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출판사가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았습니다. ‘웹진 나비’는 2016년 1월 27일 파주 출판문화도시에 위치한 보림출판사를 방문하여 대표 권종택(71) 씨를 모시고 대담을 나누었습니다. 권종택 대표와 ‘웹진 나비’의 안찬수 주간이 나눈 대담을 정리하여 싣습니다. (편집자주)
안찬수 |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처장
보림출판사가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문학과지성사의 김병익 선생님을 인터뷰한 데 이어 40주년 인터뷰를 연달아 하게 되었는데요. 1976년 흔히 말하는 유신 시대에, 서른한 살 청년의 나이로 어떻게 출판사 창업을 하시기로 한 겁니까?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권종택 | 보림출판사 대표
『농원』이라는 잡지를 창간할 때 보급사원을 모집했어요. ‘학원사’(대표 김익달)에는 1952년 창간한 『학원』이라는 학생 대상 교양잡지가 있었고요. 『농원』은 농촌․농민을 대상으로 1964년 창간한 잡지였는데, 김익달 선생께서 우리나라 농업을 근대화하겠다고 농촌 마을에 군 단위로 지사를 만들고 서울에 보급소를 만들고 대단했었지요. 그때 보급사원으로 들어갔던 것이 출판 쪽에 발을 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6년생이니까 십 대였었죠.
안찬수
‘보림’이라는 게 보배 보寶에 수풀 림林을 쓰는 불교 용어입니다. 장흥 가지산 자락에 보림사가 있고요.
권종택
제 고향이 장흥인데 문인들이 많습니다. 작은 바닷가 동네지만 바로 옆 동네에 이승우 선생이 살고, 돌아가면 김선두 화가, 거기서 한 사 킬로미터 가면 이청준 선생, 조그만 바다 하나 건너가면 한승원, 면面 경계에 송기숙, 시인들도 수두룩 많아요. 백여 명 될 거예요. 출판사 이름을 지으려고 보니 좋은 이름은 이미 다 지었더라고요. 선배 한 분과 하숙집에서 고민하다가, 고향 장흥에는 지금도 ‘보림문화제’를 할 텐데 ‘보림’으로 하는 게 어떠냐고 해서 그렇게 지었어요. 보림문화제의 이름이 보림사에서 따온 것이죠. 저는 절보다는 지역 문화축제의 제목을 가져다 출판사 이름으로 쓴 것이고요.
안찬수
불교에서 ‘보림’이라고 하면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 할 때의 그 ‘보’인데 진수를 의미해요. 그런데 진수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깨동무를 하고 수풀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최근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의 화두가 ‘더불어숲’이라는 것 아닙니까?
권종택
어마어마한 거죠. 초기에는 한자로 ‘寶林’이라고 쓰다 지금은 한글로 쓰고 있는데 한글 디자인도 재미있어요. 비읍, 오, 리을, 이, 미음.
안찬수
판매 쪽에 계시다 창업을 해야겠다고 발심하신 계기가 있습니까?
권종택
그 시절 한국행동과학연구소 안에 독서행동연구실을 운영하던 김병원金炳元 선생이라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험에 의한 독서’를 하는데 미국에는 ‘과학적인 독서’라는 개념이 있다는 거죠. 그런데 그 사례가 상당히 좋더란 말입니다. 어떻게 독서를 과학적으로 할 것인가를 선생과 같이 토론했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나온 책이 『독서와 독서지도』(1976)였어요. 선생의 첫 저술이었고 보림의 첫 책이었죠. 책을 과학적으로 읽는 방법이라는 일종의 독서론을 첫 책으로 낸 건데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 출판사들의 처녀출판이 뭔지 조사해보면 재미있을 거예요. 우연히 내는 경우도 있겠지만 출판 정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안찬수
문학도의 입장에서 말씀 드리면 시인이나 소설가의 첫 작품, 처녀시집, 처녀소설집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첫 책은 좀 나갔습니까?
권종택
나갔겠습니까? (웃음)
안찬수
보급사원이라 하셨지만 출판이라고 하는 문화 영역의 활동과 사업을 ‘학원사’라는 창문을 통해서 들여다보셨던 건데요. 이를테면 2005년 을유년이 됐을 때 한국출판계나 사회적으로 을유문화사 정진숙 대표의 업적을 기렸었고 또 정진숙 대표의 맥은 지금의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이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학원사 김익달 대표의 공은 그 뒤로 많이 다뤄지지 않고 있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권종택
학원사는 『학원』과 『농원』을 비롯해서 『주부생활』 『소년생활』 『진학』 등 잡지 출간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진학사’ ‘소년생활’ ‘신태양사’… 주로 편집장 하던 직원들한테 출판사도 많이 내어줬지요. 학원사에서 주로 편찬하던 게 『세계대백과사전』 『철학대사전』 등 사전류였는데 부도가 나는 바람에 단행본 쪽이 크게 위축되어 지금은 『주부생활』 외에는 명맥이 이어지지 않고 있어요.
안찬수
우리 그림책은 민주화 이후 1980년대 끝자락에 대중화되어,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중반에 절정을 이루었죠. 보림은 1976년에 창업하셨으니 1990년까지만 해도 15년의 세월을 암중모색하셨을 테지요.
권종택
1980년부터 어린이책을 만들었는데 그때는 가가호호 방문판매로 전집을 판매하는 그런 시장이 있었어요. 성인 전집인 세계문학전집이 1959년 을유문화사와 정음사에서 첫 선을 보였고, 이후로 신구문화사, 삼중당문고, 동서문화사, 삼성출판사, 한림출판사 등에서도 나왔지요. 그러다 1980년대 들어서 성인 전집은 활력을 잃고, 아동 전집만 살아남았어요. 계몽사, 금성출판사, 국민서관의 전집이 '3대 어린이책 전집'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일본책을 중역했어요.
안찬수
경제가 성장하면서 아이들 키우는 집에 방문판매하는 아동문학 전집시장이 1970년대부터 있었지요. 그러다가 웅진출판사의 ‘어린이 마을’의 충격이 컸습니다. 1980년대 초반이었는데요.
권종택
덩치 좋고 괜찮은 책은 다 번역서이던 시절에 국내 창작물로 그만한 성과물이 없었습니다. 기획도 획기적이었고, 편집디자인도 혁명적이었죠. 마케팅 능력도 탁월했고요. 한국 그림책역사에 한 획을 그은 서적이었죠. 1980년대 초반에는 전집이 주류였지만 아동문학 작품도 나름대로 나오고 있었어요. 숭의여전 아동문학과 석용원 교수, 박화목, 마해송, 김영일 작가들과 어울려 책을 냈는데 일러스트가 안 되니까 지금껏 살아남은 책이 없습니다. 그때 그림은 도안사가 그렸어요. 그 뒤에는 삽화가가 그렸고, 1990년대 들어서나 일러스트 작가라고 했지요.
안찬수
그 시절 보림출판사가 낸 책 중에 기억할 만한 게 있습니까?
권종택
1980년대 초반에는 ‘별초롱 꿈초롱’과 ‘이야기 하늘나라’라는 두 시리즈가 크게 인기를 끌었습니다. ‘별초롱 꿈초롱’은 색동어머니회와 공동으로 만든 구연동화집인데 카세트와 책 한 세트에 십만 원이었으니 대단히 큰 돈이었죠. ‘이야기 하늘나라’는 어린이 성경 구연동화집이었는데요. 기독교 유치부가 왕성히 늘면서 판매고를 올렸어요. 작품들이 좋았죠. 유치부에서 이야기로 읽을 수 있게 하면서 성경의 뜻이 녹아있게 만드는 과정에서 싸우기도 많이 했어요. 기독교아동문학 쪽에서 쓴 원고는 그게 설교지 문학이 아니었어요. 기독교문인협회에 쓰게 했더니 그건 또 너무 어려웠어요. 기독교도가 아닌 문학인한테 쓰게 했는데, 그건 또 메시지가 없어요. 결국 그걸 많이 다듬어준 게 이현주 목사랑 석용원 교수였어요.
안찬수
1980년대 중반 이후에 보림출판사는 어떤 책을 내고자 모색했습니까?
권종택
그때부터 베이비붐 세대가 아이를 낳기 시작했어요. 대학 공부도 하고 문화적인 경험도 하면서 더 낮은 연령대의 아이들에게도 책을 전해주고자 하는 부모들의 요구가 일어나던 시대였어요. 갓난아이 인구가 많아지면서 ‘유아’라는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계층이 하나 생기고 시장이 커졌어요. 분유 회사와 기저귀 회사가 막 생겨나고 유아산업이 태동하던 시기였는데 어떻게 보면 책이 가장 늦었다고 볼 수 있어요. 사회문화적인 욕구와 유아라는 계층의 형성이 맞물렸기에 편집자와 0~3세를 위한 책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연구했었고, 유일한 어린이도서관이었던 사직동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에서 ‘유아문학이란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세미나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일본에 갔어요. 외국그림책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마루젠’이라는 서점과 ‘크레용하우스’라는 서점에 가봤는데 놀라울 정도로 좋은 그림책들이 있는 거예요. 가슴이 떨렸어요. ‘세상에 이런 책들도 있나?’ ‘우리 그림책은 그림책도 아니었구나’ (웃음) 그런 생각을 하며 연구용으로 외서를 구입했습니다. 연구를 바탕으로 나온 게 세계유아문학대전집 ‘위대한 탄생’(1989)이었어요. 144권이나 되는 책을 내려고 하니 출판사 규모가 작아 다들 망한다고 우려하는 통에 제작처를 일 년간 설득하고 우여곡절 끝에 광고회사와 같이 만들어냈어요.
안찬수
현은자 선생의 『그림책의 이해』라는 책을 보면 『눈사람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나중에 마루벌에서 정식 저작권 계약을 해서 『눈사람 아저씨』라는 책으로 나오는데 그 이전에 보림과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 세 권을 비교해 놓은 대목이 문득 떠오릅니다.
권종택
우리나라가 세계저작권협약UCC에 가입한 게 1987년이었고, 1995년 이전에 번역 출간된 도서의 경우 1999년 12월 31일까지만 유통이 가능해졌어요. 그 사이에 ‘위대한 탄생’에 소개되었으나 정식 계약은 시공주니어나 비룡소와 체결한 책이 많았습니다.
안찬수
보림이 1980년대 시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유아문학이 가능한지 고민하고, 외국의 그림책을 가져와서, 일종의 기획을 하고 광고회사와 마케팅을 하여 그 이름도 ‘위대한 탄생’이라는 책을 출간해낸 건데 1989년 당시의 시점으로 본다면 우리 그림책 분야에 굉장한 선구적인 자극을 제시하셨던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권종택
그림책이 그냥 책과 다른 점이 그 점이잖아요? 다른 문학은 다 읽어봐야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있지만 그림책은 펴자마자 그 그림책이 가진 물성이 가슴에 다가오는 거죠.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그림책의 세계를 보고 그 그림책들이 빠르게 확산되었던 것 같아요. 그 시점부터 우리나라에 엄청난 그림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안찬수
여기서 ‘우리 그림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여쭙고 싶습니다. 1990년대 초중반의 보림출판사를 만들어 온 ‘창작그림책’에 대한 질문이 되겠는데요. 물론 권 대표님은 시장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하는 고민을 더 하셨겠지만 분명 어떤 흐름 속에 있어 보이거든요.
권종택
사업적인 틀에서 ‘위대한 탄생’ 때부터 전집이 아닌 단행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꾸준히 준비하고 있었어요. 월부 판매라는 사업의 주체는 결국 세일즈맨인데 1980년대 우리 경제가 발전하면서 세일즈맨이라는 직업은 점점 어려워진 반면에 유통사업은 급속하게 발달하고 있었고요. 결국 책이라는 매체는 세일즈맨이 아니라 정상 유통채널을 통해서 움직이는 게 맞다는 판단을 내렸었지요. 그렇다면 단행본 시장에 어떤 책을 선보여야 할 것인가?
안찬수
‘위대한 탄생’이 유아 계층과 시장의 성장으로 기존의 시리즈 전집류 판매 시장에 외국의 그림책을 들여온 거라면 ‘솔거나라’는 그 고민의 결이 완전히 다르다고 느꼈는데, 그런 고민이 있었군요. 어떻게 보면 보림이 체질이 전혀 다른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과 같았겠습니다. ‘어떤 책을 내놓을 것인가?’
권종택
그림책을 시작하면서 우리 전통문화를 먼저 다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림책 작가도 없어, 그림책 편집자도 없어, 기반도 안 갖춰진 상황에서 가벼운 창작그림책도 내본 경험도 없는데, 우리 전통문화라는 무거운 주제로 창작그림책을 내려니 참 막막한 거죠. 편집 경험도 전혀 없는 국사학과 나온 친구, 역사학과 나온 친구, 최정선 편집주간으로 대표되는 편집 진영을 갖춰 몇 년 동안 준비를 하는데 다행히 ‘위대한 탄생’이 계속 팔리고 있어 효자 노릇을 했지요. 그렇게 강우현 선생과 ‘연필과 크레용’을, 주강현 선생과 ‘솔거나라’를 냈어요.
안찬수
‘솔거나라’를 내신 성과로 여태까지는 외국의 그림책을 우리가 받아들이던 수준에서 오히려 외국에서도 우리 그림책에 관심을 가지는 초기단계에 이르게 되었죠.
권종택
최정선 주간을 중심으로 『집짓기』도 내고 ‘까치호랑이’ 시리즈도 내고 이런 책들이 성과를 내면서 국외에서 좋은 평가도 얻었는데 결정적으로는 어린이도서연구회의 공이 있었어요. 창작그림책을 내면 신문에서도 꼭 다뤄줬고요. 그때는 그림책을 내면 신문에 안 난 적이 없었지요. 지금은 그림책을 내도 신문에 나는 적이 없지만요. (웃음)
안찬수
해외에 번역․소개되는 그림책으로 보자면 보림이 우뚝한 면이 있잖습니까? 우리 전통문화를 담은 창작그림책으로는 보림을 따라갈 수가 없으니까요.
권종택
계약하고 있는 것까지 포함하면 70종이 소개되고 있어요. 『엄마를 잠깐 잃어버렸어요』 같은 경우 한 책이 18개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요.
안찬수
몇 년 전 태국에서 아세안ASEAN 국가의 독서진흥 관련 회의가 있어 간 적이 있는데 한․중․일 중에 우리만 불렀더라고요. 왜 한국만 불렀는가 물었더니 일본은 과거에 아세안 국가에 식민지를 경영했던 나라가 많은 거예요. 중국은 계속 경제적·문화적 남하정책을 취하고 있고요. 한국은 부담이 없대요. 일본이나 중국과도 다르고, 민주화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도 놀라운 성취를 이룩하였고, 고유한 문화가 있고요. 한국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았어요. 도서관에 가봤는데 태국어로 번역된 우리 책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한편, 태국의 이야기, 필리핀의 이야기 등 아세안 국가의 이야기에 대한 공감대가 우리 아이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권종택
‘땅.별.그림.책’ 시리즈로 베트남의 『쩌우 까우 이야기』, 인도의 『라몰의 땅』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유럽과 미국의 문화에 익숙한 우리 독자들이 같은 아시아권의 문화임에도 생소해 합니다. 열네 번째로 네팔의 작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리즈가 마감될 거예요.
안찬수
2000년대 와서는 제가 활동하고 있는 ‘책읽는사회’의 ‘북스타트Bookstart’에도 권 대표님이 지속적으로 발언하시며 뒷받침을 해주셨어요. 2003년에 북스타트가 정식으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유아 이전의 영아책 단계가 열리게 됐지요.
권종택
영아책도 일찍 시작했는데 잘못하면 학습지 같이 되고 만들기 어려워서 많이는 내지 못했어요. 1990년 이후로 다른 출판사에서는 번역서를 많이 낸 반면, 저는 창작그림책에 목을 맸고 그러면서 사세의 격차가 확 벌어지게 됐어요. 번역서는 몇 달이면 나오는데 창작그림책은 몇 년에 한 권씩 나오니까요. 인세에도 차이가 있고요. 왜 그렇게 창작그림책에 매달렸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안찬수
그림책을 내는 다른 출판사도 있지만 ‘보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요. 시대변화와 사회변화, 그리고 출판의 변화라는 흐름 속에서 나름대로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해오셨거든요. 처음에 『농원』과 출판에 연을 맺고 출판사를 창업·경영하시는 과정에서 권 대표님 나름의 소명을 개척해나가시는 걸로 보이는데, 출판사의 규모나 매출로 봤을 때 굉장한 어려움을 감수하신 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통문화 창작그림책을 했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여쭈어야겠는데, ‘왜 그렇게 창작그림책에 매달렸나?’ 이게 오늘 제가 드릴 질문의 핵심일 듯합니다.
권종택
미쳤지, 왜 그랬나 몰라요. 바보 같았으니까 그랬겠죠. (웃음) ‘위대한 탄생’을 내게 된 것도 결국 영유아 연령에 맞는 그림책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파고들고 파고들다 정말 좋은 책을 발견하게 되어 출간한 것이었고요. 단행본을 시작하면서 어떤 책을 내놓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는데 그 답이 ‘우리의 것’이었던 거죠.
안찬수
북스타트 활동도 그렇거든요. 북스타트란 좋은 그림책을 북스타트 책꾸러미에 넣어 아가와 부모, 양육자에게 전해 주는 활동인데 북스타트 재팬Bookstart Japan만 해도 자기네 그림책만 전해준다는 기준을 안 가지고 있어요. 우리나라 북스타트 초기에는 유아용 그림책이 없었기 때문에 ‘책읽는사회’에서 2003년에서 2004년에 출판사에 이런 책을 내주십사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영아쪽 책은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내부 논의가 많았지만 ‘우리 작가의 창작그림책을 전하자’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외국의 좋은 그림책은 이런 책이 있다고 소개하는 정도고, 책꾸러미 안에는 우리 창작그림책을 넣어주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북스타트의 이런 생각과 보림출판사의 그동안의 지향이 잇닿아 있어요. 왜 창작그림책에 매달렸을까? 그게 보림이 있는 이유고 권 대표님이 있는 이유겠죠.
권종택
결국 그림책의 출발이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영아에 대한 교육적 이론에서 출발하려니까 어려운 것이 아닌가?
안찬수
스웨덴이던가요? 핀란드이던가요? 태어나는 아가들에게 베이비박스Baby Box란 걸 선물로 주는데 북스타트처럼 거기에 그림책 두 권이 들어가요. 한 권은 우리로 치면 신화 같은 거죠, 자기네 민족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고요. 또 한 권은 남녀평등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요. 영아용 책에 녹여서 다음 세대에 전하고자 하는 그들의 가치 기준이 자기정체성과 남녀평등의 문제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런 게 없는 거예요. 전래이야기를 조금, 그리고 나이대에 맞는 인지발달에 관한 것을 조금, 이런 식이죠. 30년 뒤에 우리 사회를 이끌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에게 그림책이라는 매개체로 무슨 메시지를 전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30년 뒤에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권종택
기획어린이책이 아닌 작가어린이책이 필요하다고 봐요. 보통 출판사에서 성장발달과 연관 지은 그림책을 기획하면 작가들이 그때부터 주문에 맞춰 만들기 시작하는데 어느 수준을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어내기 어렵습니다. 작가들 고유한 감수성과 예술성으로 자기 안에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고 몸 안에서 우려내어 만든 순수창작물이어야 한다고 보거든요. 창작의 세계는 작가가 만들고 평가는 다른 사람이 하는 건데 모두가 어려워해요.
안찬수
지난 10여 년 동안 북스타트를 계기로 우리 그림책이 한 단계 발전했느냐 질문한다면 답변하기 만만찮습니다. 오히려 초기에 각 출판사들에 요청해서 나온 책들이 고전적인 가치를 아직도 인정받고 있으니 극복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권종택
이것저것 따져 좋은 책들이 얼마나 있나 골라보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림책의 문학성과 예술성도 지금부터 새롭게 논의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안찬수
출판사나 작가만의 문제로 국한하지 말고 이 땅에 태어나는 아이들한테 어떤 가치, 혹은 어떤 감동, 정서를 주어야 할 것인가 더욱 고민이 깊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찾아뵙고 말씀 듣고자 온 건 ‘컬렉션’ 시리즈 때문인데요. 2010년 말부터 총 스물여섯 권이 출간된 이 시리즈는 ‘그림책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림책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오랜 상이 존재해왔다면 ‘아니다. 그림책이란 이런 것일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듯해요.
권종택
우리 그림책의 역사가 굉장히 짧잖아요. 그림책에는 아이들 책으로만 한정되지 않는 무한의 가치가 있는데 그동안은 그림책이 어린이책의 경계 너머를 생각할 필요도 없고 여유도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가 그림책 강국이 되었어요. 전세계의 좋은 그림책도 다 들어와 있어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그림책이 어려워요. 그림책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돌아볼 시기라고 생각했습니다. 2010년에 1차로 예술성이 있는 평면 그림책을 내기 시작했고 점점 더 높은 작품성을 담은 책들을 내기 시작하여 『나비 부인』 『레베카의 작은 극장』 등 6년간 26종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안찬수
‘위대한 탄생’이 1980년대 우리 그림책 문화에 영향을 미친 부분이 분명히 있고, ‘솔거나라’ ‘까치호랑이’ 등 전통문화 창작그림책이 1990년대 우리 그림책 문화에 영향을 미친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궤적 속에서 한 세대가 지나 2010년대 들어 그림책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림책에는 고유한 물성이 있어요. ‘컬렉션’ 시리즈는 그림책이라는 형식이 갖는 예술적 가치가 무엇인지, 디지털 시대에 그림책이라는 매체가 갖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굉장한 도전이라고 느껴집니다. 우리 그림책 문화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권종택
지금까지 그림책이 가진 학습의 기능만이 너무 부각되어 왔어요. 그런데 그림책이 정말 학습의 매체에 불과한가요? 저는 그림책이야말로 진정 아이들의 내면을 성장시킬 수 있는 무엇이라고 믿고 있어요.
안찬수
책이 가진 인간적 향취보다는 높은 교육열에 끼인 학습의 매체로서만 인식되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이를테면 말입니다. 기적의도서관의 잘 만들어진 공간에 그림이 하나 걸려 있다고 해봐요. 아주 높은 수준의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어요. 어린이들은 처음에는 무의식적으로 그 앞을 왔다 갔다 하겠지만 그 그림은 결국 어떤 영향을 끼칠 터입니다. 우리가 문화예술의 수준을 이야기하는 건 그것이 가진 자장이 우리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에요. 그러한 가치 있는 예술작품으로서의 그림책이라, 굉장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게 도대체 시장성이 있는 건가요? 이 책(『나무들의 밤』을 들고)은 41,000원이에요.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 좋다더라’ 하여 책을 구입하는 일반적인 부모들은 도저히 선택할 가능성이 없어요.
권종택
‘위대한 탄생’을 만들 때의 그 떨림으로 혼자 흥분해서 시작했는데 내부에서도 초기에는 이해를 못했어요. 어쨌거나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오면서 제가 하는 생각은 출판시장 요구에 맞춰서 팔릴 만한 걸 만드는 것보다는 출판기획자라면 적어도 새로운 것을 해야 하지 않겠나, 속 떨리는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세상하고 맞설 생각으로 남들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벌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거예요. 시장이 원하는 거 하는 건 너도나도 별 차이 없어요. 흥분도 안 되고, 속도 안 떨리고. 대중은 늘 새로운 것을 열망하지 않나요? 보수화된 건 오히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지요. 저는 지금 자신을 갖고 하는 거예요. 그런 시장이 열릴 거라고 봐요. 가장 자신을 갖는 건 일러스트가 훌륭하다는 점이에요. 과거에 팝업북이든 레이저컷팅북이든 이런 유의 책들이 없었던 건 아닌데 그림이 재미가 없었잖아요. ‘컬렉션’의 책들은 최고의 예술성을 갖고 있어요. 단순히 새로운 기법으로 만든 게 아니라 테크놀로지와 수공예가 결합되어 있는데 그림책의 예술성을 담보하고 있어요. 저는 오랫동안 ‘좋은 그림책은 팔린다’는 신념을 가져왔어요.
안찬수
26권의 컬렉션 중에 우리 작가의 작품도 있습니까?
권종택
2011년 국제아동도서원화전BIB 그랑프리상을 수상한 조은영 작가의 『달려 토토』와 황금사과상을 수상한 유주연 작가의 『어느 날』이 ‘컬렉션 Ⅰ’의 첫 두 권이었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 그때부터 ‘컬렉션’이라는 시리즈를 만들었고요. 평면 그림책 열 권이 나온 뒤에는 더 질 높은 그림책을 찾으려고 애썼어요. 더, 더 좋은 것 없냐? 내 속 떨리는 거 없냐? (웃음)
안찬수
기적의도서관 설계하신 정기용 선생과 선후배 관계이기도 한, 학전의 김민기 대표께서 불쑥 찾아오신 일이 있었어요. 기적의도서관에 좋은 어린이극을 올려서 아이들이 누리게 해보자는 기획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그걸 작년부터 실행에 옮긴 거죠. 아이들 느낌에 뭔지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무대, 그런 무대는 시장성이 없어서 대학로에도 드물거든요. 올해 순회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1970~80년대 탄광촌에서 사고로 갱도가 무너지고 다리를 못 쓰게 된 아빠와 그 시절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시선이 녹아 있는 굉장히 수준 높은 노래극이에요. 한 번도 극장에 가본 적 없는 어느 지방 도시의 아이들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까 말씀드린 도서관의 그림 이야기예요. 높은 수준의 그림이 주는 감흥이 있어요. 그런데 너무 높이 있으면 아이들이 안 보고 지나가지 않을까, 그런 우려도 있어요.
권종택
보림인형극장에서도 인형극을 하고 있는데 어른들이 봐서 재미없는 작품은 절대 무대에 올리지 말라고 해요. 좋은 작품이 없으면 공연을 쉬고요. 예술이라는 게 보고 감상하고 즐기는 건데 어른들이 볼 때 재미있어야 해요. 그래야 아이들이 보면 더 재미있거든요. 그림책도 작품에 퀄리티가 있으면 됐지 수준의 높낮이는 중요한 건 아니라는 거죠. 켕기는 게 있다면 비싸다는 건데 고급문화도 가끔 즐기기도 해야 하는 건데……. 어떤 면에서 충격이 없으면 예술이 아니라고 봐요. 고만고만한 건 이벤트일 뿐이고 충격이 있어야 그때 뒤집어지고 성장하는 거죠.
안찬수
아이들 문화가 너무나 척박하거든요.
권종택
그림책은 아이들이 예술적 감성을 가지고 노는 놀이터예요. 아이들 교육에 대해 제가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건 어릴 때 예술적인 감성에 자주 노출되라는 거죠. 문학일 수도 있고, 음악일 수도 있고, 공연일 수도 있어요. 그런 경험을 어릴 때 갖는다는 건 행복한 거예요. 우리가 그 이상을 해줄 수 있을까요? 직원들은 ‘왜 출판사에서 공연을 열고 있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림책을 만드는 거나 공연을 여는 거나 저한테는 똑같은 거예요. 아이들이 평생을 살며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겪겠지만 그걸 극복하고 살아가는 데는 어릴 때의 감성들이 가슴 속에 얼마나 남아있는가가 중요해요. 그래서 책을 보면서도 의미와 교훈을 찾을 게 아니라 그냥 감동을 하면 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안찬수
장흥에 있는 보림사의 그 ‘보배의 숲’이라는 이름을 담은 보림출판사, 그 40주년 기념 인터뷰 비슷하게 되어버렸는데요. 앞으로도 출판 일을 계속 하시겠지만 출판인생 40년인데 이런 건 기억되고 남겨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것 있습니까?
권종택
특별히 욕심은 없어요. 지금까지 만든 책이 전집까지 하면 1,000종쯤 되겠죠. 그래도 제가 만든 책은 좀 쓸 만한 책이 많이 있었다고 생각해주신다면 바랄 게 없겠습니다.
안찬수
권 대표님은 한국 현대 출판의 역사를 관통해오신 산증인이시고요. 물줄기 하나를 계속 끌고 오시며 그림책 분야에서 독보적인 작업을 해오셨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권종택
그림책을 보고 자라난 아이들이 어느덧 20, 30대 젊은 엄마들이 되었어요. 그네들한테도 새로운 그림책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 그림책에는 역사도 있고, 세계에서의 위상도 있고, 그림책 연구자도 있고, 뭘로 보나 그림책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야 할 단계에 와 있어요. 그 가치 안에는 예술성도 물론 포함되고요. 밖에서는 좋은 성과를 낸 우리 작가들 대접도 해주시고, 제도적․정책적인 변화를 위한 그림책 운동도 함께 만들어간다면 우리 그림책 문화의 앞날은 밝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