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은 그림책 『구름빵』백희나, 2004의 한 장면이다. 치마를 입은 말이 들고 있는 커피는 자기 것일까? 양복 입은 고양이의 것일까? 상황에 따라 자기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 것일 수도 있다는 답은 참아 달라. 여러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려거나 정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해석에 내가 더 익숙한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누구의 커피일까?’라는 질문을 받기 전까지 무의식으로 생각하던 것, 혹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익숙한 것 때문에 벌어지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 반대에는 어색하고 낯선 것들이 있는데 이 낯섦이 부정과 혐오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경험에서 온다. 경험은 가치의 틀을 만들고, 틀이 만들어지면 그 틀로 세상을 보게 된다. 낯선 무언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어떤 틀 속에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기 틀 밖의 생각을 잘못된 시선이라며 부정하거나 소수의 생각이라고 무시하기도 한다. 소수자와 약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를 보면 낯섦이 어떻게 부정과 혐오로 이어지는지 알 수 있다. 차별금지법은커녕 차별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 전 남성 유튜버 두 명이 한 여성 게이머 방송진행자를 찾아가 죽이겠다는 내용의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려서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건이 있었다. 이 여성은 여성 게이머들이 성희롱을 당하거나 모욕적인 발언을 듣는 것에 대한 일종의 ‘미러링’여성혐오적인 말이나 행동을 반대로 뒤집어 보여주면서 비판하는 행위 차원에서 남성 비난 발언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에서 여성혐오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데 이에 대한 ‘미러링’에 대해서만 유독 죽이겠다는 내용의 동영상이 올라온 것이다. 사회적 약자의 꿈틀거림에 대한 강자의 폭력은 강력했다. 여성혐오에는 익숙한 이 남성들에게 남성혐오는 낯설었고, 이 낯섦은 죽이겠다는 협박 내지는 살인 예고를 의심할만한 강력한 폭력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처벌은 벌금 오만 원으로 미약했다.
최근에 부러진 각목을 학생 목에 겨누고 찔러죽이기에 딱 좋다고 위협한 외고 교사를 검찰이 불기소처분한 사건이 있었다. 불기소 이유가 사회상규상 위배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학생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다음날 교사는 경찰에 신고했다는 이유로 다시 대걸레로 학생들을 폭행했고 학생들이 문제가 있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교사의 학생에 대한 폭력은 교사와 학생이라는 권력 관계와 성인과 아동이라는 위력 차이를 염두에 둔다면 더욱 엄격하고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집행하는 검찰은 이 정도의 폭력은 사회상규라고 해석했다. 교사의 체벌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않는 것 또한 익숙함 때문이다. 검찰은 익숙함을 이유로 학생의 교사에 대한 폭력과 교사의 학생에 대한 폭력을 다르게 해석하였다. 이것은 차별이고 피해 학생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다. 익숙함과 낯섦은 동시에 이렇게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음 사진은 서울 대학로에 있는 일반 음식점의 화장실 입구에 걸린 그림이다. 왜 하필 여성의 사진만 있을까? 누구의 시선인가? 만약 남성의 사진이라면 어떨까? 그림을 보는 사람의 성을 불문하고 대개는 여성을 그린 그림이 더 익숙하다. 여성이 여성의 어떤 모습을 보는 것이 남성이 남성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익숙해져 있다. 나의 성에 상관없이 이미 사회적으로 우위를 점한 남성의 시선에 익숙해져 있는 까닭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에 비해 남성을 우위에 둔 남성 중심의 사유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여성이냐 남성이냐, 여성과 남성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또 다른 성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성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남성 중심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 호주제를 찬성하는 여성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차별은 성의 차이뿐 아니라, 가족 형태, 경제적 상황,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지향, 나이 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차별의 우위에 있든 하위에 있든 상관없이 차별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차별은 때로 혹은 자주 배타와 혐오로 이어진다.
다시 첫 번째 그림에서 우리는 다른 상상을 해보기도 하자. 치마를 입은 말이 책상에 앉아 있고 양복을 입은 고양이가 서류와 커피잔을 들고 들어가는 장면을 말이다. 이때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거나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일반적이지 않다거나 자연스럽지 않다고 한다면 비로소 자신의 생각의 틀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출근하는 아빠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아빠를 배웅하는 엄마가 자연스럽다면 이것 또한 자신의 시각이다. 맞벌이가 많은 요즘 세상에 아직도 여성의 역할을 집안일 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며 흥분한다면 이것이 자기 생각의 틀이다. 혼자 구름빵을 먹고 교통지옥에서 쏙 빠져나오는 아빠가 아무렇지 않은 것도 눈을 동그랗게 모으고 구름빵을 바라보는 주변 동물들에게 마음이 가는 것도 모두 자신의 경험과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시선이다.
같은 사건을 겪고도 사람들은 각자 생각의 틀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 마찬가지로 작가 또한 책에서 자기 생각의 틀로 이야기한다. 책을 읽는 독자에게는 책이야기가 하나의 경험이고 이 경험은 책을 읽은 사람의 생각의 틀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책이야기를 질문 없이 받아들이는 독자라면 책은 훨씬 더 영향을 미친다. 또한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책을 읽는 어린이 독자에게도 그 영향은 크다. 때문에 작가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어린이책을 어떤 시각으로 썼는지가 무척 중요하다.
오랫동안 여성에게 요구하는 역할과 남성에게 요구하는 역할이 달랐다. 우리 사회가 출근하는 아빠와 배웅하는 엄마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이에 기업은 일자리 감축이 필요할 때 기혼 여성을 우선해서 내보냈다. 또 아이들은 집에 엄마가 없는 것에 대해서 아쉬워한다.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집에서 아이들과 빵을 구워 먹는 엄마를 그린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은 자신의 엄마들도 직장을 다니지 않고 집에 함께 있기를 바라고 맛있는 구름빵을 굽기를 꿈꾼다. 책을 읽고 좋아 보이는 것에 대해 바라고 꿈꾸는 것이야 당연하다. 그런데 부부가 함께 일하는 가족보다 일하는 아빠와 집에 있는 엄마를 보여주는 그림책이 많기 때문에 일하는 여성들이 어려움을 토로한다. 여성들은 아이를 배웅하고 마중하지 않으면 엄마의 역할을 다 못하는 것 같은 강박을 가지고, 아이들도 집에서 가족을 배웅하고 맞이하며 요리를 하고 음식을 차리는 것이 여자의 역할이라고 학습하게 된다. 백희나의 그림책은 다양한 가족 형태는 잘 보여주고 있지만 돌봄을 여성의 역할로만 보고 있는 경향이 있다. 『구름빵』2004 『장수탕 선녀님』2012 『이상한 엄마』2016 『어제저녁』2011에서 아이를 돌보는 것은 모두 여성이다. 2017년에 나온 『알사탕』에서 비로소 돌봄과 관련하여 잔소리하는 아빠가 등장한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0~29세 여성의 63.8%가 경제활동에 참가하다가 30~39세 여성의 경제활동이 58%로 하락하고, 40세부터의 여성의 경제활동은 66.7%로 증가한다고 한다. 일하는 여성의 비율이 훌쩍 절반을 넘는데도 불구하고 어린이책에서는 집안일을 하는 엄마와 출퇴근을 하는 아빠의 모습을 일상적으로 묘사하고, 돌봄을 여성의 몫으로 인식하게 한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낮았던 오래전에 출판된 책이 많은 점을 고려하면, 이런 사회적인 경향을 어린이책 작가는 더 적극 반영하여야 한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경험을 뛰어넘어 현재와 미래를 반영하여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 물론 책의 경험을 우선하는 것이 직접 경험이다. 집안에서 부모가 어떻게 사느냐가 책의 경험을 앞선다. 그런데 부모의 개인적인 삶의 경험을 뛰어넘어 아이들은 자란다. 남존여비의 문화를 가진 부모에게서도 남녀를 똑같이 존중하는 아이가 자랄 수 있는 힘은 아이가 부모 외에도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사회적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책은 학교와 더불어 아이에게 강력한 사회적 경험을 제공한다. 아이들은 부모를 뛰어넘는 다양한 시각을 책에서 만난다. 그러므로 책은 미래의 가치, 즉 꿈꾸게 하는 가치를 담아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 이것이 바로 독자가 작가들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2004년에 출판된 『구름빵』은 모르는 어린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림책으로는 드물게 ‘지원이와 병관이’ 이야기는 9편까지 출판될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이 둘 모두 엄마가 전업주부이고 아들과 딸이 있는 4인 가족의 이야기이다.
위의 장면에서 “여기 빈자리는 누구 자리일까요?”라고 물었을 때 대부분 망설임 없이 엄마라고 답했다. 다른 누군가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우리에게는 엄마, 아빠, 아이의 가족 형태가 익숙하다. 이는 셋 중 하나만 없어도 비정상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결혼한 부부가 아이가 없을 경우 왜 아이가 없냐고 묻고, 엄마 혹은 아빠가 없는 경우에도 특별하게 여긴다. 엄마가 없는 걸 동정하거나 다른 누군가가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흔히들 여성인 할머니를 상상하거나 새엄마를 상상하거나 아빠 혼자서 힘들어하면서 쩔쩔매는 모습을 상상한다. 엄마가 없어서 더 불행하지 않다. 할아버지가 없거나 이모나 삼촌이 없다고 더 불행한 건 아닌 것처럼. 여자인 엄마의 역할을 정해버림으로 인해 엄마의 부재는 엄마가 아닌 다른 것으로는 채우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아빠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없는 한부모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곧 이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다. 부재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애초부터 없을 수도 있으나 부재를 결핍으로 간주한다. 부재가 곧 결핍은 아닌데도 말이다.
배빗 콜의 『따로따로 행복하게』보림, 1999라는 이혼을 소재로 한 그림책을 읽고 청소년들과 토론을 하였는데 “이혼이 좋은 건 아니잖아”와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이 편견이다”라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나쁘다는 극단뿐 아니라 좋은 건 아니라는 생각도 편견이라는 다툼은 생각을 좀 더 섬세하게 해보는 기회였다. 두부모와 함께 살아도 결핍은 많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이라면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부재하는 것이 낫다. 한쪽이 없으니 당연히 뭔가는 부족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결핍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피는 걸 놓치는 것도 안타깝다. 부부를 성 역할로 나누는 것은 동성부부의 존재를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국어사전에서 어머니를 “1)나를 낳아준 사람 2)아버지의 아내”라고 정의할 정도로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졌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를 보면 1인 가구가 27.2%이고 4인 가족은 18.8%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4인 가족을 정상이라는 생각하고 1인 가족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것에서 차별이 시작된다. 어떤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할 때 그 외의 것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린이책에서 다양하게 보여주고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지 않고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하는 건 좋은 것이 아니다, 혹은 ○○하지 않는 건 좋은 게 아니라는 시각에도 차별이 있다는 섬세함으로 접근하는 시각도 필요하다.
★ 이 글은 2017년 9월 2일 개최된 〈어린이문학과 여성주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발제문으로, 어린이책시민연대와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