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권
여러 가지 질문 중에 “감정을 가진 로봇과의 연애가 가능하다고 보시나요?”라는 질문을 골라봤습니다.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라는 질문도 맥을 같이하는 질문인데요. 요새 나온 영화 중에서는 『그녀Her』라는 영화가 이런 소재를 다루고 있지요? 일단 이 질문에 답이 있는지 아닌지는 모두가 아실 테니 저는 먼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미래에 감정을 가진, 사랑스럽고, 귀여운 로봇이 나온다면 나는 이 로봇과 우정을 맺든 연애를 하든 사람처럼 감정적으로 대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 번쩍 들어보세요. 아무리 감정이 풍부한 로봇이 나오더라도 로봇과는 절대 우정이나 사랑에 빠질 수는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비슷비슷한데 사귈 수 있다는 친구들이 조금 더 많네요.
이것은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가의 문제예요. 여러분은 감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감정이라는 것이 그 대상 안에 있는 것인가? 다시 말해 물체, 로봇, 반려동물에게 감정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속에 이는 것인가? 가짜 꽃을 보고 아름다워하면 안 되나요? 감정이 나의 마음속에 이는 것이라면 그 대상이 사람이건 신이건 기계이건 다를 바가 없겠지요. 여러분들이 어릴 적 애지중지하던 인형이나 장난감이 있을 거예요. 그 장난감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특별한 것은 바로 여러분이 거기에 쏟은 여러분의 감정과 시간과 정성일 거예요. 『어린 왕자』를 보면 사막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이야기하지요. 장미꽃이 너에게 특별한 것은 그 장미꽃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네가 장미꽃에 물을 주고 사랑을 주고 보살펴줬기 때문인 것이라고.
인공지능 정보기술 업계에서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개발하는 게 가상현실이에요. 그중에서도 섹스로봇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요? 인간파트너 대신 기계파트너와 함께 살 수 있게 된다면 웬만한 사람들은 로봇파트너를 쟁여놓으려고 할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에 무척 많은 개발자들이 연구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점점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런 세상에서 사람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로봇이 등장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 로봇을 통해 기쁨과 위안과 안정을 얻을 수 있게 될 거예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똑똑한 기계를 필요로 하고 원하게 되겠죠? 그러면 인간성의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연애를 위해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거나, 종족 본능의 달성을 위해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대신 아주 쉬운 조작을 통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의 감정을 읽지를 못하는 상황이 올 수 있지요. 타인의 감정이란 나에게 거칠게 다가올 때가 있지만, 반려동물이나 반려로봇의 감정은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으니까, 사람의 감정마저 통제가능하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될 수도 있어요. 또 외로움이나 슬픔, 좌절이라는 감정을 감정로봇의 설계를 통해 없애려고 할 수도 있고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정말로 인간다운 삶일 수 있을 것인가? 로봇시대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겠지요.
사회자
듣다 보니 갑자기 질문이 생기는데요. 이정모 선생님, 이러면 인류가 멸종하지 않을까요?
이정모
인류가 언젠가 멸종하게 되겠지만, 로봇 때문에 멸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웃음) 무안고등학교 박소연 양의 질문입니다. “창조론을 아예 부정하시나요? 이유가 무엇인가요?” 비슷한 질문들이 몇 개 더 있습니다.
제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교수님께서 일요일에 어딜 같이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일요일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돼서 못 가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더니 교수님께서 미안한 표정으로 “아, 네가 공부도 하고 주말에는 일도 하는구나. 무슨 일을 하니?” 물으십니다. 교회에서 일합니다, 라고 답하니 교수님께서는 제가 교회에서 운전을 하거나 힘을 쓰는 일을 할 거로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거참 고되겠구나,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죠. “아니요. 설교하는 게 뭐가 힘들어요?” 그리곤 뚜껑이 열린다는 게 뭔지를 처음 제대로 보게 됐습니다. (웃음) 과학자가 교회를 다닌다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집사람 따라 교회에 가는 게 아니라 설교를 한다고? 교수님께서는 화내시며 한동안 저에게 말도 안 거시더라고요. 교회에 가서는 장로님께 교수님과 이러이러한 트러블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이 선생님처럼 신앙이 좋은 사람이 과학을 하려니 얼마나 양심에 가책을 받겠습니까?”(웃음) 저 양심에 가책 안 받습니다. 가책 없이 과학도 하고 신앙도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에 따라, 그리고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에 의해 갖게 되었고요. 과학 시간에 주기율표를 배우면서 신의 존재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찾게 됨에 따라 감동을 받고 과학 공부에 뛰어들었습니다.
1992년 10월 31일은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기억하셔야 돼요. 이날은 저희 집사람의 스물일곱 번째 생일입니다.(웃음) 사실 이날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후손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한 날입니다. 교황께서는 우리가 수백 년 전에 갈릴레이를 핍박했는데 알고 보니 당신들 조상의 말씀이 다 맞았습니다, 라고 시인하셨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자전하며 태양을 중심으로 돕니다, 라고 인정하셨습니다. 1992년 이전에 로마가톨릭 사람들은 여전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죠. 성경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게 교회 권위에 상처를 준다고 생각해서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교리를 우기는 게 권위를 지키는 일인지, 교리를 수정하는 게 권위를 찾는 것인지를. 저는 요한 바오로 2세가 가톨릭의 권위를 되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감금되었지만 그 당시에 갈릴레이를 도와줄 스폰서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공주님께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공주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자연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성경과 자연은 모순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보기에 그 둘이 모순되어 보인다면 우리는 자연을 따라야 되는 겁니다. 왜냐면 성경은 그 시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쓰인 것이라 얼마든지 재해석할 수 있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학자와 신앙인이 모순되는 것처럼 말한다면 과학자를 따라야 합니다.” 수백 년 전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말입니다.
로마가톨릭이 과학과 대척점에 선 것은 역사적으로 두 차례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갈릴레이 때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냐 변방이냐의 문제. 또 한 번은 1850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나왔을 때 인간이 다른 생물들과 전혀 다르게 ‘선택된’ 만물의 영장인지 아니면 무수히 많은 생명 가운데 하나일 뿐인지의 문제. 실상 같은 문제였어요. 인간이 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길 바랐고, 인간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생명이길 바랐던 거예요.
창조론을 부인하냐고요? 저는 창조론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창조과학’으로 번역되는 말이 있는데 저는 창조과학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 과학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조차 반대해요.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요. 과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내부에서만 반복되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또 달리 말해서 저는 진화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진화주의자는 아니에요. 공룡 뱃속에서 삼엽충 화석과 새의 화석이 함께 발견되는 일이 나온다면 저는 진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그 순간에 다 버릴 수 있습니다. 과학은 진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과학이란 어떤 의심에 대한 잠정적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목성의 달은 67개였는데 두 달 만에 69개로 바뀌었습니다. 과학에는 영원한 게 없습니다. 제게 질문했던 친구들, 혹시 교회에 갔는데 목사님들이 과학과 다른 이야기를 하셨다면 그분들이 무식할 뿐인 거예요. 목사님이 무식할 수 있냐고요? 무식할 수 있어요. 저도 헌법에 대해서는 무식해요. 경제학에 있어서도 무식해요. 그 누구도 모든 것에 대해 다 알 수는 없어요.
창조론과 진화론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곳은 한국과 미국뿐이에요. 제 딸이 진화론을 배운 곳은 저희가 독일에 있을 때 가톨릭학교 신부님으로부터였어요. 창조론과 진화론, 이 질문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논어』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호신불호학好信不好學이면 기폐야적基蔽也賊’이다. 믿기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싫어한다면 사회의 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제 책을 읽고도 다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질문해주신 분들께 감사하게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김선우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요즘 수능시험의 일방적이고 단일화된 문학 문제 출제 경향에 대해 비판하셨는데요.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으신 분이 계세요. 어느 분이신가요? 당연히 비판적입니다. 비판적일 수밖에 없어요. 가장 말랑말랑한 성장기를 거치고 있는 십대들의 두뇌활동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수능시험제도라는 시스템이라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본래 가진 사랑스러운 정서적, 이성적 능력들을 성장시키고 꿈꾸게 해야 할 시기에, 상상력의 가능성들을 갉아먹을 수 있는 수능시험이라는 시스템에 갇혀서 살고 있는 게 한국의 십대들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간단한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요.
수능 시험에서 다른 것도 어렵겠지만 시는 정말 어렵죠? 틀려도 돼요. 부끄러워하지 말아요. 신경림 시인이 사석에서 해주신 이야기예요. 신경림 시인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 배우시죠? 신경림 시인의 손녀가 할아버지 시가 지문으로 나온 문제를 많이 틀렸대요. 속이 상했겠죠. 사실 「가난한 사랑 노래」는 어려운 시는 아니에요. 그냥 마음으로 읽으면 되는 시인데 문제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신경림 시인께서 손녀가 가져온 시험지로 문제를 풀어보셨대요. 시를 쓴 시인이 문제를 직접 풀었는데 다 맞았을까요? 상상하시는 그대로였어요. “무슨 문제가 이렇게 어렵나?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우리 애들이 다 풀고 산다는 것이냐? 내가 이걸 다 생각하고 시를 썼단 말이냐?”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여러분이 속상해하실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좋겠다.(웃음) 하지만 문제는 수능시험이라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바뀌기 전까지 여러분이 공부를 해야만 하시니 갈등이 클 거예요. 그럴 때 시험문제에 정답을 맞추는 방식으로 이 시를 이해할 것인가 하는 내적 갈등이 뚜렷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시다면 성공한 거예요. 시험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만도 하지만 내가 이 시를 읽을 때는 이런 느낌이었어, 라고 자기 느낌에 주목하는 두 가지 생각이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소위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이야기하는 물음표 하나를 가슴에서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갈등이 귀찮을 수 있어요. 포기하지 마세요. 그럴 때마다 여러분의 느낌에 계속 주목해주라는 이야기를 반드시 하고 싶어요. 시험이 나쁜 거예요 절대로. 그런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었어요.
다른 질문입니다. “작가님은 언제부터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라는 질문은 누가 하셨나요? 역사적인 사건이 계기가 되었나를 물으신 건가요? 마이크맨 달려갑니다.
학생
그렇습니다.(웃음)
김선우
고맙습니다. 제가 88학번인데 1988년에 대학에 입학할 때 열아홉 살이었어요. 어느 날 광주 다큐멘터리 사진전을 보게 되었어요. 1988년만 해도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처럼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시기였어요. 그 사진을 보면서 제가 십대 시절 꿈꿨던 것들, 혹은 한 세계가 완전히 깨지는 경험을 했어요. 가장 치명적인 것이 무엇이었냐면 엄청난 부끄러움이었어요. 드넓은 땅도 아니고 한반도라는 작은 나라의 아랫동네에서 참혹한 비극이 벌어지고 있을 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낙천적인 문학소녀이기만 했던 저는 옆 도시에서 그토록 참혹한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어요. 그리고 넉 달간 현실 인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비극에 처해있을 때, 그 비극의 전말을 알고 비극 앞에서 손 내밀 수 있는 자세를 가질 때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기 삶 앞에 부끄럽지 않은 자세를 갖게 될 것이다, 라는 생각. 현실 인식의 중요함을 그렇게 깨닫게 되었어요. 우리는 광주 이전에도, 이후에도 너무나 많은 비극을 목도하면서 살잖아요. 여러분 세대가 나이가 들었을 때 공유하는 가장 참혹한 비극은 세월호에 대한 기억이겠지요. 멀리도 아니고 눈앞 바다에서 아이들이 죽어갈 때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엄중한 질문을 던지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요. 우리는 역사 속에 있어요, 여러분.
문제는 청소년 여러분들이 청년이 되었을 때, 여러분들 앞에 펼쳐져 있을 우리 사회 현실이 사실 그렇게 밝지만은 않아요. 굉장히 고생을 하면서 여러분의 삶을 만들어가야 될 거예요. 그래서 자꾸만 얘기하는데요. 어려운 현실이 눈앞에 있다면 그것을 피해 가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해요. 우리는 그것을 위해 인문학적 이해,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하려는 시도를 계속하는 걸 거예요. 현실은 녹록지 않아요. 그런데 그로 말미암아 주저앉게 되는 순간부터 이 현실은 늪이 될 거예요. 우리는 밥벌이의 존재로 전락할 거예요. 너는 나중에 뭐가 되고 싶니, 라는 물음에 “공무원이요, 집주인이요”라고 대답하는 건 한국현대사의 질곡이 너무나 심했기 때문에 그것이 반영된 걸 거예요. 우리는 대학만 들어가도 스펙 쌓고 취업하려고 혈안이 되어야 해요. 청년기에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발목이 잡히면 밥벌이 문제만 해결하다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될 겁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이 현실을 지혜롭게 넘어가 봐요.
어떻게 내가 가진 꿈을 성장시키고, 내 꿈을 세상이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걸 하자면 일단 자세! 어려운 현실을 직시함에도 일단 발뒤꿈치 정도는 들어주는 당당한 자존감과 자세가 필요해요. ‘이 현실이 너무 무거워!’ 하고 말면 그 늪은 우리 발목을 끝까지 잡아당길 거예요. 발뒤꿈치를 들어 하늘을 보겠다, 멀리 보겠다, 잡아먹히지 않고 멀리 보겠다는 자세가 중요해진 시대가 된 것 같아요. 다소 문학적인 말로 옮기자면 ‘꿈꾸기’가 중요한 시대예요. 나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된다는 것, 그리고 현실에 발을 딛되 발뒤꿈치를 들고 당당하게 자기 보폭으로 걸어가 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현실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들께 해드리고 싶어요. 저자로 오신 선생님들을 보건대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덕질의 왕들.(웃음) 공룡덕후, 로봇덕후, 헌법덕후, 저는 그냥 책덕후예요. 발뒤꿈치를 딱 들고 자기 꿈을 응시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덕질일 수 있어요. 내가 무얼 할 때 제일 즐겁고 행복한지를 빨리 찾아낼수록 그 사람의 삶은 길게 행복할 거예요. 지금의 덕질이 나중에는 다른 덕질로 바뀔 것이고, 또 다른 덕질로 바뀌겠죠. 내가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고 행복할 것인가의 자기 감각 없이는 앞으로는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덕후만이 살아남는다! 그 감각을 깨우는 것이 인문학을 하는 것, 시와 소설을 읽는 일들과 통할 겁니다.
김승환
끼어들기가 참 힘들어요.(웃음) 가능하면 답변을 간략하게 해달라고 지시를 받았는데 고지식하게 따르다가 아예 발언 기회도 못 얻을 것 같아요. 제게 주신 질문들에 조금만 더 답변을 해도 괜찮겠지요?
“헌법이 실제로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다고 생각하시나요?”라는 질문을 하셨어요. 여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헌법 제11조 1항이에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헌법은 그것이 행정권이 됐건, 사법권이 됐건, 입법권이 됐건 평등하게 적용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헌법의 현실은 그와 다를 수가 있어요. ‘유전무죄有錢無罪’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죠? 이게 가능합니까? 헌법은 이것을 못 하게 하고 있어요. 그런데 헌법과 한참 괴리된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엉터리 같은 판결이 나올 때 여러분들은 계속 문제 제기를 해야 됩니다. 시인은 시로, 화가는 그림으로, 헌법학자는 헌법으로. 그러라고 우리 헌법 제21조가 있지요?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독일 헌법 제5조 1항은 “누구든지 자기의 의사를 말, 글 및 그림으로 자유로이 표현ㆍ전달하고,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알 권리를 가진다.”라고 같은 내용을 우리 헌법보다 훨씬 더 명확하고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또 이런 질문도 있었어요. “교육감으로 계시면서 신념에 따른 결정을 많이 하시던데요.” 정말 고맙습니다. 관심 가져주셔서요. 너무 외로워요.(웃음) “그런데 그런 결정에 대해 당장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라고 하셨습니다. 2012년 1월에 정부가 학교폭력종합대책을 발표했습니다. ‘학교폭력’이라니 폭력이라면 행위인데 그 주체는 누굽니까? 주체가 학교입니까? 우선 이렇게 엉터리 같은 용어를 만들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내용을 보면 아이들에게 징계처분 내린 다음에는 그 사실을 학생부에 기재해서 가해학생이 대학에 진학하고자 할 때, 취업하고자 할 때 불이익을 주라고 명령하고 있어요. 대한민국 헌법 제37조 2항입니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헌법 제13조 1항은 이중처벌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아시지요? 전두환과 노태우도 단 한 번의 처벌로 끝을 냈어요. 그런데 왜 학생들에 대해서만은 한번 징계처분을 내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학생부에 새겨 영원히 따라다니게 하냐는 겁니다. 2013년 KBS 뉴스에 따르면 이 정부 정책 하나로 인해 대학입학을 못하는 학생이 150여 명입니다. 관심 가져주세요!
구본권
저도 짧게만 더 하겠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이라는 게 있어요. 첫째,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둘째,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셋째, 로봇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선에서 로봇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간단하지만 중요한 원칙이라는 건데요. “로봇 3원칙에 따르면 군사형 로봇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강력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군사형 로봇을 개발해야 될까요?”라는 질문을 한 학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이 궁금해요.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해서 군사형 로봇을 개발해야 된다는 학생들 손 들어보세요.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군대에 안 갈 수도 있어요.(웃음) 군사형 로봇 혹은 살생무기 자체를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학생 손 들어보세요. 어떤 게 답일까요? 현재 우리는 핵잠수함도 만들고,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도 얼마든지 만들고, 사용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로봇에 관해서만은 킬러로봇을 만들지 말자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여기서 답을 내리지 말고 조금 이따가 우리 이야기 나누도록 해요.
사회자
마지막으로, 작가님들께서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보신 소감과 작가님들을 이렇게 험하게 굴리는 곳에 오시게 되신 소감을 다섯 글자로 한번 표현해주십시오.
이정모
어렵다. 아주!(웃음)
구본권
천지대개벽天地大開闢!
사회자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구본권
이 표현은 예전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 상하이를 방문하면서 썼던 말입니다. 그냥 놀랍다는 말을 다섯 글자로 늘인 말이에요.(웃음)
김승환
참 재미지다! 사실 저는 어디에 가든 질문지를 사전에 받는 일이 없습니다. 미리 질문을 받아놓으면 지적 긴장감이 떨어져요. 지적 호기심이 떨어지고요. 갑작스레 질문을 받을 때 바짝 긴장이 되고 그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오늘 참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김선우
헌법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굉장히 이상해요. 우리 시인의 언어인데요.(웃음) 저는 이렇게 할게요. 재밌게 놀자!
사회자
작가님들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뒷이야기는 저녁 식사 후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 2017년 8월 3일, 4일, 김해대학교에서 김해시와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공동 주최로 '제9회 김해 청소년 인문학읽기 전국대회'가 열렸습니다. 전국 44개 학교에서 모인 220명의 학생들이 이정모, 구본권, 김승환, 김선우 작가와 함께 '희망을 말한다는 것'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나누었습니다. '저자와의 대화' 시간에 나온 이야기를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