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바로 세워야 독서문화를 살릴 수 있다
여을환(사단법인 어린이도서연구회 상임이사)
1. 우리 사회 독서문화의 실상을 정확하게 인식하자.
이 사회의 독서문화는 심각한 병증을 앓고 있으며, 자라나는 세대의 독서상황은 비관적이다.
첫째, 학습 때문에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인류의 지적 역사를 축장한 것이 책이니 말이 되지 않는 얘기다. 학습=교과서=시험=성적의 등식이 성립하는 이 사회의 기현상이다. 이때 학습은 총체적 지적 발달과는 거리가 머니, 학습 때문에 책을 못 읽는다는 말은, 눈앞의 것을 위해서 무한한 가능성을 희생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공부하느라 책을 안 읽는 게 당연한 현상이 되어왔다. 수많은 학생들이 책과 사귀지 못하고 성인이 되었고 책 안 읽는 사회가 되었다. 문제라고 지적된 세월이 오래여서 이 기현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상상력조차 작동하지 않는다. 독서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아무리 높아져도 이 명제를 조금도 흔들지 못하고 있다.
올해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어린이의 독서율이 만 10세를 기점으로 빠르게 하락한다고 한다. 독서문화의 장래에 대한 심각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독서율이 가장 높은 초등학생 시기에 이미 독서율이 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들이 그전보다 더 일찍 자녀를 학습으로 내몰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2004년 전후를 기점으로 학습물 성격의 전집 출판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유아 독서에 선행학습 개념이 적용된 데서 확인된다.
둘째, 너무 빨리 읽고, 너무 많이 읽는다.
자녀교육에 대한 불안감으로 조기교육이 독서에까지 확산된 결과이다. ‘독서로 후천적 영재를 만든다’ ‘생후 72개월 이내에 1만 권을 읽으면 영재가 된다’는 말이 많은 부모에게 영향을 끼쳐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책에 중독되고 유사자폐 증상을 보이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이런 일은 독서교육 과열현상의 극단적인 예이나 그 저변은 아주 넓다. 아이가 날마다 읽는 책을 쌓아놓고 ‘인증샷’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부모가 많고, 몇 만 명씩 모이는 육아카페와 전집카페에서는 ‘도전 300권’ 하는 식의 경쟁적인 독서열이 유행한다. 어린이가 있는 집은 서재가 아니라 작은 도서관처럼 책이 많은 집도 드물지 않다. 이런 저변이 있기에 ‘독서영재 신화’가 위세를 떨치는 것이다. 독서에 대한 전문적인 정보는 없고 상업적인 정보만 넘치니 비상식이 상식이 된다.
조기문자학습은 거의 보편화가 되었고 자신의 발달수준에 맞지 않은 독서로 책 속에 깊이 빠지는 재미를 모른 채 글자만 읽는 아이들이 아주 많다. 책을 쌓아놓고 억지로 읽게 한 결과 많은 아이들이 책장을 휙휙 넘기며 건성으로 읽고 있다. 공부에 찌든 아이들은 금방 읽어치우는 가벼운 통속물과 게임스토리북이 아니면 손에 잡지 않는다. 학습만화류가 초베스트셀러가 되고 도서관 대출률도 가장 높다.
과도한 교육열과 경쟁에 대한 강박증이 학생들의 잠재적인 독서발달을 제약하고 독서장애를 낳고 있다. 심한 경우는 독서불능에 빠지고, 가벼운 초독서증을 겪는 아이들도 많으며, 대다수 아이들이 깊은 독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낸다.
셋째, 개인이 돈을 내고 독서를 배운다.
수능시험과 논술고사 실시(1994), 제7차 교육과정 실시(2000)와 함께 학교교육에서 독서활동과 독서토론이 강조되고 시도교육청에서도 독서목록을 발표하고 각종 시책을 벌여왔다. 그렇지만 실제로 학교교육에서 독서는 여전히 교과학습에 밀려 별반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교가 독서를 강조한 결과 사교육계에는 엄청난 파장이 일어나 몇 조로 추산되는 독서논술사교육이 성장하였다.
독서분야에서도 현재 우리 사회의 공교육과 사교육의 관계가 그대로 재연되었다. 학교는 평가를 쥐고, 실제 교육을 시키는 일은 사교육이 맡는 것이다. 교육부가 입학사정에 독서이력을 포함하겠다는 발표가 난 뒤 유아독서사교육시장에도 독서이력관리프로그램이 도입되었다. 교육부는 방침을 철회했으나 사교육계는 그대로 진행중이다.
사교육 일반과 마찬가지로 독서사교육은 독서의 자연스런 기초를 허물었다. 가정에서 ‘사랑을 주는 무릎’에서 즐거움으로 경험되어야 할 독서가 학습지 선생님 손에 넘겨진다. 아이들은 책을 읽고 감상을 이야기 나누는 것이 아니라 교재에 따라 책을 요약하고 분석하는 것을 학습하고 문제를 푼다. 책 읽는 사람을 수동화하고 소외시키는 독서교육이 자발적이어야 할 독서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사교육이 학생들에게 끼치는 최악의 해악은 스스로 학습할 수 있다는 믿음, 자신에 대한 존중심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독서분야에서는 그보다 더 끔찍한 결과가 빚어진다. 독서하는 자아의 주체성을 잃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내적인 생활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체험할 기회를 빼앗기는 것이다. 이는 우리 아이들이 자발적이고 즐거운 배움을 경험할 마지막 가능성이 훼손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결론적으로 자라나는 세대 속에서 독서는 본디 가치와 아우라를 상실하고 말았다.
독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허상이고 진실성이 없는 말이 되었다. 문학작품을 즐겨 읽은 사람보다 시험 출제빈도가 높은 작품을 골라 요약집과 참고서로 대비한 사람이 평가를 잘 받는다. 학생들에게 독서가 인성에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읽기 싫어도 참고 읽어야 한다면서, 그렇게 책 안 읽으면 대학 못 간다고 협박하는 것이 지금 기성 세대가 심어주는 독서의 가치요 의미이다. 청소년이 책을 즐겨 읽으면 “공부에 자신 있나 보지.” 하고 비아냥댄다. 입으로는 독서가 인격 함양과 교양에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대다수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자라나는 세대가 몸소 느끼는 독서문화이다. 그들의 눈에, 우리 사회는 독서의 가치를 믿지 않으며, 성찰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다. 삶의 덧없음을 성찰하지 않으며, 눈앞의 이기와 성공을 쫓아 사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다. 문화 부재, 가치 부재 상태를 괴로워하지 않는다. 한 해에 한 권의 책을 읽지 않아도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
2. 독서를 위축시키는 매체환경의 변화에 엄중하게 대비하자.
스마트시대의 도래는 기초가 허약한 우리 독서문화에 더욱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지난해 스마트기기와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멀티태스킹에 익숙해진 성인들의 뇌가 눈앞에 팍팍 다가오는 강한 자극에만 반응하는 ‘팝콘브레인’으로 나타난다는 연구보고가 발표되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미국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주의집중 시간이 짧고 통합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우리 아이들한테서도 머지 않아 그런 현상을 보게 될 것이다.
지난 2010년 조사를 시작한 지 처음으로 올해 조사대상을 만 5세 이상 아동으로 확대한 인터넷중독률 조사에서, 유아동(만 5세~만 9세)의 인터넷중독률이 성인보다 높게 나타났다. 유아동의 경우 검색보다 게임 이용이 높고, 게임은 중독으로 쉽게 이어진다. 이에 더하여 스마트폰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유아들도 거기에 친숙해질 기회가 많아졌다. 스마트폰 사용은 인터넷중독률을 높이는 요인이다.
인터넷과 스마트기기 사용이 독서 동기를 약화시킨다는 경계심이 아직은 널리 퍼져 있지만, 학습이라는 절대가치 앞에서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지난해 4살 아동이 스마트폰의 교육용 앱을 활용해 한글을 쉽게 떼었는데 그림책을 주니 ‘터치’에 반응하지 않자 책을 밀어버렸다는 기사가 났다. 이 기사를 접한 부모들의 반응에서 재미있게 한글을 뗄 수 있다면 스마트폰을 이용하겠다는 쪽이 더 많았다.
그런데 정부가 나서서 디지털교과서를 개발해 학생들 손에 스마트기기를 쥐어주겠다고 공언하였다. 또한 이미 그전에도 독서교육종합지원시스템이라는 대규모 전산시스템과 IT기술을 이용하여 학생들의 독서활동을 북돋운다는 계획을 추진한 바 있다. 정부가 보여준 기술적 효율에 대한 맹신으로 보건대, 어린이와 청소년의 지적인 성숙을 꾀할 능력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정신건강을 보호할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스마트교육 추진은 당장 중단해야 한다.
자라나는 세대가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 보편화될 새로운 읽기는 과거와 같은 독서와는 아주 다른 것이 되리라고 예상된다. 단속적으로 빠르게 바뀌는 정보에 순간순간 접속하는 새로운 읽기는, 전통적인 독서가 인류에게 준 생각하는 힘을 발달시키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독서에서 얻은 혜택을 어떻게 전수할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3. 독서문화 진흥을 위한 정부의 역할
첫째, 학습 때문에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리의 입시문화, 교육현실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
독서시민운동과 도서관계, 교육계가 독서 진흥을 위해 노력하지만 충분히 효과를 내기 힘든 결정적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교육 현실이다. 요즘 아이들은 4학년만 되면 도서관에서 보기 힘들어진다. 부모들은 초등학생 자녀를 데리고 도서관에 와서 학습지와 문제집을 풀린다. 교사들도 초등 고학년 담임을 맡으면 독서시간을 만들기 힘들다. 출판도, 교과연계도서, 학습 위주 도서에 얽매여 있다.
책은 쉬운 매체가 아니며 갈수록 상대적으로 어려운 매체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책은 스스로 열중해 생각을 집중할 수 있어야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그래야 더 잘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중하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학습시간을 줄이고 책 읽는 시간을 늘릴 수 있게 해야 한다. 학업부담과 입시스트레스를 줄여야 인터넷게임에 대한 학생들의 의존도를 줄일 수 있다.
둘째, 범사회적으로 왜곡된 독서의 가치가 바로 서고 독서문화에 혁신이 일어나도록 힘써야 한다. 정부 스스로 독서가 공공을 위한 가치라는 인식의 전환을 이루고 가정, 학교, 사회가 협력할 수 있도록 역할하여야 한다.
독서는 개인적 가치임과 더불어 공공적 가치이며, 자유와 더불어 이해, 연대, 공동체를 위한 가치이다. 그러므로 가정과 학교, 사회가 모두 바람직한 독서문화를 가꾸는 데 책임이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정부는 그러한 인식이 확산되도록 힘서야 한다.
교육계는 학생들에게 경쟁을 위해서, 평가를 받기 위해서 독서한다는 전도된 가치를 심어 주어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 독서실적을 평가하는 관행을 근절하여야 한다. 고등학교 학생생활기록부 독서활동상황 기록난을 없애야 한다. 특수목적중고등학교 입학 사정에 독서상황 기록이 포함되지 않도록 지도하여야 한다.
셋째, 외부의 자극과 동원과 강제가 아니라 책 읽는 사람의 자발성과 자율성에 의지하여 독서문화를 진흥하여야 한다. 독서와 출판과 도서관 분야의 제반 정책이 자발적인 독서를 북돋우는 방향으로 상승작용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
독서행위는 책을 고르고, 책을 읽고, 책 읽은 감상을 다른 독자와 나누는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과정에서 책 읽는 사람의 자발성을 동력으로 삼아야, 일시적인 관심이 아니라 독서의 생활화로 이어질 수 있다. 독서 주체가 책을 고르는 과정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출판의 다양성과 건전한 도서 유통 체계, 지역서점의 활성화, 도서관의 장서 확충, 풍부한 책 정보의 생산과 유통이 필요하다.
책을 읽는 과정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독서를 가르칠 게 아니라 직접 독서 경험을 쌓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가정에서는 보호자가, 학교에서는 교사가, 도서관에서는 사서가 어린이와 학생들에서 책을 읽어주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학부모, 교사, 사서의 책 읽는 모임을 지원하고, 어린이와 학생들이 참여하는 책 모임을 늘려야 한다.
책 읽은 감상을 다른 독자와 나누는 것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교육자와 강사가 주도하는 프로그램식 독서서비스가 아니라 어린이, 청소년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독서활동을 진작하고, 지역과 학교의 책 모임을 지원하며, 자원활동을 통해 독자 상호간에 교류를 늘리도록 하여야 한다.
넷째, 공공의 독서환경과 독서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과 상업논리의 영향을 억지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학교와 도서관에서 전문인력을 육성하고, 주민의 참여와 자치역량을 북돋워 공적 서비스의 토대를 두텁게 해야 한다.
학교와 도서관에 필수 인력을 배치하고 그들이 현장에서 전문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당장의 예산 부담을 줄이고 무원칙하게 인력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전문역량이 발전하지 못하고 공공의 독서서비스 개념이 모호해지며 학교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의 위상이 낮아진다.
정부와 지자체의 독서진흥시책이 늘어나면서 사교육 종사자와 민간업체의 활동무대가 공공영역으로 확대되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무분별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도서관이 사교육에서 성행하는 프로그램을 유치하고 외부용역업체를 통해 행사를 기획하는 일도 있다. 그 과정에서 민간에서 발급한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사실상 공인해주며, 심지어 도서관에서 그러한 자격 과정이 진행되도록 공간을 제공하는 예도 있다. 이는 독서의 사교육화를 부추길 뿐더러, 자발적인 주민의 참여를 위축시켜 바람직한 도서관문화를 저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