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의 안정적 시행을 위해서는
정부와 출판ㆍ서점계의 소통부터 복원해야 한다.
조재은 (양철북 대표)
프랑스 문화부장관이었던 자크 랑(Jack Lang)이 한 말을 되새겨 봅니다.
“우리 정부는 책을 다른 일반적인 상품과 동일하게 간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시장의 메커니즘을 수정하여, 당장의 이익에 가려서는 안 될 책의 문화적 특성을 보장하고자 한다. 도서정가제는 첫째 전국적으로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가격으로 도서를 판매하여 국민의 독서 평등권을 확보 할 것이며, 둘째 유통체계에 있어 집중화를 방지하고, 셋째 특히 어려운 작품들을 창작 출판할 수 있는 출판 다양성을 보장할 것이다.”
1977년부터 출판·서점업계 자율적 결의로 시행한 도서정가제가 1980년 12월 31일 ‘독점규제및공정거래에관한법률’이 제정·시행되면서 동 법률 제 20조 2항에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저작물은 재판매가격 유지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예외 규정을 통해 도서의 정가 판매를 위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였습니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는 출판문화산업의 진흥이라는 측면보다는 규제적 관점에서 도서정가제가 경쟁을 저해한다는 시장 논리로 접근하면서 도서정가제 품목을 단계적으로 축소 또는 폐지하는 정책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러한 경쟁의 논리에 입각한 접근이 시도되면서부터 도서정가제는 뿌리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우리 출판·서점업계는 1999년부터 도서정가제의 법적 틀을 확립하기 위해 ‘간행물 정가 유지에 관한 법률’ 제정을 추진하여 2003년, 5년간의 한시적이고 한적인 최초의 도서정가제 법률을 제정하여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법률의 내용은 우리가 희망하고 기대했던 바와 달리 할인을 허용하는 정가제 법률이 되면서 할인시장의 급격한 확대와 중소서점의 침체라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래서 2005년 완전 정가제를 골자로 하는 법 개정을 시도하였으나, 2007년 개정된 법 역시, 온라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서점까지 할인 대상을 확대하는 내용으로 개정되었고, 게다가 정가제 대상 품목에서 실용도서와 초등학교 참고서를 순차적으로 제외시켜서, 정가제의 예외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되어 도서정가제법이라는 이름 하에 실제로는 ‘도서 할인에 관한 법’으로 기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우리 업계는 파행으로 치닫는 출판 산업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2012년부터 세 번째 법 개정을 추진하여 정가제를 훼손시키는 독소적 사안과 향후 예견 되는 문제에 대한 폭넓은 의견 수렴과 업계 협의와 합의를 거쳐 ① 모든 분야의 간행물 정가제 적용 ② 발행일로부터 18개월 기준의 신간, 구간 기한 삭제 ③ 가격 할인율 축소(19%에서 15% 이내로) ④ 도서관 등 국가기관, 공공기관의 도서정가제법 적용 등을 포함한 개정 법률(안)을 제안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안의 취지를 받아서 2013년 1월 9일 최재천 의원의 대표발의로 입법 발의된 도서정가제 관련 법률이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약 1년 반만인 올해 4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5월 20일 공포되었으며, 오는 11월 21일 시행을 앞두고 문화체육관광부가 세부 시행령과 시행규칙 개정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문화부(출판인쇄산업과)는 준비과정에서 출판ㆍ서점계와 긴밀한 협의도 없이,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만든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지난 7월 16일 입법예고하였고, 동시에 출판·서점업계에 의견을 제출해 달라 요청했습니다.
이에 우리 출판·서점 업계는 업계별 설명회와 의견 청취 과정을 거쳐, 긴급히 두 차례에 걸친 업계 전체협의를 통해 공동의견을 마련하여 7월 25일 문체부(출판인쇄산업과)에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체부는 9월 3일 공문 답변을 통해 우리 업계가 제안한 의견에 대해 모두 수용 불가를 통보하여 왔습니다. 이에 우리는 ‘오픈마켓 등 판매중개업자의 명문화’와 ‘중고도서의 정의' 등에 대해 조목조목 문제점을 지적하였고 특히, 변칙을 모색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세트도서의 개념과 기준 및 '외국에서 발행된 간행물’에 대한 명확한 규정 등 정부가 간과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반영을 촉구하였으나, 문체부는 일방적으로 마련한 안을 밀어붙이며 개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행태를 보면서, 과연 문체부가 올바른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는 한지 의문스럽기까지 합니다. 도서정가제의 안정적 시행과 조기 정착을 바란다면 응당 법 시행 이후 예견되는 문제점과 업계의 우려에 대한 목소리가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담겨야 하는데, 현장의 목소리나 의견은 도외시하고 정부의 안만을 고집하고 있는 작금의 태도에 대해 우리는 이해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현재 마련된 시행령ㆍ시행규칙 개정안은 본법의 취지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를 그대로 방치한 개정안입니다. 우리 출판ㆍ서점인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사실 문화체육관광부의 이런 안일한 태도와 입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앞선 두 번의 법 개정 때도 업계의 요구나 의견보다는 공정위 등 정부의 입장에 무게를 두고 법 개정에 소극적으로 대응했었는데, 이번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에서도 과거의 방식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업계의 현실과 우려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아 도서정가제의 취지가 훼손되고 도서정가제의 기틀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 결과를 어떻게 책임지려 하십니까? 지금이라도 시행령 및 시행규칙이 업계의 우려와 의견에 귀기울일 것을 촉구합니다.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시행령ㆍ시행규칙 개정과 더불어 한시적으로 “도서정가제 조기정착을 위한 정부와 출판ㆍ서점계의 상설 협력회의(이하 ‘정부와 출판ㆍ서점계 협력회의’라 함.)”를 만들어 운영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동안 출판 시장은 할인으로 멍들고 상처받아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까지 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또한 일부 업체의 변칙적 유통행위가 어떤 형태로 기승을 부릴지 일일이 다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도서정가제 시행에 맞춰 초기 일 년 이상은 ‘정부와 출판ㆍ서점계 협력회의’를 통해 다양한 변칙에 대응하고 문제점을 조사하여 정책적으로 보완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업계의 사회적 협약을 만들어갈 때, 도서정가제가 조기에 정착하고 안정적으로 시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도서정가제법 개정과정에서 업계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하여 정부와 업계가 함께 회의를 조직하여 운영했던 사례가 그 모범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도서정가제는 출판 산업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입니다.
어려운 과정을 통해 만든 법이 시행과정에서 조기 정착하고 안정적으로 시행되어 무너진 출판 생태계를 복원하도록 하려면, 먼저 정부와 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소통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부디 문화체육관광부가 이러한 출판ㆍ서점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를 간절하게 촉구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