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 살펴보았듯이 그림책의 그림은 작가의 시각을 선명하게 담고 있다. 『구름빵』의 작가 백희나는 다음 작품인 『달 샤베트』2010에서부터는 다양한 가족을 그림책에서 보여준다. 『어제저녁』에는 혼자 사는 양 아줌마와 8마리 아기를 유모에게 맡기고 일을 다녀오는 흰토끼씨, 집안은 온통 어질러져 있고 이틀이나 굶고 있는 여우와 여우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산양, 피아노를 치려면 발가락이 시리기 때문에 털양말을 신어야 하는 개부부와 개부부네 집에 세 들어 사는 생쥐까지 아주 다양하게 사는 모습을 그림책에 담고 있다. 『이상한 엄마』에는 집안일을 잘 못하는 엄마가 나오고, 『알사탕』에는 ‘숙제했냐?’ ‘장난감 다 치워라’ ‘이게 치운 거냐?’ ‘밥 먹다 화장실 가지 마라’ ‘꼭꼭 씹어라’ ‘물 컵은 하나만 써라’ 등등 끝없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아빠가 나온다.
『장수탕 선녀님』에는 날씬하지도 예쁘게 꾸미지도 않은 여성이 나온다. 허리의 잘록한 부분이 없는 엄마는 뱃살이 늘어져 있다. 이런 여성은 『이상한 엄마』에도 나오는데 ‘요즘 일하는 여성 중에 그림책에서처럼 아랫배가 볼록 나온 사람이 어디 있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주변에는 뱃살 없는 사람보다도 뱃살이 늘어진 사람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뱃살이 늘어지지 않은 것이 정상이고 늘어진 사람은 비정상이라는 생각에서 비롯한 질문이다. 이런 왜곡은 끊임없이 다이어트에 연연하게 만든다. 이는 여성에게 특정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날씬함을 여성의 상징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위험한 요소이다. 책의 인물이나 드라마 속 여성들은 현실의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다. 날씬해야 한다거나 예뻐야 한다고. 드라마를 정신없이 보다가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돌아볼 때 좌절감을 느낀다면 이는 드라마의 설정이 잘못된 것이다. 책의 인물 역시 함께 살고 있는 사람과 괴리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양하게 보여주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고정관념을 깨는 모습을 어린이책에서 자주 만나기를 바란다.
여성주의는 여성에 대한 생각의 틀을 갖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아래의 그림에서 거짓말을 한 병관이가 경찰에 잡혀갈 때 엄마는 울면서 초등학생 딸인 지원이에게 위로를 받고 있는 반면, 아빠는 또 다른 경찰에게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 등산가는 장면에서도 아빠, 엄마, 지원이, 병관이 순서로 산을 오르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이는 마치 가족의 서열을 매기는 듯하다. 한편 병관이가 지원이에게 자전거를 타자며 조르는 장면을 다음 그림처럼 표현했는데 병관이는 지원이의 치마를 잡아당기고 속옷이 드러난 지원이는 당황해하고 있다. 반대의 상황에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조를 때 남자아이가 속옷이 드러나 당황하는 모습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남자아이는 옷을 들추는 존재이고 여자아이는 방어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엿보인다. 뒤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며 웃는 남자어린이와 지원이와 같은 표정으로 당황해하는 여자아이의 표정으로도 이런 인식이 드러난다. 위의 세 가지 장면은 여성과 남성에 대한 어떤 생각의 틀에서 비롯된 연출이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여학생에 대한 성폭행 사건이 있은 후, 어두워지면 여학생들에게 캠퍼스를 돌아다니지 말라는 처방을 내렸다. 이에 반발한 여학생들이 해가 지면 남학생들이 돌아다니지 말라고 맞받아쳤는데 남학생들은 범죄자 몇 명 때문에 모두에게 나오지 말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요구라고 반발했다. 뒤집어 생각해보기 전까지 여성에게 한 요구가 부당하다는 걸 알지 못했던 것이다. 차별인지 아닌지 쉽게 구별하려면 주체를 바꾸어 보면 알 수 있다.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사계절, 2000에서 알을 품고 싶은 꿈을 가진 암탉 잎싹은 청둥오리인 초록머리를 돌본다. 잎싹과 둘이 외톨이로 살아온 초록머리는 집오리의 무리에 끼고 싶어 했다. “어차피 나는 오리인걸. 괙괙거릴 수밖에 없어.”라며 오리 무리가 있는 마당으로 가고 싶어하는 초록머리에게 잎싹은 “그게 뭐 어떠니? 서로 다르게 생겼어도 사랑할 수 있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라고 답하며 둘이 살자고 한다. 그리고는 ‘저 애는 지금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야, 우리가 서로 다르게 생겼다는 사실을.’이라고 생각하는데 서로 다른 걸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건 오히려 잎싹인 것 같다. 다르게 생긴 것을 존중하면서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민하지 않는 건 오히려 엄마인 잎싹이다. 마당으로 가면 초록머리의 날개가 잘릴 거라는 걱정과 마당 식구들이 초록머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외로울 거라는 걱정을 혼자만 하고 초록머리에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는 서로 다르지만 가족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초록머리가 모른다고 단정 지어 버린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초록머리와 공유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잎싹은 끊임없이 초록머리를 판단하고 평가한다. 어른인 잎싹은 초록머리를 평가하고 규정짓지만 초록머리가 잎싹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아니 평가할 수가 없다. 초록머리는 아이이고 잎싹은 어른이니까. 초록머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어른에 대한 반항뿐이다.
“어리다는 건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 아가 너도 이제 한 가지를 배웠구나. 같은 족속이라도 모두 사랑하는 건 아니란다.” 잎싹은 어른이고 초록머리는 아이이기 때문에 잎싹의 경험과 초록머리의 경험을 구별하고 둘의 경험을 동등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저수지에 청둥오리 떼가 날아온 것을 보고 잎싹은 청둥오리가 아기를 데리고 저수지로 가라고 한 말뜻을 알게 되었을 때 “이 친구야, 난 이제야 다 알았어.”라고 말하는 것과 비교된다. 어린 초록머리의 부족함은 체험을 해야만 채워지고, 어른인 잎싹은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쳐가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배움에 관하여 어린이와 어른을 다른 존재로 그리는 것은 여성과 남성을 구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차별적 시선이다.
『두발자전거 배우기』길벗어린이, 2009에서 병관이가 보조바퀴를 떼어달라고 조르자 아빠는 “아직 위험해. 넘어지면 어쩌려고. 키가 좀 더 자라면 해 줄게.” “안 돼, 여기는 위험하니까 넓은 곳으로 가서 배우자.” “잔디밭에서는 넘어져도 괜찮으니까 저기 가서 연습하자.”라며 대부분의 판단은 아빠가 한다. 『싸워도 돼요?』2013는 제목부터 어른에게 묻는 형식을 취하는데 병관이의 질문에 “걔가 먼저 때리려고 할 때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함부로 주먹을 쓰면 안 돼. 주먹은 정의로운 일에만 쓰는 거야.”라며 아빠는 답을 알려 준다. 선생님 역시 “우진아 친구를 괴롭히는 건 나쁜 짓이야. 그리고 병관아, 그런 일 있으면 선생님께 이야기해야지. 폭력을 함부로 쓰면 안 돼.”라며 어린이는 묻고 어른은 답을 알려준다. 그런 일 있으면 선생님께 이야기해야지 어린이 스스로 뭔가 해봐서는 안 된다. 무엇이 정의로운 일인지 판단하는 것도 어른만이 할 수 있다. 어린이를 스스로 생각하고 겪고 배우는 존재로 그리고 있지 않다. 어른은 가르치는 존재로만 아이는 배우는 존재로만 그리는 것은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를 수직적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빡빡이 프란츠의 심술』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에어하르트 디에틀 그림, 비룡소 나오는 프란츠 가족의 대화 장면이다.
프란츠 : 이제 가비한테 가 볼게요.
아 빠 : 그러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다. 저녁 식사 후에는 놀러가는 게 아니지.
프란츠 : 하지만 가야 해요.
아 빠 : 안 된다.
프란츠 : 꼭 지금 가야 해요. 내일 아침이면 다 잊어버린단 말이에요. 빌어먹을!
아 빠 : 프란츠! 너 방금 뭐라고 했니?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운 거야?
엄 마 : 그야 당신한테 배운 거겠죠.
아 빠 : 난 그런 욕 안 해요.
요제프 : 아니요. 어제 아빠가 자동차 열쇠 찾다가 ‘빌어먹을’이라고 하셨어요! 세 번이나요!
엄 마 : 거 봐요.
아 빠 : 넌 끼어들지 마!
요제프 : 아니요. 앞으로도 전 제가 생각하는 걸 솔직하게 말할 거예요.
엄 마 : 그러엄.
아 빠 : 내게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고 해서, 프란츠가 꼭 날 따라한다고 볼 순 없지 않소!
엄 마 : 아 그래요! 그러니까 당신은 예외란 말이지요!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이 말예요!
프란츠는 생각했어요. 분위기가 험악해지는군. 날이 더우면 우리 집은 언제나 저녁때 싸움이 벌어진다니까.
위 대화에서 어린이는 어른 앞에서 당당히 말하고, 어린이 앞이라고 어른의 허물을 감추지 않는다. 요제프에게 화를 내고는 있지만 아빠는 아들 덕분에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될지도 모른다. 가르치고 안내하는 어른과 배우는 어린이가 아니라 대화하는 어린이와 어른이 있을 뿐이다. 어린이를 다루는 시선은 어른을 다루는 시선과도 다르지 않다.
지하철역과 찻길에서 마구 달리고, 누나를 기다리지도 않고 혼자 지하철을 타 버린다거나, 맥락도 없이 집안을 어지르고 소리 지르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뛰는 병관이 그림은 어린이를 오해하게 만든다. 어린이를 위험하고 생각 없고 무조건 떼만 쓰는 존재로 오해하게 만든다. 여성이나 장애인 혹은 아사아인에 대해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씌운다면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을 거다. 그런데 유독 어린이에 대한 이런 이미지화를 걱정하는 사람은 적다.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에서 어린이는 함께 사는 어른을 관찰하고 이해한다.
명절날 나는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할 때마다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복숭아나무가 많은 마을에 사는
신리고모 고모의 딸 이녀 작은 이녀
열여섯에 마흔도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뾰로통하니 성을 잘 내는
살빛이 거무스레하고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교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모
고모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멀리 파랗게 보이는 산 너머에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갛고 언제나 흰옷이 정갈하던
말 끝에 서럽게 눈물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모
고모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배나무 접을 잘 붙이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고 올가미를 잘 놓는
먼 섬에 밴댕이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작은아버지
…(이하 생략)…
어린이의 눈이 어른과 다르지 않다. 토산 고모는 뾰로통하니 성을 잘 내고 살빛이 거무스레하고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맣고 큰골 고모는 해변에서 과부가 되었고 코끝이 빨갛고 서럽게 눈물 짤 때가 많다. 작은아버지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고 올가미를 잘 놓고 먼 섬에 밴댕이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한다. 어린이도 다 안다.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함께 겪고 함께 보고 느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동수의 『잘 가 안녕』보림, 2016은 “퍽, 강아지가 트럭에 치여 죽었습니다.”로 시작한다. 샤를로트 문드리크의 『무릎딱지』한울림어린이, 2010는 “엄마가 오늘 아침에 죽었다. 사실은 어젯밤이다. 아빠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난 밤새 자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달라진 건 없다. 나한테 엄마는 오늘 아침에 죽은 거다.”로 시작한다. 두 작품에 대하여 충격이라는 어른 독자의 반응이 많다. 어린이에게 죽음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우려 때문이다. 오히려 어린이 독자들은 진지하고 담담한 반응이다. 큰골 고모가 해변에서 과부가 되었다는 걸 아는 것은 이미 죽음을 경험한 것이고, 길거리의 로드 킬이 아니더라도 곤충을 비롯한 수많은 생명체의 죽음을 아이들은 이미 경험하고 있다. 어린이를 아무 것도 모르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건 어린이를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이다.
또, 모성처럼 어린이와 관련한 가치를 어떻게 다루는가도 중요하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잎싹은 알을 품어 키우고 싶은 자신의 꿈을 이루는데 마치 자신이 아닌 초록머리를 위해 대단히 희생하는 것처럼 그리고 있다. 잎싹의 희생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오직 모성만으로 잎싹과 초록머리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방식의 애정이 아닌 부족함을 걱정하고 희생하는 모성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에게 부채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잎싹의 희생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초록머리는 배은망덕이 되어버린다. 이런 모성은 엄마인 여성에게는 ‘희생하지 않으면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한다’는 죄책감을, 자식에게는 ‘부모의 희생에 보답’해야 하는 부담을 지운다. 사랑에 관하여 각자를 독립된 주체로 보지 않을 때 이와 같은 오류에 빠지고 만다.
여성이라는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은 여성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틀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이름으로 만들어진 생각의 틀도 같은 방법으로 성찰하자는 것이다. “여자가~” 라는 말의 편견을 깨었다면 “학생이~” “어린이가~” 라는 표현에도 의문을 가져야 한다. “넌 학생이고 난 교사잖아.”라든가 “억울하면 너도 어른 돼라.”는 식의 잣대가 어린이책에서 사라지길 바란다.
★ 이 글은 2017년 9월 2일 개최된 〈어린이문학과 여성주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발제문으로, 어린이책시민연대와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