관협회를 하시면서 주력하신 일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용남
국립중앙도서관 복도 한쪽을 막고 책상과 전화기를 갖다 놓고 협회를 꾸리셨어요. 심지어는 협회 운영비도 선생님이 대셨어요. 그러면서 제일 먼저 도서관 강습회를 개최해서 도서관인들을 교육했습니다. 그리고 도서관법 제정 작업도 하셨고, 당시 문교부와 함께 농촌 책보내기 운동도 하셨습니다.
사회
도서관법은 그때 바로 제정되지 못하고 8년 뒤 제정되었고, 농촌 책보내기 운동은 나중에 선생님께서 마을문고를 창안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거지요?
이용남
선생님은 경주도서관장직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촌 책보내기 운동을 하면서 꾸준히 경주지역 농촌에 순회문고도 운영하고 계셨어요. 농촌 책보내기 운동의 진행과정을 꾸준히 점검하고 계셨던 겁니다.
사회
어떻게 생각해보면 선생님께서 도서관협회를 만들고 초대 사무국장을 맡으신 것은 그런 농촌문고 운동에 주력하기 위해서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용남
저도 미처 거기까지 생각을 하진 못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면이 적지 않게 있었을 겁니다. 사무국장을 맡은 기간 5년 동안 도서관협회에서 가장 꾸준히 펼친 사업이 강습회와 농촌 책보내기 사업이거든요. 그리고 마을문고 창안을 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을문고운동에 매진하신걸 보면요.
사회
교수님 말씀을 듣고 보니 선생님은 자신이 책을 통해 자수성가한 경험을 평생 나누려고 하신 분 같군요. 당시 농촌은 여러 면에서 어려웠지 않습니까?
이용남
네, 그때는 문맹율이 50% 가까이 되었어요. 농촌 책보내기 운동도 글자를 깨친 사람들이 다시 글자를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사업이었거든요. 그러려면 책을 꾸준히 읽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단순히 책만 보내준다고 모든 게 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책만 보내주면 뭘 합니까? 책을 보관할 시설과 관리할 사람도 제대로 없는데!
사회
그래서 스스로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마을문고를 창안하신 거군요. 이 마을문고는 어디서 처음 시작하셨지요?
이용남
경주 탑리라고 지금 오릉이 있는 탑동입니다. 선생님은 앞서 말한 것처럼 경주도서관을 운영하시면서 꾸준히 지역 농촌지역에 순회문고를 운영하고 계셨어요. 거기에 농촌 책보내기 사업이 더해진 것이지요. 그런데 농촌지역을 돌아다녀보면 보내진 책들이 제대로 활용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했지요. 그리고는 주민들이 스스로 운영할 수 있는 마을문고를 창안하신 겁니다. 탑리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운영할 수 있게 마을문고함을 설치하고, 거기에 기본도서 30여 권을 비치하고 운영을 주민들이 직접 하도록 했지요. 그것이 성과를 거두자 자신감을 얻어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지요.
사회
마을문고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습니까?
이용남
앞쪽에 문고함 실물이 전시되어 있지만, 약 300권 정도의 책이 들어가고, 간단한 비품을 넣을 수 있는 서랍 1개, 잡지나 신문을 보관할 수 있는 서랍 1개 이렇게 구성되어 있지요.
사회
도서관의 열람실, 사무실, 정기간행물실 이런 기본 시설을 축소한 것이군요.
이용남
네, 맞습니다. 도서관의 시설을 줄여서 그대로 옮겨 온 것이 마을문고지요.
사회
선생님은 마을문고를 보급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지요?
이용남
마을문고를 전국적으로 보급하기 위해서는 서울에서 활동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정치, 사회, 경제 모든 중심이 서울에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경주도서관장직도, 도서관협회 사무국장직도 내려놓고, 경주에 있는 땅도 팔아서 서울 미아리에 집을 구하고 거기 아래채에서 마을문고 보급회를 시작했습니다.
사회
그렇지만 처음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실제 기록을 봐도 초기 1년 동안 설치한 문고는 얼마 되지 않았지요?
이용남
네, 알음알음으로 설치를 했지만 기대한 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문교부의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문교부로 날마다 찾아갔지요. 그런 모습이 출입기자들 눈에 띄어 언론사들이 사고를 내어 문고설립 운동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관에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마을문고 설립도 본격화되었지요.
사회
선생님은 그때부터 언론의 힘을 알게 된 것이군요. 기록을 보면 선생님은 언론에 투고를 아주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언론 인터뷰도 많이 하시고. 심지어 나중에 대한도서관연구회 시절에는 언론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하신 것 같아요.
이용남
맞습니다. 우리 도서관 관련 인사들 가운데 선생님만큼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신 분은 없을 겁니다.
사회
마을문고가 다른 나라에는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운동이었고, 또한 20년 이상 많은 부침 속에서도 이어갈 수 있었다면 몇 가지 원인이 있을 텐데,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용남
첫째, 민중도서관운동, 둘째, 지식대중화의 구현, 셋째, 적극적인 도서관봉사, 넷째, 소도서관운동이라고 이렇게 오래전에 네 가지 이념을 정리했었지요. 이것은 선생님께서 직접 정의하신 건 아니고, 제가 일을 하다 보니 이런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사회
저는 마을문고운동을 대표하는 말 가운데 마을문고 창립 5주년을 기념해서 유공자에게 나누어준 기념 메달 뒷면에 새겼다는 문구 “책으로 민중이 눈뜨는 날 이 한 조각 구리쇠는 어찌 순금에 비기리”란 말이 참 인상에 남습니다. 책을 통해 자신이 처한 환경을 좀 더 나은 쪽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참 좋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