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지금의 동화는 어떨까? 성별 이분법과 그것을 바탕으로 형성된 성적 위계를 뒤트는 새로운 동화를 향한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특히 유럽과 북미의 경우 퀴어 가족을 묘사하는 등, ‘정상 가족’이라는 관념에 질문하고 다양한 가족 형태와 다양한 젠더 형태를 상상하도록 하는 동화의 실험은 이미 시작되었다. 국내에서도 이런 세계적인 흐름을 바탕으로 천천히 변화가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페미니스트 출판사인 ‘봄알람’에서도 페미니스트 동화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고, 세계를 이끈 여성 위인을 소개하는 동화가 번역 작업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가족 형태에 대한 관념과 성역할을 ‘자연’으로 재현하는 것을 반복하는 동화의 인기는 여전하다. 뿐만 아니라 미디어 융합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동화는 애니메이션화를 넘어 영화, 드라마, 시리즈 애니메이션, 뮤지컬, 게임, 각종 굿즈goods 및 장난감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런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의 원전으로서, 동화는 그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작품인 『마당을 나온 암탉』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동화 시장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면서 크게 주목을 끌었던 작품이며, 애니메이션의 경우 편향된 젠더 재현으로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서 논의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여성은 어떻게 재현되고 남성은 어떻게 재현되었다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만들어 내는 젠더 구성의 효과다. 『마당을 나온 암탉』 원작 역시 암탉인 잎싹의 도전과 성장을 ‘알 품기’로 연결시킴으로써 여성-모성이라는 젠더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있다고 비판해볼 만한 지점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원작보다 훨씬 더 퇴행적인 재현을 선보인다.
동화의 경우 ‘알을 품는다’는 행위가 잎싹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 맥락을 두텁게 쌓아가면서 묘사해간다. 잎싹은 오랫동안 달걀을 낳는 닭이었고 종내에는 자기가 낳은 알 한 번 품어보지 못하고 폐계로 버림받은 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을 품는다”는 것은 ‘여성이자 어미로서의 본능’이기 전에 잎싹에게는 자유의 상징이며, 자신의 몸에 대한 자율성과 지배력을 회복하는 행위에 가깝다. 잎싹과 나그네의 관계 역시 ‘이성애적인 관계’라기보다는 동지애에 기반하고 있는 면이 크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에서는 이런 두터운 맥락이 삭제된다. 잎싹에게 본능으로서의 모성을 부여하고, 나그네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이성애적 동경’으로 단순화시켜 버린다. 잎싹이 초록머리에 온갖 애정을 들이는 이유가 순전히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사는 것’으로 치환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애니메이션은 여성-모성, 남성-모험-성장의 서사에 고착된다.
애니메이션 판에서 이런 성차별적 관점이 더욱 강화되는 것은 초록머리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원작에서는 초록머리가 청둥오리 무리에 섞여 들어가서 종내에는 파수꾼이 돼 그들을 따라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자세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저 처음에는 적응을 잘 못 했던 아웃사이더로서의 초록머리가 묘사되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무리에 섞일 수 있는 사회화가 일어나는 듯하지만, 그 과정을 길게 나열하지는 않는다. 원작은 잎싹에게 온전히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에 초록머리에게 감정이입의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다. 독자는 잎싹에게 동일시할 뿐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다르다. 여기에서는 초록머리가 청둥오리의 ‘길잡이’가 되는 과정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찍는다. 우선 초록머리의 아버지인 나그네가 청둥오리의 ‘길잡이’였다는 설정이 들어가면서 ‘부계 혈통주의’가 강조된다. 아버지처럼 ‘훌륭’하게 자란 초록머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길잡이’를 뽑는 레이스에 참가하게 된다. 이 레이스 시퀀스가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원작 『마당을 나온 암탉』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시퀀스이며, 또 호평을 받았던 시퀀스임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아버지의 뒤를 잇는 아들의 탄생. 이는 기존의 상업영화들에서 주가 되는 ‘아들의 성장 서사’ 즉 오이디푸스 궤적의 반복적 재생이다. 그리고 이 레이스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남자 청둥오리들만 참여하고, 이들은 박력 있게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그랬을 때 ‘여자 청둥오리’들은 땅에서 그들의 레이스를 구경하며 ‘그루피’들처럼 “멋있다!”를 외치며 동경의 눈빛을 빛낼 뿐이다.
여기서 동일시의 폭력이 드러난다. 대체로 ‘어머니’일 보호자의 손을 잡고 극장을 찾은 ‘여아’들은 누구와 동일시할 것인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사랑하는 남자의 알을 품고, 그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서 그 남자의 뒤를 잇게 만드는 잎싹에게 동일시할 것인가. 아니면 바닥에서 근사한 남자들을 쳐다보며 비명이나 지르고 있는 여자 청둥오리들에게 동일시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상상되는 젠더를 위반’하면서 초록머리에게 동일시할 것인가?
물론 모든 관객이 자신의 젠더에 맞게 동일시를 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정답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를 질문해 볼 수 있다. 왜 여자 관객들은 대부분의 텍스트에서 젠더의 경계를 넘어서는 위반을 통해 남자로 설정되어 있는 영웅과 그의 성장에 동일시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런 남성 영웅의 존재를 자연이자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기존의 페미니스트 연구는 여자 관객들은 남자 관객들에 비해서 더 능수능란하게 젠더를 넘어서 동일시를 해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것은 명백하게 여성 관객, 혹은 여성 독자들의 주변적인 위치 때문이다. 남성 관객이 이런 유연한 동일시에 능하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들은 젠더를 넘어 동일시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들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남자이므로.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 텍스트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머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을 경유해서 이야기해 보자.
1970년대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이 영화라는 매체를 “남성의 시각적 쾌락에 복무하면서 여성을 시선의 대상으로만 재구성하는 가부장제적 영화-장치”라고 비판하자, 이에 반발하는 이론적 목소리 역시 페미니즘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모든 여성 관객은 동질적이지 않다는 것이 그 비판의 첫 번째 이유였다. 하나의 텍스트가 모든 여성들에게 똑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똑같은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객은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인종, 계급, 개인적 경험에 따라서 텍스트를 다르게 경험한다. 영화-장치에 대한 두 번째 비판은 여성 관객은 좀 더 적극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영화 텍스트를 본다고 해서 모두가 “그래 나는 현모양처가 되겠어.”라고 다짐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모성 이데올로기가 강조되는 장면에서 그 이데올로기가 소외시키는 것 혹은 생산하는 폭력에 주목할 수도 있다. 즉, 텍스트는 그 자체로 무소불위의 완성체가 아니다. 텍스트는 관객과 만나는 순간 새롭게 시작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텍스트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을 접하면서 관객들은 사유의 공간을 직조할 수 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보고 너무나도 감동한 소녀가 잎싹과 같은 어머니가 되는 것만이 자신의 꿈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 재현의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서 다른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
이런 문제의식 안에서 테레사 드 로레티스Teresa de Lauretis라는 페미니스트 영화이론가는 ‘젠더 테크놀로지’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젠더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되는 것일뿐만 아니라, 다양한 담론과 지식의 배치 안에서 해체되기도 하고 재구성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페미니즘 이론이라던가 페미니스트 비평, 페미니스트로서 영화 읽기 등의 다양한 행위들이 젠더가 구성되는 공간으로서의 문화에 개입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는 주류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구성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다시 쓸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드 로레티스는 젠더를 테크놀로지푸코로 설명함으로써, 주체의 저항과 개입이 가능해지는 순간을 묘사한다.
동화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읽는다’라는 비판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어떻게 가능하게 하느냐일 터다. 그리고 이런 비판적 읽기는 더 다양하고 많은 말, 더 진보적인 담론을 만들어 냄으로써 동화 생산 행위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것이 동화를 ‘해방’시키는 길이 될 수 있다. 드 로레티스는 이런 가능성의 공간을 ‘스페이스 오프’space off라고 말한다.
스페이스 오프란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스크린 밖에 있는 공간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예컨대 주인공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상태로 저 어딘가 멀리를 쳐다볼 때, 스크린에는 주인공의 얼굴만 보이지만 우리는 그 스크린 밖에 있는 무언가, 산이라던가 바다라던가 혹은 멀리에서 다가오고 있는 태풍과 같은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드 로레티스는 이 비유를 통해서 남성 중심의 여성 재현은 프레임의 공간 안에 있는 반면,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은 프레임 바깥에 있음을 드러낸다. 드 로레티스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실존으로서의 소문자 여성woman과 표상으로서, 즉 가부장제가 재현해내는 이미지로서의 대문자 여성Woman을 구분하는 것이다. 드 로레티스는 스페이스 오프의 공간을 제안하면서 이 실존의 여성들에 대한 말을 더 많이 만들어 낼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강조한다.11 페미니즘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다른 곳’, 현재 문화 담론의 다른 곳, 즉 표상 공간의 스페이스 오프 혹은 사각지대에서 무엇이 보이는지를 정의하는 것이라고. 적극적인 비평을 통해 새로운 젠더 표상을 만들어 내는 것. 우리는 동화를 읽어내는 현재의 우리에게, 그리고 그런 우리와 소통해 나갈 미래의 동화에게 이런 스페이스 오프의 가능성을 상상하라고 요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11 Teresa de Lauretis, Technologies of Gender, Indiana University Press, 1987, p.26.
Teresa de Lauretis, Technologies of Gender, Indiana University Press, 1987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김명남 옮김, 창비, 2015.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최재인 옮김, 갈무리, 2014.쇼히니 초두리, 『페미니즘 영화이론』, 노지승 옮김, 앨피, 2012.시몬느 드 보브아르, 『제2의 성』잭 자이프스, 『동화의 정체』,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08.필립 아리에스, 『아동의 탄생』, 문지영 옮김, 새물결, 2003.허윤 외, 『그런 남자는 없다』, 오월의 봄, 2017,황선미 글, 김환영 그림, 『마당을 나온 암탉』, 사계절, 2002.윤승민·심윤지, “유튜버 '갓건배' 논란에 동조한 남자 초등·중학생들”, 『경향신문』, 2017.08.11.
★ 이 글은 2017년 9월 2일 개최된 〈어린이문학과 여성주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발제문으로, 어린이책시민연대와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