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우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 싸이코패스의 뇌로 변해버린 영어영재
현우(가명)는 영어영재다.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인 현우는 3학년 때부터 해마다 열리는 각종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아홉 살인 동생 민우(가명)도 영어를 잘한다. 형이 1등을 하면 같은 대회에서 2등, 3등을 차지하곤 했다. 두 아이는 학교에서도 영어 영재 형제로 유명하다. 아이들의 엄마는 주변에서 부러움의 대상이다. 두 아이를 모두 영어 영재로 키워 낸 노하우를 주제로 구청에서 실시하는 학부모 교육에서 강의를 한 적도 있었다.
현우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영어를 듣고 성장했다. 학창시절부터 영어에 관심이 많았던 엄마는 현우를 임신하자마자 태교 영어 프로그램을 구입했다. 국내의 한 유명 출판사에서 펴낸 태교 영어 교재는 잘 알려진 동화를 영어 이야기와 노래로 꾸민 프로그램이다. 엄마는 임신 기간 내내 잠자리에 들기 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 태교 영어교육 프로그램을 뱃속의 현우에게 들려줬다. 엄마 이00씨는 임신했을 때부터 아이의 영어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태아에게 영어를 들려주면 나중에 출생한 다음에 영어에 반응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어요. 또 이런저런 육아서에 보면 영어 태교 등을 강조하고 있구요. 사실 제 주변에서 저처럼 하지 않는 엄마는 거의 없어요.”
현우는 출생 이후 약 18개월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영어 책들을 보기 시작했고 베이비 아인슈타인, 세서미 스트리트 같은 영.유아 교육용 영상물도 병행했는데 엄마의 바람대로 영어에 반응하는 속도가 정말 빠른 듯 보였다. 특히 영상물은 하루 종일 켜 놓고 있다시피했다. 엄마 이00씨는 어차피 우리말은 늘 듣는 것이니까 최대한 많은 시간을 영어에 노출시키려고 노력했다. 엄마는 아직도 현우가 영어로 옹알이를 했을 때의 기쁨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내가 선택한 방법이 옳았구나. 점점 확신이 들기 시작했어요. 제 바람은 현우가 바이 링구얼, 영어와 우리말을 동시에 구사하는 아이로 컸으면 하는 거 였어요. 어떤 책에서 보니까 36개월 이전에 영어를 익히면 언어체계가 두 개로 형성된다고 하더라구요.”
만 두돌이 지나면서 현우는 영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이른바 고급 영어 어린이집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들 영어 어린이집은 보통 영어 유치원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영.유아 기본법에는 영어 어린이집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다. 따라서 영어 유치원은 법적으로는 영어 학원일 뿐이다. 실제로 영어 유치원들은 법에서 규정한 어린이집 인가를 받지 않고 영어 학원으로 등록한다. 이럴 경우 일반 어린이집과 가장 큰 차이는 교육비가 임의로 책정된다는 점이다. 정부 인가 어린이집의 경우 교육비를 법이 정한 한도 내에서 책정하지만 이른바 영어 유치원들은 학원이기 때문에 교육내용, 교육비 등을 임의로 책정할 수 있다.
90년대 중반부터 서울의 강남 일대에서 등장하기 시작해 지금은 전국으로 확산된 영어 어린이집은 법, 규정의 맹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러한 맹점은 영어 유치원들이 이른바 고액 경쟁을 하는데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소 당혹스러운 현상도 빚어졌는데 많은 고액 영어 유치원의 경우, 건물을 신축하거나 리모델링, 인테리어 비용으로 수 억원을 쓰는 경우가 생겼다. 과열 경쟁인 상황에서 많은 아이들을 유치해야 하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이른바 시설 등의 고급화 경쟁은 고액 교육비로 이어졌다. 실제로 현우가 영어 유치원에 처음 다니기 시작했을 때, 한달 교육비는 간식 등을 포함해서 월 60만원을 넘었고, 지금 현재 잘 나가는 강남의 영어 유치원들은 월 100만원을 넘게 받는 곳도 수두룩하다.
아무튼 엄마 뱃속에서부터 영어를 듣고 태어난 현우는 당시 꽤 잘나간다는 강남의 영어 유치원에서 우리말보다 먼저 영어를 배우고 익히며 성장했다. 그리고 3학년이 지나면서부터는 전국 영어 말하기 대회 등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고 엄마의 바람대로 거의 1등을 놓치지 않는 영어 영재가 됐다.
그런데 영어영재 현우가 5학년이 올라가면서,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12세 무렵부터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매우 얌전하고 착실한 아이로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받았던 현우가 부쩍 학교생활에 불편을 드러낸 것이다. 아이들과 다투는 일이 잦아졌고, 친구들이 옆에 오는 것을 꺼리는 외톨이 증세도 보였다. 선생님이 나무라면 혼자 교실을 뛰쳐나가는 일도 있었다. 부모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생기는 학습 부담 때문에 생긴 증상이라고 여겨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현우의 증세는 점점 더 심해졌고 무엇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무기력 증세까지 나타났다.
부모는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집 근처의 한 대학병원 소아 정신과를 찾아갔다. 사춘기가 좀 빨리 찾아와서 그런 거겠지, 몇 번 상담하고 도움을 받으면 금방 나아지겠지, 아이가 자라면서 으레 겪어야 하는 통과 의례겠지 라고 생각했다. 현우의 주치의는 흔히 ADHD 등으로 알려진 어린이 정서 발달 장애 분야의 국내 최고 권위자였다. 현우에게는 모두 16개 항목에 이르는 다양한 평가가 실시됐다. 이 평가는 지능발달, 정서발달, 뇌기능 검사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평가이다. 현우에겐 특별히, PET라고 불리는 뇌영상 장비를 통해 대뇌변연계 부위의 촬영도 이뤄졌다. 과연 결과는 어땠을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뇌 영상 촬영결과 현우의 대뇌변연계, 그 중에서도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와 기저핵 부분에서 심각한 이상이 발견된 것이다. 정상인 경우 PET 영상에서 편도체와 기적핵은 붉은 색으로 표시된다. 제대로 잘 활성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우의 뇌에서는 붉은 색이 나타나지 않았고, 검은 색으로 나타났다. 현우의 뇌, 그 중에서도 대뇌변연계를 이루고 있는 편도체, 기저핵 부위의 신경세포Neuron들이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이 현상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간단한 뇌 공부가 필요하다.
인간을 포함한 고등 영장류의 뇌는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이는 해부학적인 구분이 아니라 의미상의 구분이다. 1950년대에 미국의 신경학자인 폴 매클린에 의해 세워진 이 가설은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다. 즉, 인간의 뇌의 가장 깊숙한 안쪽에 척수와 연결된 파충류의 뇌Reptillian가 자리잡고 있다. 흔히 뇌간, 뇌줄기라고 불리는 부분인데 이름과는 달리 생명활동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뇌이다. 파충류의 뇌는 다른 말로 생존의 뇌 Survival Brain라고 불린다. 심장박동, 호흡조절, 무의식적 생리적 반응 등 자율신경으로 작동하는 생명의 가장 기본이 되는 역할을 담당한다.
현우에게 문제가 된 대뇌 변연계는 파충류의 뇌 바로 위에 있는 부위다. 폴 매클린의 분류에 의해 이 부분은 포유류의 뇌Limbic라고 불린다. 감정,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단기 기억 등을 담당하는 편도체, 기저핵, 해마, 시상 등이 속해있다. 이렇게 비유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집에 강아지를 키우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주인이 나타나면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고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한다. 강아지들은 감정의 뇌가 있다. 반면에 어항에 물고기 등을 키우는 경우도 떠올려 보자. 이 녀석들은 주인이 나타난다고 해서 지느러미를 펄럭거리거나 점핑을 하면서 반기지 않는다. 주인이 오거나 말거나 유유히 헤엄을 칠 뿐이다. 그러다가 딱 한번 주인을 알아볼 때가 있다. 바로 모이를 주는 순간이다. 물고기들은 감정의 뇌가 없거나 매우 미약하다. 따라서 원천적으로 인간과 감정의 교류를 할 수가 없다.
동물의 뇌에 감정의 뇌가 있다는 의미는 진화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진전이다. 감정이 있는 경우가 생존에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악어나 뱀의 생존 방식을 떠올려 보자. 이 녀석들은 물론 감정의 뇌가 없다. 파충류의 뇌, 생존의 뇌만 갖고 주변의 조건에 반응하면서 살아간다. 이를테면 배가 고플 때, 악어는 배를 채울 때 까지 주변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삼켜 버린다. 나무토막이든 쇳덩이든 심지어는 버려진 폐 타이어를 삼켜 버리는 경우도 있다. 결과는 어떻겠는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 있고 생명마저 위태로워진다. 뱀도 마찬가지다. 뱀이 사람을 무는 것은 미워서가 아니다. 뱀은 적외선 등으로 사물을 감지하는데 주변에 열을 지닌 무언가가 나타나면 공격한다. 따라서 파충류의 뇌, 생존의 뇌만 갖고 살아가는 악어, 뱀 등의 뇌는 호好,불호不好, 쾌快, 불쾌不快에 의한 정보의 판단 능력이 없다. 즉, 자기에게 이로운 것인지 해가 되는 것인지를 구분하고 판단할 능력이 아예 없는 것이다. 파충류 다음 단계에 진화한 포유류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뇌의 능력을 개발했다. 감정의 뇌, 대뇌변연계를 발명한 것이다. 감정의 뇌는 호好,불호不好, 쾌快, 불쾌不快 등을 구별하는 보다 진보된 시스템이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이 시스템은 생존에 훨씬 더 유리하다. 앞서 살펴 본 악어의 경우, 만약 감정의 뇌가 장착돼 있다면 소화도 되지 않는 나무토막, 쇳덩어리, 폐타이어를 집어 삼키는 일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감정의 뇌를 통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같은 고등 영장류의 경우, 감정의 뇌가 특히 잘 발달돼 있다.
마지막 뇌의 부위는 가장 바깥에 위치한 대뇌피질, 혹은 신피질Neocortex이다. 이 부위는 다른 말로 생각하는 뇌The Thinking Brain이라고 불린다. 흔히들 뇌, 브레인 하면 떠올리는 똑똑, 지능, 생각, 의식, 언어, 운동 능력 등을 담당하는 부분이다. 인간의 대뇌피질은 6층 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인간의 뇌에서 고차원의 의식이 가능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즉, 층이 많을수록 의식의 층위도 다양해 질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1950년대에 뇌를 의미상으로 세 부분으로 구분한 폴 매클린의 가설은 ‘뇌의 삼위일체설’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인간이 생명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과정에서 뇌의 세 부분은 각각 따로 작용하지 않고 서로 협력해서 작동한다는 의미다. 일상적인 언어로 이 사실을 설명해 보면 인간의 생명활동이란 매 순간, 본능, 감정, 의식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고 봐야 한다. 생각하고 상상하고 말할 때조차도 대뇌피질만 작동하는 게 아니라 파충류의 뇌, 감정의 뇌, 생각하는 뇌가 함께 작동한다. 그러므로 인간다운 뇌, 건강한 뇌란 본능, 감정, 의식이 조화를 이룬 뇌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부분만 지나치게 발달하거나 또 어느 한 부분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건강한 뇌라고 할 수 없다. 자, 뇌에 대해서 간단하게나마 공부했으니, 다시 영어 영재 현우의 뇌로 돌아가 보자.
현우의 뇌 촬영 결과 발견된 편도체, 기저핵 등 대뇌변연계의 손상은 결국, 현우의 감정, 단기 기억 등에 장애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남세브란스 병원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는 이런 뇌의 이상을 가진 아이들은 빈번한 짜증, 소리 지름, 쉽게 포기 하는 성향 등의 증세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성장이 계속될수록 아예 학습 등을 거부하는 심각한 증세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신 교수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감정을 담당하는 대뇌변연계의 손상은 결국 감정조절의 미숙, 정서의 문제 등을 야기합니다. 이게 학습에 대한 거부까지 진전되는 이유는 감정이라는 메커니즘의 생물학적 작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내가 취해야 할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구분하는 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것이죠. 좀 과격한 주장이라고 보이긴 하지만 감정의 뇌가 잘 발달한 아이들이 나중에 공부를 더 잘한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결국 영어 영재 현우가 병원을 찾게 만든, 주변 친구들과의 다툼, 무기력 등의 증상은 감정의 뇌 그 중에서도 편도체, 기저핵 등의 감정 중추의 손상에 따른 심각한 뇌질환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을까. 영어 교재, 비디오에서 안 좋은 독성물질이 아이의 뇌를 공격했을까. 그럴리는 없을 것이다. 신의진 교수는 그 원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발달 단계에 맞는 적절한 자극 대신 과도한 자극, 즉 문자 학습 등에 노출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그 결과 뇌에서 코티졸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 분비됩니다. 이 코티졸이 신경세포의 발달을 억제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아이들의 뇌에 스트레스는 천적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추가로 설명돼야 하는 부분은 그렇다면 현우의 경우 왜 코티졸이 감정의 뇌 발달을 억제 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인간의 뇌의 발달과정과 관련이 있다. 앞서 소개한 뇌의 세 부분은 파충류의 뇌, 감정의 뇌, 생각의 뇌 순서로 발달한다. 물론 이 과정이 대나무가 자라듯이 매듭을 지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애 전체를 놓고 볼 때 대략적인 순서가 그렇다는 것이다. 먼저 파충류의 뇌는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거의 완성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심장이 뛰고, 숨쉬고, 먹는 등 생명활동을 해야 하므로 당연하다고 하겠다. 두 번째 감정의 뇌, 대뇌 변연계는 약 12세 무렵까지 집중적으로 발달한다. 물론 약 6세 이후 생각의 뇌도 점차 발달하지만 12세까지 뇌의 주인공은 감정의 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인간은 생각의 뇌보다 감정의 뇌를 먼저 발달시킬까. 여기에 생명의 신비가 숨어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매우 긴 성장기를 보낸다. 인간의 뇌는 대략 18세 무렵을 전후한 시기가 돼서야 1차 발달을 마무리한다. 이는 길어진 수명과도 관련이 있지만 다른 포유류나 영장류가 생후 3년~5년 사이에 성장을 마무리 하는 것과 비교해도 매우 더디고 지난한 과정이다. 특히 무려 12년에 걸쳐서 감정의 뇌를 발달시키는 것은 개성의 형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리 정해진 설계도나 계획표, 즉 유전자 등의 지배를 받는 대신 인간의 뇌는 주변의 환경, 나 아닌 다른 존재 등과의 끊임없는 만남, 접촉, 교섭을 통해 감정을 키우고 의식을 키워 나간다. 숱한 시행착오와 경험이 쌓여서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의 개성, 의식, 즉 자기만의 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쌍둥이라고 해도 똑같은 경험을 할 가능성은 전혀 없으므로 오랜 기간 동안의 경험의 축적은 그대로 유일무이한 ‘나’라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따라서 인간의 아이가 무려 20여 년에 걸쳐 지루한 성장기를 보내는 것은 그 만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간을 마련한 것이며 이는 신비이자 축복이다.
현우의 주치의인 신의진 교수는 현우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결과에 대해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현우는 감정을 발달시켜야 할 나이에 공부를 했어요. 조기교육은 인간의 발달에 전혀 맞지 않는 자극이자 경험입니다. 그 시기의 아이에게는 엄마를 포함한 주 양육자와의 상호작용, 자연 속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 놀기 등이 필요합니다.”
지난 해에 발표된 한 연구팀의 연구결과는 영어 영재 현우에게 일어난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영국 런던대학의 연구팀은 싸이코패스, 그 중에서도 흉악범죄를 일으킨 약 20여 명의 뇌를 스캔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연구문제는 왜 싸이코패스들 중에서 유독 연쇄살인, 미성년자 강간 등과 같은 끔찍한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이 많이 등장하는가 였다. 연구팀은 DTI라는 장비를 이용했는데, 이는 뇌 신경회로의 미세한 연결 상태를 들여다보는 첨단장비다. 앞서 인간다운 뇌, 건강한 뇌는 파충류의 뇌, 감정의 뇌, 생각하는 뇌가 조화를 이룬 뇌라고 소개했었다. 여기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말을 신경학적으로 설명하면 각각의 뇌가 신경회로, 모듈, 혹은 네트웍 등으로 잘 연결돼 있고 함께 작용한다는 의미이다. DTI를 활용하면 뇌의 각 모듈, 네트웍의 상태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런던대학의 연구팀은 흉악범죄를 일으킨 싸이코패스들의 뇌에서 공통되는 현상을 발견했다. 그들은 감정의 뇌가 크게 손상돼 있었고 특히 감정의 뇌와 전두엽을 연결하는 ‘갈고리관’의 손상이 두드러졌다. 이는 감정의 뇌와 생각의 뇌가 서로 협업을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즉, 공감 능력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떨어져 있고, 전두엽 등에서 일어나는 예측, 판단에 의한 억제 능력 등이 감정, 본능의 작용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연구팀은 싸이코패스들의 감정의 뇌가 크게 손상된 원인을 어린 시절의 과도한 스트레스, 즉 학대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충격적인 사실은 현우의 뇌에서 고장난 감정의 뇌의 특정부위와 런던대학 연구팀이 조사한 싸이코패스들의 뇌 손상 부위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물론 현우의 뇌가 싸이코패스의 뇌의 패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뇌 영상 촬영 결과 일치하는 부분이 발견됐다는 사실은 놀라움은 넘어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자식을 영어 영재로 키우겠다는 바람에 따라 매스컴, 육아서적, 영어유치원 등에서 가르쳐 준대로 따라했던 엄마 이00씨의 선택은 왜 이렇게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을까. 사실 엄마의 선택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크게 튀는 행동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영어를 비롯한 이른바 조기교육은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지 않은가.
2. 3/10, 아이들의 뇌가 아프다? 잘못된 상식이 가져 온 비극
조기교육의 폐해에 대해서 그동안 전혀 문제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간헐적으로 영.유아 등의 정신 건강 실태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제기는 가정경제의 어려움을 지적하는 근거로 제시돼 왔다.
그런데 최근 정부는 영.유아 및 어린이의 정신 건강 실태를 조사해 발표했다. 보건 복지부는 2012년 경기도 광명시의 78개월(만 6.5세) 미만의 어린이 534명을 대상으로 정신 건강 실태 조사를 실시했는데 결과는 역시 충격적이다. 연구 결과 10명 중 3명의 어린이가 정신 건강상에 문제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가 발견된 아이들은 언어발달 지체, 정사발달 지체, 그리고 자폐성향(후천성 자폐) 등의 증상을 보였다. 연구팀은 이러한 문제의 원인으로 첫째, 부모의 과도한 스트레스가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이. 둘째, 과도한 조기교육을 지적했다.
정부가 아이들의 정신 건강을 직접 챙기기 시작한 것은 늦었지만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조기교육이 이미 우리 사회의 대세가 되었고 그 폭이나 깊이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육아잡지가 자녀를 둔 33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적절한 조기교육 시기와 관련해 91%가 생후 0~36개월이라고 답했다. 조기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열망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대체로 1990년대 후반부터 과열화되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조기 사교육은 현재 그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종류가 다양해졌고 또 점차 세분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영.유아 시기에는 한글, 영어, 수학같은 인지교육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2001년, 한 연구팀이 2159명의 부모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847명(86%)이 아기에게 교육을 시키고 있으며, 이 중 2가지를 하는 유아가 30%, 3가지는 20.6%, 세 가지 이상을 하는 유아 41.2%, 10가지 이상을 하는 유아도 8명이나 됐고 최고 12가지를 하는 유아도 있었다. 종류별로는 한글이 49%, 수학이 32%, 영어가 28%, 피아노가 28% 였다. 10년 전의 조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양상은 더욱 확대됐다고 추측할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조기교육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영.유아의 발달에 맞지 않는 교육이 아이들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고 심지어는 자폐증, 학습장애, 언어장애를 일으키는 과잉 학습장애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조기교육의 확대, 그리고 뇌가 아픈 아이들의 증가라는 현상을 지켜보고 있으면 마치 우리 사회가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을 수 없다. 실제로 언어학자, 신경학자, 소아정신과 의사, 발달심리 전문가 들 중에서 영.유아 조기교육을 지지하는 견해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앞에서 길게 소개한 영어 영재 현우의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어린 시절의 영어 교육이 실제 영어 능력을 높인다는 과학적 설명을 찾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식처럼 자리 잡고 있고 영어 유치원은 대세로 굳어졌다.
3. 시장市場이 삼켜버린 아이의 뇌
‘영어 유치원 10개가 생기면 소아 정신과 1개가 생긴다.’
이 말은 최근 소아 정신과 전문의들이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이다. 실제로 최근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소아정신과 개업이 줄을 잇고 있다. 또 이른 바 강남 3구에서는 웃지 못할 패턴도 등장했다. 많은 아이들이 일주일에 한번 소아정신과에 가서 정기적으로 상담을 받고 있다. 명분은 이렇다. 아이들이 월요일은 영어, 화요일은 수학, 수요일은 피아노 등으로 매일 같이 과외 수업, 혹은 학원 수업을 받기 때문에 정서 발달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주중 스케줄에 정신과 상담을 끼워 넣는다. 하지만 소아 정신과 의사들의 말은 좀 다르다. 실제로 병원을 찾아오는 상당수의 아이들이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ADHD등 행동, 정서 장애는 이제는 너무 흔해서 문제 삼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고 최근엔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안면 근육장애, 소아 우울증, 무기력 등의 증상도 급격하게 늘고 있다.
한쪽에서는 아이들의 뇌에 경고등이 켜졌다고 거세게 비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심해지는 조기교육의 열풍. 이 이상한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두 현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들의 교육 문제,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육시장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권력 지형을 포착할 수 있다. 보수신문,지상파방송 vs. 진보신문. 교육관료,교육학자 vs. 아동전문가(발달심리, 소아정신과, 뇌과학) 등의 대립구도가 그것이다.
먼저 보수신문은 교육섹션 지면 등을 통해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지금도 지속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주요 신문사들은 날로 어려워지는 종이 신문의 영향력, 경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증면 경쟁에 나선다. 이때 제일 먼저 시작된 것이 교육 섹션이었다. 독자들은 으레 받아 보는 신문의 한 부분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교육 섹션의 제작과 운영은 모母 신문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외주 업체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이들 외주 업체들은 돈을 받고 지면을 팔기도 한다. 따라서 독자들이 기사라고 여기고 보는 교육 관련 내용은 실은 기사가 아니라 지면을 구입한 학원 운영자 등의 광고나 다름없다. 주요 보수 신문의 교육섹션을 채우고 있는 바로 이들이 조기교육 시장을 주도하는 사람들이다. 주요 지상파 방송 등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결과적으로 이를 거들고 있는 실정이다. 지상파 방송의 주부대상 프로그램 등에서는 주요 신문의 교육 섹션에 등장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른바 교육전문가들을 실체도 없는 두뇌학자, 뇌전문가 등으로 소개하면서 방송에 등장시킨다. 어떤 경우에는 주요 신문의 교육 섹션, 지상파의 아침방송, 단행본 출간 등이 동시에 진행된 적도 있다. 주요 신문의 교육 섹션이 주는 폐해는 심각하다. 신문사의 권위를 빌려 매주 정기적으로 교육 섹션의 지면을 채우는 조기교육 시장의 지배자들은 2000년 이후 그 양을 매년 두 배 이상 크게 늘리고 있다. 한편 이른바 진보신문들은 조기교육의 폐해를 지속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또 하나의 대립구도는 사학, 학원재벌, 교육 관료 vs. 아동전문가(발달심리, 소아정신과, 뇌과학)의 구도이다. 싫든 좋든 지난 수 십 년간 이른바 교육의 주체는 사학, 학원재벌, 교육관료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이후 단 한 번도 교육 권력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최근 진보 교육감의 등장이 이러한 권력 구도에 균열을 가져 올 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교육 권력의 철학적 기반은 1950년대 이후 본격화된 미국의 행동주의 심리학, 행동주의 교육학이다. 9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소멸된 이 교육이론은 아직도 한국에서는 견고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행동주의 심리학, 교육학에서는 아이들을 ‘빈 서판Blank Slate’으로 본다. 즉, 교육을 통해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고, 무엇으로든 만들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는 스키너의 심리학에 크게 의존해 있다. 조기교육, 훈육과 수월성 위주의 수업 방식 등은 모두 이 교육이론에 근거를 둔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미국 등의 상황은 달라졌다. 뇌과학의 진전과 함께 인간, 특히 아이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고 행동주의 심리학, 교육이론은 급격하게 쇠퇴했다. 그리고 미국, 유럽 등의 학교는 바뀌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5,60년대 미국 유학파들이 설계한 교육시스템이 작동하고 있고 그들의 후예들이 교육 권력을 차지하고 있다. 또 그로부터 파생된 교육시장은 가정 경제를 위협할 만큼의 막대한 시장으로 성장해 이제는 교육 그 자체를 압도하게 되었다. 이 시장은 수 십 년간 형성된 매우 견고한 시장이다. 거대한 교육시장이 수 십 년간 견고해지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교육의 한 주체였던 가정의 교육기능은 핵가족화, 여성의 노동 참여 증가 등으로 인해 점차 소멸해 갔다. 과거에도 살벌한 입시 경쟁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아이들의 뇌가 파괴되는 지경으로까지 가지 않았던 것은 가정과 마을, 동네가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학교에서 아무리 공부와 체벌 등에 시달렸어도 집에 오면 따뜻한 어머니의 손길이 있었고, 동네에는 형님, 동생, 삼촌, 이모가 있었다. 학교에서 시달리고 지친 아이들은 그 가정과 동네에서 위로받고 치유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가정도 동네도 무력해졌다. 결국 아이들은 어디에서도 위로 받지 못하게 됐고, 이제 친구마저 사라지는 지경이다. 뇌가 아프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하나 부모들의 불안을 먹고 성장하고 있는 교육시장의 악마성에 주목해야 한다. 경제학에 ‘조작된 욕망 혹은 수요Manufactured Demand’라는 개념이 있다. 지금 한국의 교육시장은 바로 이 조작된 욕망 혹은 수요Manufactured Demand가 지배하는 타락한 시장이다. 조작된 욕망 혹은 수요Manufactured Demand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바로 생수 시장이다. 지금 수돗물을 먹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돗물은 청소, 샤워, 설거지용이라는 생각이 지배한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생수를 마시고 혹은 정수기를 구입한다. 그런데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보면 정말 웃기는 결과가 나온다. 대부분의 경우, 가장 맛있는 물로 수돗물을 선택하는 것이다. 수돗물은 더러운 물이며 생수 혹은 정수기를 이용해야 한다는 조작된 욕망 혹은 수요Manufactured Demand는 생수업자 등 음료수 자본의 발명품이다. 그들은 소비자의 불안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지금 한국의 교육시장은 바로 이 조작된 욕망 혹은 수요Manufactured Demand가 지배하는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교육은 수돗물이고 사교육은 생수가 됐다. 많은 학교의 교사들은 이미 교육을 포기한지 오래라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제발 자살이나 폭력 사고 없이 하루하루를 무사히 보내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한다. 부모나 아이들도 이제 더 이상 학교에서는 공부하지 않는다. 공부는 학원에서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선행학습이라는 신상품을 앞세운 교육시장은 교육 자체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지상파 방송, 주요 신문의 교육 섹션에 매우 자주 등장해 유명해진 어떤 선행학습 전문가는 지난 겨울 방학(2012년), ‘이제는 11년 선행학습이 대세’라는 신상품을 들고 나와 돌풍을 일으켰다. 그들은 생수업자, 음료수 자본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 마을의 소멸과 함께 고립돼 버린 부모들의 불안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지금 우리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성장해 버린 교육시장, 그리고 점점 망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뇌를 수수방관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