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떻게 변화를 유도할 것인가: 케인즈주의 2.0
그렇지만 이런 아쉬움을 잠시 참으면 다시 이 책의 진가가 나타난다. 내 개인적 의견을 말한다면, 이 저작에서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은 ‘파우스트적 타협’과 같은 부분보다도?실제로 근대경제학의 이념에 대한 대중적 비판은 리오 휴버만Leo Huberman의 저작을 비롯하여 여러 권이 번역되어 있다?좋은 삶을 구성하는 기본재를 7개로 압축해 나가는 6장, 그리고 그 기본재를 현실에서 구현할 구체적 방도를 찾는 7장이었다. 앞서 지적한 바, 저자들은 본질주의라는 비판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좋은 삶’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 견해들이 결코 동일한 가치를 갖지 것은 아니며, 또한 도덕적 다양성의 견해도 생각만큼 차이가 크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들은 대부분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보편적, 초역사적 공약수를 찾아 나서는데, 그 결과는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 7개로 귀착된다.
여기서, 7개 기본재의 보편적 타당성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겠는데, 굳이 7개가 되어야 할 필연성은 없을 것이다. 이들 모두가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이것들은 적극적으로 좋은 삶을 구성하는 실체라기보다 어느 것이라도 없으면 좋은 삶이 확보되지 않는 소극적 요인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이라면 7개 다 있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헛된 삶이라 생각할 것이고, 예술적 심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극히 권태롭게 생각하고 오히려 도착 속에서 ‘실감’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 스키델스키 부자가 권고하는 7개가 있는 삶은 어딘가 일부일처제 하의 이성애적 성애의 건전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개인차를 제거하다 보면, 저자들이 주장하는 목록 하나하나에 대해서, 그리고 국가의 제1목표가 “능력이 닿는 한 모든 시민의 좋은 삶을 실현시키는 것”이라는 명제에 대해 쉬 동의하게 된다. 국가는 멋진 기념적 건축물 건립이나 스펙타클을 통해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고 싶겠지만, 아름다움이나 장엄함의 추구는 제1목표를 달성한 다음의 고려사항이다. “사치가 필요를 희생”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마침내 마지막 장에서 기본재의 보편적 실현을 위해 저자들은 크게 (1) 노동시간 단축과 (2) 소비활동 규제라는 두 가지 정책방향을 제시한다. 이 저작에서 근대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가져온 욕망의 무한 확대 자체를 비판하면서도 저자들이 정작 정책 대안으로 제시한 바는 케인즈주의 2.0 수준이다. 아마 이정도로도 자본주의를 극복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수준이 진보 좌파들로서는 불만일 수 있겠고, 보수 우파의 입장에서는 허황된 환상으로 비판할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에서 본다면 참으로 시의적절한 논의거리를 제공한다. 여가라는 기본재를 예로 들자. 저자가 지적하듯,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순 가운데 하나는 정규직은 너무 바빠서 여가가 없고, 비정규직은 일자리가 없어서 여가를 즐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OECD국가 가운데 최장인데, 현대자동차 정규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야간과 주말에 잔업에 참여한다. 그리고 보수언론들이 그들의 소득수준이 높다고 노동귀족으로 비판하는데, 그러면 잔업과 주말근무를 제외한 봉급명세서를 보여주면서 자신들이 노동계급임을 인정해 달라고 한다.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가지기 위해 또는 비정규직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수당 대신 여가를 선택한 적은 여태껏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좋은 삶’이란 개념이 개입하고, 저자들은 좋은 삶에는 반드시 ‘여가’라는 기본재가 필요하니, 입법을 통해서라도 노동시간을 줄여서 모두가 여가를 갖는 사회를 주장한다. 정규직은 약간의 소득 감소 대신 가정의 여유를 택하고, 비정규직은 노동시간을 더 가지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노동시간 감축을 위해 한편으로는 입법을 통한 노동시간 규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일자리나누기를 적극 시행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방법만으로 저임금노동자에게까지 좋은 삶을 보장할 수 없으니, 저자들은 개인의 소득이나 재산과 상관없이 조건 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저자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현실적 타당성이 적지 않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도 적극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흥미 있는 제안도 여럿 있다. 예를 들면, 기본소득 논의의 일환으로 고든 브라운Gordon Brown 재무장관의 ‘아동신탁기금’Child Trust Fund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아이가 태어나면 국가가 아이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하여 천 파운드 조금 넘는 돈을 입금하고 신탁관리 시킨다. 본인은 18살이 될 때 목돈을 찾아 미래 설계의 마중물로 쓰게 하자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한 가장 큰 반론은 공짜가 인간을 게으르게 만들고 윤리적으로 타락시킨다는 주장일 터이다. 그런데, 스케델스키 부자는 이렇게 묻는다. 그러면 상속은? 왜 우리는 개인들이 상속된 돈을 잘 관리하는데, 공민의 돈은 낭비한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상속도 역시 공짜로 얻은 것 아닌가. 이런 대답은 이 저작에서 가장 통쾌하고 저자들의 통찰이 번뜩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만, 소비활동 규제 부분에서 제시하는 정책대안은 노동시간 감축 부분보다 설득력이 떨어진다. 예를 들면, 소비규제를 위해 광고규제를 주장하는데 이미 인터넷과 SNS 시대에 들어선 지금 대중매체를 통한 광고의 힘과 규제의 가능성을 과대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저자들은 사치가 필요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에는 어딘가 과거 도덕주의자들의 투박하고 검역하지만 고결한 삶의 양식에 대한 동경도 보인다. 하긴, 그래서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가 진정 지속가능한 사회를 원하다면, 지금보다 훨씬 절약하고 재활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의 “국제적 함의” 부분에 섞여 들어간 정치적 순진성에 대해서는 이미 지적했다. 하지만, 좋은 삶은 지역에 뿌리를 박은 삶이고, 그런 의미에서 지역 수준의 자급자족이 중요하기에 세계화를 강제로 추진하지 말 것을 주장하는 대목에는 나 자신 적극 공감한다. 반세계화 운동에 찬동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세계화를 지나칠 정도로 국민국가의 대척점으로만 생각하는 관행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장 적절한 수준의 공동체는 지역, 그것도 국민국가보다 작은 중소도시 규모이어야 할 것이다. 지역 먹거리 운동은 비교무역의 가격경쟁력으로만 볼 문제가 아닌데, ‘좋은 삶’과 연관된다고 믿을 때 비로소 지역민들은 지갑을 열고 소비자에서 참여자로 변모하지 않겠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