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 때 그런 예감이 들었다. 정부가 인공지능에 단기투자할 거라고. 3조5000억원을 붓겠단다. 그러나 그건 돈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주목할 게 있다. 구글은 10년 넘게 10조원 훨씬 넘게 투자했다. 일정 정하고 결과 채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수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딥마인드를 큰돈 들여 인수했다. 구글은 이번 대국 이후 기업가치가 58조원 상승했다. 진짜 미래가치를 창출해내려면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게 기초다.
현실은 어떤가? 기초학문에 대한 투자는커녕 멸종되고 있다. 대학에서조차 그렇다. 인문 과정들도 모조리 퇴출 중이다. 그러면 끝이다. 인공지능의 결실은 단순한 공학적 결과가 아니다. 모든 지성이 협업해 집대성한 결과다. 그걸 모른다. 청맹과니가 따로 없다. 씨앗 다 죽여 놓고 숲을 꿈꾸는 꼴이다. 기초가 없으면 아무리 돈 쏟아부어도 헛일이다. 그런 기금 빼먹는 데 이골 난 선수들만 꼬인다. 세금만 날린다. 지난 정부 물고기로봇 코미디처럼.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대학들은 기업의 하청업체로 전락하고 있다. 정부는 돈을 미끼로 쓴다. 대학은 그 돈 받으려 학과 통폐합 등을 통해 기초학문 자체를 붕괴시키고 있다. 이러고 무슨! 소설책 한 권 읽지 않으면서 노벨문학상을 꿈꾼다. 정부는 그저 돈 몇 푼 던져주면 되는 줄 안다. 그렇게 길들여지면서 기초는 망가진다. 기업이라고 다르지 않다. 언론도 감시와 비판이라는 기초를 스스로 버렸다. 추상적이고 허망한 구호들만 난무한다.
위에서 명령하면 아래가 무조건 따르는 사회는 창조도 혁신도 없다. 20세기 속도와 효율의 시대에는 그런 수직적 조직이 통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수평사회로 전환하지 않으면 죽는다. 최근 삼성전자가 구글의 초강경 압박에 백기투항했다고 한다. 모든 소프트웨어 개발을 포기했다고 한다. 구글에 삼성전자는 아주 큰 고객이다. 안드로이드로 엄청난 부를 안겨준다. 함부로 못할 고객이다. 그런데 초강수를 뒀다. 안드로이드를 공급하지 않겠다는 협박일 것이다. 그 안드로이드는 삼성전자 몫이 될 뻔했다. 개발자 앤디 루빈이 삼성전자에 먼저 오퍼했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그걸 차버렸다. 보름 뒤 구글이 5000억 원에 인수했다. 왜 삼성은 거부했을까? 루빈의 회사 직원이 고작 7명이었기 때문이다. 우습게 본 것이다. 최고책임자는 그럴 수도 있다. 똑똑한 중역들은 그 가치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왜 설득하지 못했을까? 보스의 안색을 먼저 본 것이다. 이미 그의 마음이 떠난 걸 읽었기 때문이다. 괜히 입 댔다가 미운털 박히면 수억원짜리 연봉도 직위도 날아간다. 국내 최고의 세계적 기업이라는 삼성의 속살은 그런 수직사회의 구조다. 만약 그때 삼성전자가 안드로이드를 택했다면 엄청난 이익을 창출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건 휴대폰을 팔아 얻는 이익에 비할 바 아니다. 수직적 조직은 수평적 조직을 이기지 못한다. 그게 21세기다. 그게 기초다.
대통령은 선거 때 복지와 대통합을 약속했다. 그것으로 많은 표를 얻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합은커녕 편을 가르는 일에만 몰두한다. 역사책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그리 못할 것이다. 정치는 없고 통치만 있다. 외교, 경제, 교육, 국방 등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드시 찍어낸다. 대통령이 말하는 ‘진실한 사람’ 운운은 진실을 욕되게 하는 말이다. 경제가 위험하니 빨리 법 통과시키라 명령한다. 그런데 3주 뒤에는 경제가 좋다고 한다. 이건 숫제 놀이 수준이다. 신중해야 할 때는 경망스럽고 가벼워야 할 때는 엄중하다. 3조원 넘는 돈 쏟아부으면 뭐든 된다고 여긴다. 기초는 다 무너지고 있는데. 야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정치란 본디 시끄럽다. 다양한 목소리가 다퉈야 한다. 설득하고 겨룬다. 그러면서 힘이 커진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들은 분열한다. 미래를 독재의 손에 넘겨도 자기네 권력만 탐닉한다. 희망이 아니라 실망만 주는 야당에 절망한다.
21세기는 더 이상 속도와 효율의 시대가 아니다. 그건 진작 끝났다. 그걸 모르고 내달리기만 해서 1997년 대위기를 겪었다. 그 후유증이 지금도 계속된다. 그런데도 정신 못 차리고 있다. 21세기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시대다. 그러려면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자유와 관용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감시와 처벌만 강화한다. 독재적 발상은 창조, 혁신, 융합의 가치에 독이다. 그런데도 그런 발상을 지지하고 표를 던진다. 제 목에 밧줄을 거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성세대는 20세기에 태어나 자라고 배우며 살았다. 그래서 여전히 그 시대 사고에 젖었다. 절차와 과정은 무시하고 오직 결과만 요구한다. 그걸로 기껏해야 앞으로 10년 겨우 버티고 끝이다. 벼랑에 서 있다는 절박감이 없다. 21세기에 여전히 20세기식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행동한다. 거기에 무지와 탐욕까지 거든다. 기초는 다 망가뜨리고 당장 곶감만 원한다. 감나무는 심지도 않고. 이러다가 곧 목 놓아 울게 될 날 온다.
다시, 민주주의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기초다.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하고 자유로운 개인을 보장해야 한다. ‘복지와 감세’의 모순을 지적하자 곧 배신과 정체성 운운한다. 눈 밖에 나면 죽는다는 걸 보이고 싶을 뿐이다. 앙심이다. 오만과 독선뿐이다. 홍위병들은 날뛴다. 그게 민주주의를 죽인다. 민주주의와 정의가 무너지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자들을 쫓아내야 한다. 미래는 청년의 몫이다. 청년을 살려내야 한다. 그들이 일어나 부흥하도록 기초부터 다시 다져야 한다. 그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오늘은 성금요일이다. 예수가 죽었다. 죽어야 부활한다. 우리의 낡은 것을 죽여야 한다.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청년이 살고 미래가 산다. 민주주의를 부활시켜야 한다. 더 늦기 전에 모든 기초를 재건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기초 중의 기초는 사람이다. 알파고는 집단지성의 산물이다. 인공지능을 두려워하지만 결국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사람을 살려야 한다. 4·13 총선은 우리의 기초를 되찾는 선택이어야 할 것이다.
★ 본 기고글은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으로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