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동아리를 위한 책 읽기 10
분야별 추천 도서_ 문학
고잔동 주민들은 왜 신춘문예에 투고했는가?
2014년 12월 중순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손택수 시인을 만났다.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기 위해 서울시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그리고 빅이슈코리아가 공동으로 제정한 민들레문학상 심의장에서였다. 심의가 끝나고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손 시인이 한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201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예심에 참여했는데, 단원고가 있는 안산 고잔동에서 투고된 작품이 30건이 넘었다는 것이다. 안산시 고잔동은 4.16 세월호 참사 후유증을 혹독하게 앓고 있는 지역이 아니던가. “한 지역에서 이만큼 많은 작품이 나왔다는 건 특이한 일이다. 문학을 통해 자기 치유를 하고 있는 듯하다”고 한 손 시인은 말했다.
4.16 이후 안산시 고잔동 사람들의 마음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일까. 무엇이 그 지역 사람들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추동한 것일까. 가슴에 맺힌 한과 설움 그리고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한 마음을 깊이 헤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단원구 고잔동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 몸과 마음이 아픈 것이다. 어느 시인이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이성복)고 한 마음생태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마음의 풍경을 보여 주었다고 확언할 수 있으리라. 고잔동 사람들은 ‘누구도 남을 돌보지 말라’를 미덕으로 여기는 병든 사회에서 내 안의 안녕하지 못한 마음생태학을 바꾸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한 것이리라. 이때의 치유 의미는 사회적 치유social care의 의미를 동반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법하다.
나 또한 그런 마음으로 내가 사는 동네에서 책 읽기 모임을 3년째 운영해 오고 있다. 최근 책 읽기 모임이 시들해진 면이 없지 않지만, 십여 명 남짓한 구성원 모두 이 모임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동네에서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하며 나누는 네트워크가 갖는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약한 관계weak tie’의 강한 힘을 누구나 실감했기 때문이다. 작고한 건축가 정기용은 어느 책에서 “당신은 ‘대합실’에 사는가?”라고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어쩌면 나와 우리는 자신이 사는 집과 동네를 대합실로 취급하는 것 아닐까. 그런 개인들이 사는 사회는 혼자 살다 혼자 죽는 무연사회를 용인하게 된다. 독서동아리 활동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약한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힘을 갖는다. 나와 우리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우리가 곧장 집으로 가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자산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독서동아리는 사회적 힐링이다
동네에서 운영하는 독서동아리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까. 저마다 처한 환경이 다를 수 있겠지만, 우리 모임에서는 느슨한 연대를 지향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햇수로 4년째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정한 회칙은 단 세 가지였다. 회칙 1조는 “우리 모임은 양천리里책읽기모임으로 한다”였고, 2조와 3조는 각각 “총무는 ○○○이 한다” 그리고 “자기계발 서적은 읽지 않는다”였다. 2조를 바꾸지 않는 한, 총무는 모임의 최연소자인 ○○○이 계속 맡게 된다. 중요한 것은 3조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임 구성원 중에는 자기계발 서적을 집필한 필자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모임에서 자기계발 서적을 읽지 않기로 합의한 것은 사회구조를 성찰하지 못하는 힐링 현상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킬링killing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독서동아리 운영 노하우와 관련해서는 독서공동체 숭례문학당 이야기를 정리한 『이젠, 함께 읽기다』(북바이북)을 강추하고 싶다. 독서동아리 운영의 모든 것을 다 말해 주는 책은 물론 아니다. 인문학과 실용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이 책의 논지에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책 읽기는 목적이 없는 목적의 의미를 갖게 될 때, 진정한 공부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읽기[獨書]에서 벗어나 함께 읽기[共讀]를 강조하는 숭례문학당의 독서운동은 ‘나 홀로 볼링’(로버트 퍼트넘) 현상이 유독 심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유의미한 문화운동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들은 말한다. “지금 골방에서 탈출하라! 학교, 도서관, 직장, 마을, 카페로 나와 책을 이야기하자”라고. 앎을 나누는 공부 공동체는 그런 함께 읽기의 과정에서 탄생하는 것이라는 점을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동아리를 운영할 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특정 분야의 책을 편식하지 않는 것이다. 문학 분야 책을 편식하는 현상 또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문학평론가로서 조심스러운 발언일 수 있겠지만, 지금의 문학 출판 분야에서 출간되는 문학 책들의 경우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자족적인 것은 그런대로 봐 줄 만하지만, 사회적 감수성 자체가 거세된 채 ‘자폐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시정市井 생활인의 정서와 욕망과 무관한 자폐적인 창작물을 읽고 작가 수업을 하는 지망생들이 늘고 있다는 점은 한국 문학의 미래에도 좋은 현상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삶 ― 현실 텍스트는 언제나 항상 문학 작품보다 위대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쉽게 말해 ‘시인’ 되는 것은 쉬워도 한 사람의 온전한 ‘시민’이 된다는 것은 더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보아야 한다. 안산시 단원구에 주소지를 둔 신춘문예 응모자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겸허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절한 균형 잡힌 독서가 중요하다
독서동아리에서 문학 분야 책을 읽을 경우 국내외 고전과 현대물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독서를 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나라 고전에 대한 관심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그중에서 조선조 최고의 문장가인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의 책을 추천하고 싶다. 돌베개판 연암의 『열하일기』도 훌륭하지만, 연암의 진짜 진면목은 이른바 ‘잡문’을 의미하는 소품문小品文에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 2014년에 출간된 박석무 선생의 『다산 정약용 평전』(민음사)을 사유의 나침반 삼아 책을 골라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다산학의 권학자인 박석무 선생의 평전은 퍽 의미 있는 출판물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서양 고전의 경우 구성원들의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단테의 『새로운 인생』(민음사)을 권하고 싶다. 단테의 서정적 연애시를 모은 이 책은 신생新生을 의미하는 비타 누오바Vita Nuova의 한 정수를 잘 보여 주는 책이다. 좋은 문학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 안의 호기심이 죽지 않고, 나이가 들어도 말랑말랑한 연애 감정을 유지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인들은 이런 연애 감정에 유독 취약하다. 칠레의 유명한 시인 네루다의 시집 『질문의 책』(문학동네)과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책읽는오두막) 같은 책도 훌륭한 안내서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국내 문학 책의 경우 2014년에 좋은 장편 소설들이 여럿 출간되었다. 시대가 어두운 탓이리라. 최진영의 장편 소설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실천문학사)는 금융 자본주의의 빛과 그림자를 조명한 작품이다. 한 남자의 인생을 통해 생명보다 이윤을 추구하려는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조명하고 있는 1981년 작가 최진영은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나는 왜 살아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고. 주인공 원도의 파편화된 내면을 잘 보여 주는 모자이크식 형식 미학도 탁월하다. 5.18광주민주화항쟁 당시 희생된 어느 소년에 대한 기억을 환기하고 있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창비)도 빼놓을 수 없다. 5.18 때 희생된 소년이 화자가 되어 전개되는 소설 구성은 감동적이다. 4.16 이후 애도의 불가능성 문제와 오버랩되어 작품의 비극성이 더해지는 독서 경험을 했음은 물론이다.
착한 사람 ‘김만수’에 관한 성석제 장편소설 『투명인간』(창비)도 좋은 작품이다. 동아리 구성원들이 나이가 든 사람들이 많을 경우 성석제 소설을 권장하고 싶다. 1960~1970년대를 살아온 독자들이라면 성석제가 연출하는 기억의 풍경들에서 뭔가를 말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삼십 대를 전후한 젊은 사람들이 많다면, 김금희의 첫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창비)을 권하고 싶다. 정주와 이주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의 부력浮力을 부여잡으려는 인물 군상에 관한 이야기가 퍽 실감될 것 같다. 아버지 세대가 겪은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사태를 응시하는 이삼십 대 청년들의 이야기가 행간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성찰을 하고자 한다면 최인석의 장편 소설 『강철 무지개』(한겨레출판사)를 추천하고 싶다. 최인석 월드가 연출하는 대한민국의 근미래近未來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은 나와 우리에게 무엇인가 작은 변화를 위한 성찰과 행동을 촉구하는 바가 없지 않다.
시집의 경우 한국 시단의 맨 앞이라고 할 수 있는 이문재의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과 더불어 손세실리아 시인의 『꿈결에 시를 베다』(실천문학사)를 권하고 싶다. 두 시인의 시집 모두 소통과 공감의 문학 책 읽기의 진수를 보여 주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공자가 그랬던가. 시를 모르는 사람을 대하면 벽壁을 대하는 것만 같다고 한 사람은.
마음이 병든 자여, 책을 읽자
같은 책을 읽는 사람을 만난다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사이먼 앤 가펑클이 부른 팝송 제목처럼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다. 그런 만남은 나를 바꾸는 데 머물지 않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상호작용한다. 철학자 랑시에르의 저 유명한 ‘프롤레타리아의 밤’ 같은 개념은 프랑스혁명 이전 노동자들의 책 읽기가 사회를 바꾸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말하는 개념이 아니던가. 그리고 일본 젊은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책읽기는 혁명이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런 역사적 전거와 무관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혁명이라는 말을 정치적 의미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원래 혁명을 의미하는 영어 ‘Revolution’이라는 말은 회전volution을 의미하는 천체물리학에서 파생된 말이다. 회전의 방향을 ‘다시 돌린다’는 의미가 바로 혁명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책 읽기가 나와 사회를 바꾸는 작은 회전이 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돕고 서로 도우면서 새로운 공공성을 만들어 가는 독서동아리들의 즐거운 분투를 바라마지 않는다. 마음이 병든 자여, 책을 읽고, 글을 쓰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야말로 나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힘내시라, 독서동아리들이여!