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동아리를 위한 책 읽기 11
분야별 추천 도서_ 문학
소설을 읽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부럽기도 하네요. 지금은 12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 아침이고, 어제는 눈이 내렸습니다. 이불 속에 파묻혀 따뜻한 차 한 잔 옆에 두고 소설이나 읽기에 딱 좋은 시간이지요. 저는 외풍이 드는 작은 방에서 곱은 손을 불어 가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딱히 불평을 하자는 건 아니에요. 그저 저 역시 소설을 읽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선생님도 시방 소설을 읽고 계시진 않겠군요. 오른손에는 소설을, 왼손에는 이 글을 들고 번갈아 보고 계신 게 아니라면 말이죠. 그렇다면 먼저, 이런 글은 덮어 버리고 읽던 소설을 마저 읽으시는 게 좋겠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그게 훨씬 더 재미있고 좋은 일이니까요. 이것이 오늘 제 글의 결론입니다. 전형적인 두괄식이지요.
자, 이제 사족으로 들어갈까요?
아직까지 이 글을 덮지 않은 분들을 위해, 세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와 ‘어떻게’와 ‘무엇을’로 구성된 질문 3종 세트에 대한 답. 그럼 첫 번째 질문입니다.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
대답에 앞서 제가 먼저 물어야겠습니다. “왜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왜 사랑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또 어떻고요? 소설을 읽는 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나 사랑을 하는 것만큼이나 중대한 문제라는 말은 아닙니다(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기도 한 모양입니다만 우리는, 적어도 저는 아닙니다. 어찌나 다행스러운지!). 쉽게 대답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왜’로 시작하는 많은 질문의 공통점입니다. 너무나 많은 대답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그만큼 많은 대답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저마다의 대답을 가슴에 안은 채 묵묵히 삶을 살아가고, 사랑을 하고, 소설을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에게는 분명하고 또 절박한 이유라도 남에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삶을 살거나 사랑을 하거나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을 수도 있겠지요. 그것들 또한 하나의 대답입니다. 어떤 대답은 이해할 수 있고, 어떤 대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얽힌 채 살아가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요. 소설은 우리에게 수많은 ‘왜’와 그에 따르는, 때로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다양한 각각의 대답들을 보여 준다, 라고요. 예를 들어 볼까요.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옷은 더럽고 머리는 덥수룩한데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나네요. 들어 보니 전국을 떠돌며 이런저런 일자리를 전전하는, 걸핏하면 근무 시간에 술을 마시고 상사와 주먹다짐을 해서 어디에도 오래 붙어 있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저는 아닙니다). 선생님이라면 이런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은 자리를 피하거나 혀를 차고 말겠지요. 간혹 앞에 앉혀 두고 좋은 말씀을 해 주시는 분이 계시기도 할 겁니다(저라면 그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결국 그에게 선생님의 대답을 (일방적으로) 들려주는 일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그래서는 말이 통하지 않겠죠. 우리가 그를 이해하려 들지 않으니까요. 우리의 이해를 벗어나는 존재에 대한 편견과 오해와 두려움이 우리를 막아서고 있으니까요. 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어떨까요? 마침 저는 그런 인물을 알고 있습니다. 찰스 부코스키의 자전적인 소설 『팩토텀』(문학동네)의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저의 영웅입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술이나 마십니다. 그 두 가지 일을 하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진지하고 용감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말도 안 된다고요? 하지만 『팩토텀』을 읽으면 제 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소설을 읽을 때의 우리는 평소와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일상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보호막을 소설을 읽을 때는 대부분 내려놓습니다. 거리를 두고 안전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어 나가며 거리는 점점 좁혀집니다. 몰입하고 공감하게 되는 거죠. 가끔은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소설의 인물을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그건 단지 소설의 인물에 대한 이해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 앞에 선, 치나스키를 닮은 남자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는 것일 테니까요. 우리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대답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 작고 작은 여지이지만, 여지는 여지입니다. 바로 소설이 주는 여지입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도 이해하지 못했던 우리들 자신에 대한 이해의 여지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일단 표지를 넘깁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번에 한 단어씩 읽습니다. 인상 깊은 구절에 밑줄을 치거나,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하며 계속해서 읽어 나갑니다. 울고 웃고 가슴 조이며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세상에 읽지 못할 소설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독서법을 가르치는 책들이 참 많은데요, 독서법을 모르는데 독서법 책은 어떻게 읽으라는 건지는 둘째 치고라도, 그 책들이 말하는 방법이라는 게 저마다 달라 때로는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느리게 읽어라, 빠르게 읽어라, 한 번에 한 권씩만 읽어라, 열 권을 펼쳐 놓고 돌아가며 읽어라, 아침저녁으로 15분씩만 투자해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고 읽어라……. 아시겠죠. 그 또한 ‘어떻게’란 질문에 대한 저마다의 답일 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맞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읽어 나가며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표지를 넘겨야만 하고요. 이것이야말로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개인 트레이너에게 코칭을 받는다고 해도 운동복을 입고 헬스장에 가는 건 직접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고전이라고 해도 다를 건 없습니다. 다만 세월의 무게가 표지를 짓누르고 있어 넘기기가 더 힘들 뿐이지요. 중요한 건 조바심을 내지 않는 것. 처음 몇 페이지가 재미없어도, 어려워도, 고리타분해도 몇 페이지를 더 넘겨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다 보면 가끔은 재미가 붙을 수도 있고, 가끔은(솔직히 말하면 자주) 토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재미가 붙으면 계속 읽으면 되고, 토가 나오면 덮으면 됩니다. 독서 근육이라는 말을 혹시 들어 보셨나요? 운동을 할 때 근육이 필요한 것처럼, 독서를 할 때에도 (정신의) 근육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운동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수십 킬로그램짜리 바벨을 들 수는 없지요(저는 못 듭니다). 갑자기 어려운 고전을 읽으려 하면 힘든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맞는 무게를 선택해 차차 늘려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무게를 들 수 있는 것처럼, 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책(무거운 바벨)이 나쁜 게 아닙니다. 어려운 책을 읽지 못하는(들지 못하는) 우리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 어려운 책을 쉽게 읽는(무거운 걸 드는) 누군가가 나쁜 것도 물론 아닙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을 뿐이지요.
그렇다고 너무 쉬운 책만 읽는다면 근육은 생기지 않습니다. 마냥 쉽지는 않고 가끔 버거운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을 고르는 게 방법이라면 방법. 예를 들어 보지요.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아이필드)은 현대의 고전이라고 하기에 손색없는 소설이지만 무엇보다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소설이란 이런 거야!”라는 고정관념을 깨 주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알지만 읽은 사람은 드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또한 ‘의외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고전입니다. 물론 완역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읽다 졸리면 베고 잘 수도 있는 두께입니다. 그리고 그밖에 또 어떤 소설이 있냐면…… 그건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겠네요.
“무엇을, 그러니까 무슨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
정말 많은 소설이 있습니다.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어떤 소설을 읽어야 하나, 막막할 수밖에요. 그럴 땐 다른 사람들의 독서 목록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온라인 서점의 독자평이나 광고를 참고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독자평은 들쑥날쑥하게 마련이고, 광고는 믿을 수 없지요. 그런 경우에는 책으로 묶인 서평집이나(음, 갑자기 금정연이라는 사람이 지은 『서서비행』(마티)이라는 책이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요?) ‘소설 읽기’에 대한 책이 도움이 됩니다. 유명한 소설들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소개하는 책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책은 논술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을 위해 양보하고, 대신 미국의 작가 프랜신 프로즈가 쓴 『소설, 어떻게 쓸 것인가』(민음사)를 권합니다. 제목만 보면 소설을 쓰는 사람을 위한 책 같지만, 원제는 ‘작가처럼 읽기’. 유명한 소설들의 구절을 ‘깊이’ 읽음으로써, ‘어떻게’와 ‘무엇을’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책입니다. 일단 그렇게 한 권 두 권 읽어 나가다 보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소설을 읽어야 하나 더는 고민하지 않게 될 거라고 장담합니다. 원래 좋은 소설이란 자연스럽게 다른 좋은 소설을 부르는 법이니까요. 가끔, 책 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그냥 좋아하는 책만 읽으면 안 되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반대로, 아이를 키우느라 아이와 관련된 그림책이나 동화만 보게 된다고 고민하시는 분들도 계시죠. 하지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어떤 책이건 그렇게 읽어 나가다 보면, 결국 다른 책을 찾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니까요. 어느새 아령이 가볍게 느껴진다면, 자연히 더 무거운 아령을 찾게 되는 것처럼요. 어때요, 조금 도움이 되셨나요?
아직도 막막하게만 느껴지신다면 독일의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자서전 『나의 인생』(문학동네) 혹은 미국 작가 데이비드 실즈의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책세상)를 추천합니다. 소설을 읽는 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나 사랑을 하는 것만큼이나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제가 미처 드리지 못했던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저의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저도 소설을 읽어야 할 시간이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