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기준을 둘러싸고 논란이 불거진 세종도서 문학 부문 사업과 관련한 토론회가 2015년 2월 24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도종환 의원실과 김태년 의원실에서 공동주최하고, 한국작가회의에서 주관한 <문학의 공공성과 표현의 자유> 토론회에는 문화체육관광부의 김일환 출판인쇄산업과장과 문학평론가 고명철 광운대 교수가 발제자로, 시인 신용목과 소설가 백가흠 그리고 이광섭 ‘문학의집 서울’ 사무국장이 토론자로 나서 열띤 공방을 벌였습니다. 고명철 교수의 발제문 <'좋은/우수'문학에 대한 정부의 창조적 고민은 요원한가?>를 아래에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1. 건강하고 성숙한 문화정책이란?
문화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생득적으로 기피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정책’이라는 용어인데, 이 용어로부터 막연히 떠올리게 되는 ‘규제, 배제, 선택, 집중, 기획, 집행, 입안, 실행’ 등과 관련한 법률적 의미의 맥락들은 우리의 뒤틀린 근대의 역사적 경험과 맞물리면서 문화예술인들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용어로 각인돼 있습니다. 20세기 전반기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아래 구현된 제국의 문화정책, 해방 이후 미군정美軍政에 의해 주도면밀히 펼쳐진 미국 문화의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한 문화정책, 5.16 군사쿠데타 이후 유신체제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 분야에 광범위한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한 반공주의 문화정책, 1980년대 내내 민주주의 회복과 분단극복을 위한 민족민주운동을 압살한 온갖 파시즘적 문화정책 아래 문화예술은 그 특유의 미적 자율성을 보장받지 못한 채 제국과 국가의 정치적 시녀로 전락한 치욕의 경험을 안고 있습니다.1 그만큼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문화와 정책의 결합은 문화 본래의 가치가 존중받는 게 아니라 정치의 차원으로 흡수되는, 그리하여 국가의 통치 행위에 문화적 정당성을 보증받기 위한 정치적 차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대부분 인식해온 게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화정책이 “한 사회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물적 자원, 인적 자원의 최적 이용을 통해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작위나 부작위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2임을 주목해보건대, 지금까지 문화정책에 대한 불신과 혐오에 붙들린 채 문화정책 전반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를 갖는 것은 결코 슬기롭고 현명한 대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근대적 자본주의와 더불어 그 운명을 함께 하고 있는 국민국가란 정치체政治體가 존속하는 한 각종 정책들 속에서 문화정책을 애써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문화정책을 강구해야 하고, 그것을 어떻게 내실 있게 실천하는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여기서 다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국가와 문화정책이 갖는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앞서 잠시 살펴보았듯, 그동안 우리의 문화정책은 국가의 여러 정책 중 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국가 통치의 일환으로 문화정책이 입안되고 실현되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온갖 부정적 요인이 발생하고, 그것이 도리어 우리 문화의 아름다운 가치를 퇴색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때문에 문화정책은 다른 정책들과 다른 점에 각별한 주의를 요구하는데, 만약 국정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방법적 수단의 차원으로 문화정책을 인식한다면 대단히 위험하고 잘못된 인식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해두고자 합니다.
건강하고 성숙한 문화정책이란, 국민의 삶의 질적 가치를 높이려고 노력하되, 여기에는 국가의 정치체政治體를 더욱 굳건히 하는 차원과 전혀 다른, 국가의 개별 구성원들이 자율적 심미적 주체의 하나로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창의적으로 발견하는 과정 속에서 근대적 국가의 정치체 바깥 너머를 과감히 상상하는, 그리하여 근대 국민국가의 반복적 일상에서 창조적으로 벗어나는 미의 가치와 한데 어우러져 자연스레 탈근대의 세계를 꿈꾸도록 도모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2. ‘순수주의’ 문학을 넘어선 ‘문학적 진실’
이처럼 건강하고 성숙한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강구되고 실행되어야 할 문학정책의 일환 중 ‘2015년 세종도서 우수문학도서’ 선정 기준은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로 약칭)는 ‘2015년도 세종도서 선정사업 추진방향’에서 우수문학도서 선정 기준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서로 밀접히 연동돼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문학 작품㉡ 예술성과 수요자 관점을 종합적으로 고려, 우수문학의 저변 확대에 기여할 작품㉢ 인문학 등 지식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며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도서
사실, 위 세 가지 기준을 놓고 말한다면, 우수문학도서를 선정하는데 ㉡ 하나로 충분합니다. 말 그대로 ‘우수문학’ 도서를 선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선정 절차는 문체부가 기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전문성과 공정성을 갖춘 심사 제도를 통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체부가 이 전문성과 공정성에 신뢰를 갖지 못하고 ‘간섭’을 하겠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것이 바로 ㉠, ㉢과 같은 선정 기준인데, 아무리 문체부가 이와 같은 선정기준을 두고 “선정위원 대상의 오리엔테이션 내용의 일부이며 이전에도 관행적으로 이런 기준이 책관련 선정 사업에 사용됐다고”하고, “‘특정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 문학작품’이라는 문구는 공익성과 보편성을 담은 도서콘텐츠를 국민에게 보급함이 사업 취지와 목적에 부합한다는 기본 원칙하에 담당과인 출판 인쇄산업과 내부에서 실무적으로 검토 중이던 표현”(정책뉴스, 2015. 01. 27.)이며, “해당 규정은 진보나 보수와는 관련 없이 역사를 왜곡하거나 사회 갈등을 조장함으로써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사업 취지와 맞지 않는 작품을 걸러내기 위한 것”(한겨례, 2015.01.26.)이라고 항변을 하지만, 도리어 이러한 문체부의 발언이 그동안 우수문학도서와 관련한 문학정책의 철학적 빈곤과 문학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행정적 문제점을 스스로 고발한 데 불과합니다.
여기서, 정부의 문학정책 관련자들에게 장황히 동서고금을 통해 문학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문학이 ‘좋은’ 문학인지(문체부의 행정적 표현을 빌리자면 ‘우수문학’인지) 이해를 도와야 할까요? 한국문학 정책 관련자들에게 우리는 언제까지 이 같은 소모적인 문답 시간을 되풀이해야 할까요? 혹시, ‘세종도서 우수문학도서’ 사업을 집행하는 행정 담당자들은 ‘우수문학=어용문학’ 또는 ‘우수문학=무無사상의 문학’ 또는 ‘우수문학=반反/몰沒상상의 문학’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와 관련하여, 하나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최소한 문학정책 관련 담당자들은 ‘좋은/우수’문학에 관한 맥락을 공유했으면 합니다. ‘좋은/우수’문학에서 쉽게 간과해서 안 될 것은 ‘문학적 진실’입니다. 작가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그토록 다양하고 개성적 글쓰기를 통해 그들은 역사와 일상 속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위의威儀 뿐만 아니라 우주만유의 현상과 본질을 형상화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역사와 일상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이상적 가치를 향한 꿈을 꿉니다. 이 모든 과정들 사이에서 우리가 갈등하며 부대끼며 살고 있는 역사와 현실은 통렬한 ‘반성’의 대상이 되고, ‘성찰’의 대상이 되면서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미래를 향한 꿈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우수’문학은 인간과 자연에 상처를 주고 억압하는 그 모든 것을 ‘성찰’하고 그것에 대해 ‘부정의 상상력’을 키워왔습니다. 그 부정의 대상은 경계가 없고 전방위적으로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유무형의 존재들은 물론, 개인-집단-국가도 예외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와 독자가 함께 이러한 ‘좋은/우수’문학을 일상에서 친근히 만나면서 ‘문학적 진실’을 삶의 토양으로 녹여내는 일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좋은/우수’문학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에 대해 큰 이견異見이 없을 것입니다. 그럴 때,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문학 작품’이란 선정 기준이 얼마나 협소한 것인지, 그리고 자칫 이러한 선정 기준이 안타깝게도 ‘반反/몰沒문학’임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며, 이미 이러한 해묵은 문학논쟁을 치열히 치러내면서 한층 성숙해진 한국문학사를 몰각하고 있음을 자처할 뿐입니다. 한국문학은 1960년대 내내 일었던 이른바 ‘순수/참여문학 논쟁’을 거치면서 반공주의와 착종된 문학의 순수주의가 얼마나 시대퇴행적인 것인지를 증명하였고, 이 순수주의가 분단을 영구히 고착시키는 분단기득권을 지탱하는데 주도면밀히 이용되고 있는바, 순수주의를 가장한 도리어 분단을 획책하는 억압적 문학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음을 성찰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같은 순수주의에 눈이 먼 관주도의 한국문학에 대한 통렬한 문제제기를 통해 한국문학은 분단극복과 민주회복이란 과제를 치열히 독자들과 함께 실천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동안 씌어진 한국문학사가 증명해보입니다.
따라서 이 같은 점을 숙고하면서, 시대에 퇴행하지 않고 반反/몰沒문학적이 아닌 ‘세종도서 우수문학도서’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쳤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3. 기초예술로서 문학이 튼실한 국가경쟁력
돌이켜보면, 한국문학이 국가의 문화정책에 대한 어용적 접근이 아닌, 비판적 태도로써 적극적 대응을 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갈수록 시장만능주의의 노예로 전락해가는 기초예술의 위기에 직면하여 60개의 기초예술단체가 연대하여 출범한 ‘기초예술살리기범문화예술인연대’(2004년 4월 2일 출범)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문화정책에 대한 관심에 소홀했던 한국문학은 기존의 무관심과 냉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기초예술의 관점에서 한국문학과 문학정책의 상관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제 한국문학이 더 이상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개별적 몫에 전적으로 의지한 채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예술에 대한 순진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해 한국문학을 시장만능주의에 내맡기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독서 시장에서 잘 팔리는 것만이 살아남고, 그것이 동시대 독자들의 미적 취향에 호소하는 만큼 그러한 작가와 작품들만이 한국문학의 실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그리하여 매우 자연스레 상품미학의 권를 확보한 것들이 한국문학의 전부인 것으로 인식되는, 시장과 적극적 타협을 하는 한국문학이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건강하고 성숙한 문학정책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2105세종도서 우수문학도서’ 선정 기준 중 ‘㉢인문학 등 지식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며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도서’를 선정한다는 데 우려감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국가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도서’가 어떤 것인지요. 설마, 박근혜 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는, 그리하여 ‘창조경제’를 염두에 둔 지극히 실용적인 목적을 겨냥한 것인가요. 아니면, 은연중 국정 운영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문화 이데올로그ideologue로서 문학의 역할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만, 행여 이와 같은 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이것은 결코 ‘2015 세종도서 우수문학도서’ 선정 기준으로 부적합한 것들로, 그동안 거둔 한국 문학의 빼어난 성취에 대한 몰이해가 아닐 수 없으며, 한국문학에 대한 모욕적 문학정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후자에 대해서는 앞서 순수주의가 지닌 시대 퇴행의 문제점을 비판했으므로, 전자에 대해 또 다른 측면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합니다.
저는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것 자체를 전면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어떠한 경쟁력인지, 그 경쟁력의 실체에 대해 숙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학정책을 집행하는데 래디컬하게 성찰해야 할 또 다른 문제의식은 바로 ‘경쟁력’과 관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예술과 관련한 경쟁력을 예술의 부가가치 획득과 결부짓는, 다시 말해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는데 익숙해 있습니다. 특히 최근 각종 문화융합의 붐 속에서 문학을 콘텐츠의 기술적 차원, 즉 문화산업의 측면에서 파악하는 가운데 문학을 시장주의와 제휴시키는 차원에서 국가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의미로 곧잘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측면 일변도로 이해한 문학에 대한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문학정책은 상품미학 일변도의 문학을 양산하는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자유주의 시장주의 풍토에서 대중추수적 문학의 시장 장악력이 강한 것을 염두에 둘 때, 문체부의 ‘세종도서 우수문학도서’ 선정에서 이 같은 경제적 가치 중심의 국가경쟁력 강화가 선정 기준으로 고려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문학사의 면면한 흐름 속에서 시장과 타협을 한 문학이 어떠한 미적 성취를 거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하위체제인 분단체제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시장과 타협을 한 문학이란, (식민지 및 분단) 자본주의의 악무한에 대한 미적 저항을 포기한 것이며, 한반도를 에워싼 세계 열강들의 시장 쟁탈전 속에서 이념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분단문제의 극복을 아예 외면하는 것이며, 우리 스스로 미적 주체의 역량에 대한 자긍심 없이 시장이 요구하는 미학에 주저 없이 투항하는 것이며, 결국 낯익은 세계와 불화하지 않은 채 지금, 이곳에 안주함으로써 우주의 뭇존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은 소멸하고, 현실의 고통을 창조적으로 극복함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향한 꿈꾸기를 원천봉쇄한 것입니다. 대신 시장에서 다양하게 소비될 한층 더 자극적이고 감각적이며 분열적인 내용형식을 갖춘 문학이나 소수의 마니아를 위한 문학이 융숭히 대접받는 문학풍토를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문학은 경제적 측면 일변도의 문화산업 중심으로 국한되는 게 아닙니다. 문학이 ‘창조경제’에 적극적으로 복무하는 게 아닙니다. 문학정책을 강구하고 집행하는 데 근간이 되어야 할 것은 문학을 어떤 쓰임새, 바꿔 말해 경제적 가치의 유무로 환원시켜서는 번짓수를 잘 못 짚은 것입니다. 문학이 국가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데 소외시켜서는 안 되지만, 그 경쟁력 강화가 경제적 가치의 유무로 환원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문학은 예술생태계의 차원에서 문학정책으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즉 ‘문학=기초예술’을 시장만능주의로부터 보호하고, 기초예술의 가치가 사회적 가치로 심화 · 확산되기 위해서는 주도면밀한 지원 정책이 절실히 요구되는데, ‘세종도서 우수문학도서’ 사업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국가경쟁력은 자연스레 강화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고민에 동참하고 그 갈등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에 대한 문학적 진실을 치열히 탐구하면서 현실의 고통 너머를 기획하는 문학을 한 사회의 근간으로 존중하는 문화를 튼실히 길러내는 것이야말로 국가경쟁력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저는 이 발제의 서두 끝에서 “국가의 정치체政治體를 더욱 굳건히 하는 차원과 전혀 다른, 국가의 개별 구성원들이 자율적 심미적 주체의 하나로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창의적으로 발견하는 과정 속에서 근대적 국가의 정치체 바깥 너머를 과감히 상상하는, 그리하여 근대 국민국가의 반복적 일상에서 창조적으로 벗어나는 미의 가치와 한데 어우러져 자연스레 탈근대의 세계를 꿈꾸도록 도모하는 역할”을 맡는 문화정책이야말로 건강하고 성숙한 문화정책임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달리 말해 문학이 강화해야 할 국가경쟁력이 어떤 것인지를 시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대단히 모순적이지만, ‘좋은/우수’문학은 한 국가의 민족문학(국민문학)이면서 그 배타성에 갇히지 않고, 세계인과 함께 상생공존하는 평화의 삶 혹은 삶의 평화를 추구합니다. 요컨대 ‘좋은/우수’문학은 민족문학(국민문학)이되 그것을 담대히 넘어서는 지구적 세계문학의 원대한 가치를 욕망합니다. 1968년부터 추진하다가 2005년에 ‘문학회생 프로그램’으로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세종도서 우수문학도서’ 사업이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그래서 말 그대로 ‘문화로 행복한 삶’을 실현하였으면 합니다.
문체부의 ‘좋은/우수’문학 선정 및 보급을 위한 문학정책에 대한 창조적 고민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주
1 참고로 “문화정책은 대체로 19세기 이후 문화현상 전반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일본 등 소위 문화선진국을 중심으로 문화의 발굴.보호.육성.전승을 위하여, 또 한편으로는 식민지 국가의 효율적 경영을 위한 수단으로 수립집행되어 왔다.”(김복수, ‘문화의 세기’ 문화와 문화정책, 보고사, 2003, 12쪽) 문화정책의 이 두 가지 성격은 우리의 역사 현실에서 그것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 여실히 부각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문화정책의 주요 특징의 흐름에 대해서는 김복수의 같은 글, 37-42쪽 참조.2 유네스코가 1968년에 개최한 문화정책에 관한 원탁회의에서 밝힌 부분이다. 김복수, 같은 글, 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